남녘의 봄 향기가 퍼지는 매화마을[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전남 광양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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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운산 상봉과 신선대를 잇는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백운산(白雲山, 해발 1222m)은 전남 광양시 다압면·옥룡면·진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섬진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광양지역에서는 백운산이 봉황, 돼지, 여우의 세 가지 신령한 기운을 간직한 영산으로 여긴다.이 산은 10㎞에 이르는 4개의 능선이 남과 동으로 뻗어내리면서 성불·동곡·어치·금천의 깊은 계곡을 만들어 놓아 휴양 장소로도 발길이 잦다. 등산코스도 논실·진틀·용소·포스코수련관·성불교·내회·구황·청매실농원 등 여덟 코스가 열려있다.이번 산행은 제2코스 진틀공영주차장~진틀삼거리~상봉~신선대~진틀삼거리~원점회귀로, 총 8.1㎞이다. 새벽 세 시에 눈을 떠서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네 시에 출발한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긴 운전 끝에 진틀공영주차장(광양시 옥룡면 신재로 1654)에 도착한다. -
- ▲ 젓나무 숲길.ⓒ진경수 山 애호가
아침 햇살을 등진 백운산의 상봉과 신선대가 이루는 능선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다.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바위 봉우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뗀다. 산의 기운 탓일까, 장시간의 여독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지고 몸은 창공을 떠도는 구름처럼 가볍다.경사가 완만한 도로를 따라 논실1교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제법 경사진 포장길을 오른다. 병암계곡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펜션들을 지난다. 초록 저고리에 까만 치맛자락을 걸친 청초한 여인네의 선홍빛 입술과 같은 동백을 마주한다.산행에서 꺼리는 포장길, 길가에 피어난 동백의 아름다운 자태와 자그마한 싱그러운 야상화, 가슴에 와닿는 찬란한 아침 태양 빛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약 0.9㎞을 오르니 병암산장에 도착한다. 이곳부터 본격적인 산행인 셈이다. 백운산 정상까지 2.7㎞라고 알린다. -
- ▲ 거친 바윗길.ⓒ진경수 山 애호가
돌길에서 시작한 산길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바윗길로 모습을 바꾼다. 청아한 새들의 노랫소리, 만물을 깨우는 청량한 계곡물 노랫소리, 그리고 거친 바위들을 부드러운 배우로 연출시키는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자연의 공연에 유일한 관객이 되니 황홀하기 그지없다.짤막한 잣나무 숲길을 지나 우리네 삶처럼 얽히고설킨 앙상한 나무뿌리와 초록빛 조릿대 숲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거친 바윗길이 속살을 드러낸다. 혹여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되어 드문드문 바위에 둥근 흰점을 그려놓았다.흥취를 돋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느새 숫가마터가 있는 진틀삼거리로 이끈다. 신선대(1.2㎞)와 백운산 정상인 상봉(1.4㎞)의 갈림길, 선택은 어쩜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짐을 안다. 그러나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꽤 만만치 않다. -
- ▲ 백운산 정상을 오르는 신갈나무 눈길.ⓒ진경수 山 애호가
허나 자연의 순리와 본연의 마음에 충실하다면 올바른 선택은 마냥 어렵지마는 아닌 듯하다. 곧바로 백운산 정상으로 오르기로 하고 돌밭 사이를 헤집고 내려가는 계곡을 건넌다. 움푹 파여 거칠고 가파른 돌길을 계속 오른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은 몸을 달궈 윗도리를 벗긴다.한바탕 힘을 쏟으며 오른 후 공간을 향해 힘차게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수시로 변하는 마음, 서서히 쇠약해져 가는 몸뚱이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어찌해야 이 자연에 오염원이 되지 않고 흔쾌히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말이다.고도를 서서히 높이자 보이지 않던 잔설이 산길을 대신하고, 골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니 찬기가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벌거벗은 나뭇가지 덕분에 오르는 내내 신선대와 백운산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발걸음엔 힘이 잔뜩 들어간다. -
- ▲ 백운산 상봉과 그곳을 오르고 있는 거북바위.ⓒ진경수 山 애호가
밧줄이 쳐진 지그재그 돌길을 휘돌아 오르니 숲속을 오르는 435계단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과 만난다. 제법 강해진 역광은 묵직함을 더한다. 계단을 밟으며 오르는 길에 삶의 무게를 덜어낼 답을 얻으려 하지만 잡을수록 점점 메아리처럼 사라져갈 뿐이다. 그냥 지금처럼 숨소리에 발걸음에 집중하라 한다.백운산 정상이 한층 가까워지고, 신선대까지 이어진 울퉁불퉁 잿빛 능선이 복잡한 마음을 단순함으로 바꿔놓는다. 어쩜 삶의 그 끝은 화려한 풍족함이 아니라 단순 검소한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싶다.계단 끝에서 몇 발자국 오르자, 백운산 정상(0.3㎞)과 억불봉(6.0㎞)으로 갈라지는 능선 삼거리에 도착한다. 고산의 세찬 바람과 서늘함 때문에 나지막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잿빛 신갈나무 숲이 백운산 정상으로 길을 이끈다. 하늘을 향해 멋들어지게 흔들어대는 나뭇가지가 하늘의 풍악에 맞춘 춤새와 같다. -
- ▲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억불봉 방향.ⓒ진경수 山 애호가
유달리 산길만 잔설이 남아 있으니 산은 홀로 쉬고 싶다고 앙탈을 부리는 듯하다. 아우르고 달래며 살살 올라 정상을 코앞에 두고 쉼터에 잠시 머물며 심장과 발걸음에 쉼을 준다. 희뿌연 미세먼지 속으로 사라진 산 너울에 아쉬움이 남는다.새순의 꿈이 움트는 나뭇가지 끝에 시선이 맞닿으니 그래도 미세먼지가 사라진 봄날의 희망을 기대하며 다시 정상길에 나선다. 6코스 내회와 8코스 청매실농원에서 출발해 매봉에서 올라오는 합류 지점을 지난다. 계단을 올라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해발 1222m 백운산 상봉에 도착한다.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오니 몸을 제대로 가늘 수 없을 정도다. 이 바람이 미세먼지를 걷어낸다면 저 멀리 한려수도와 광양만, 지리산 능선도 볼 수 있으련만, 파노라마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전경과 부근 봉우리를 조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 ▲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신선대.ⓒ진경수 山 애호가
봄이면 철쭉으로 유명한 국사봉을 비롯해 억불봉, 신선대와 그 뒤로 도솔봉, 따리봉 등을 조망한다. 정상에서 전망데크로 내려오는데 거북바위와 조우한다. 득도를 위해 멀리 광양 앞바다에서 출발해 백운산 정상을 지척에 두고 있다. 조금만 힘내라고 응원한다.이제 신선대로 향하는 능선길, 여전히 돌길, 바윗길의 연속이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다 보면 상백운암 근처 큰바위얼굴에 이어 이 계절 산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얼굴바위를 만난다. 이 바위의 형상이 마치 노자(老子)가 혀를 내민 얼굴 모습이 상상된다.공자(孔子)가 제자들을 이끌고 노자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을 때, 노자는 빠진 이를 보여준 후에 다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고 한다. 이는 이빨은 강하지만 오래 부딪쳐 망가짐을 면치 못했지만, 혀는 부드럽지만 오래도록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
- ▲ 노자의 얼굴바위.ⓒ진경수 山 애호가
도덕경(道德經) 제76 유약장(柔弱章)에 “강대처하 유약처상(强大處下 柔弱處上)”의 가르침이 있다. 즉 강력함은 하수의 책략이고 유약함은 상수의 처세라는 뜻이다. 이 산에서 다시 노자의 지혜를 일깨운다. 이것이 광양의 백운산이 지닌 매력 중의 하나이다.백운산 정상에서 출발해 약 0.8㎞를 이동하면 거대한 바위, 신선대를 만난다. 곧바로 암봉에 오를 수 없으니,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 계단을 이용해 정상을 오른다. 그늘진 오름길이라 아직 잔설과 얼음이 깔려있어 조심스럽다.드디어 해발 1198m 신선대에 닿는다. 널찍한 바위 품에 안기니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이 가히 신선이 머물었던 자리로 손색이 없다. 신선대 옆으로 주목이 죽어가고 있지만 어린 주목이 자라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환경 변화의 심각성을 알린다. -
- ▲ 신선대에서 바라본 백운산 상봉으로 이어진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신선대에 앉아 봄 햇살을 받으며 잠시 신선놀음에 시간 흐름을 잊는다. 휴식기에 접어든 산에 들어선 산객의 발걸음은 평화롭고 고아한 수묵화처럼 느긋하지만,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은 외려 분주하다.신선대에 주저앉아 머뭇거리는 엉덩이를 재촉해 하산을 시작한다. 신선대에서 하산하는 길도 가파른 경사로 시작하고, 역시 돌길이다. 잠시 유순한 능선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릎 관절을 괴롭힌다. 산행은 마치 우리네 생애주기와 같다.중장년 성숙기에 이를 때까지 성공을 향해 부지런히 오르는 재미에 힘들어도 참고 버텼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얻음을 하나둘 내려놓고, 돌아가는 길은 몸도 마음도 괴롭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잃음 대신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 하나를 얻기 위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산행을 하는 건 아닐까 싶다. -
- ▲ 봄소식을 전하는 광양 매화마을.ⓒ진경수 山 애호가
능선 끄트머리쯤에 이르러 진틀삼거리 방향으로 가파른 비탈의 계단을 내려간다. 초록빛 싱그러운 조릿대밭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길, 확연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 계단은 돌길로 이어지고 얼마지 않아 진틀삼거리에 이른다.세상에 이런 일이, 이곳에서 1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진척 동생을 만나다니 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00대 명산 산행 중인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산행을 위해 오늘 일찍 조계산을 다녀왔고 두 번째로 오르는 산이란다.아무쪼록 아우의 무탈한 산행을 기원하고, 산행의 숫자에 연연하기보다는 산에서 진정한 삶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한다. 만남을 뒤로하고 서둘러 하행하여 진틀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에 광양 매화마을(광양시 다압면 목길 34-2)로 출발한다. -
- ▲ 매화마을을 방문한 상춘객.ⓒ진경수 山 애호가
약 44㎞를 달려 섬진강 하류 백운산 자락에 자리한 광양 매화마을에 도착한다. 개인이 운영하는 청매실농원이 상춘객을 위해 개방하면서 온 마을 주민이 함께 축제를 준비하고 즐긴다. 이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는 지역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기온이 낮아서 개화율이 50% 정도이고, 그나마 일찍 핀 홍매화는 춘설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 해도 달콤한 매화 향이 코끝을 행복하게 하고, 하얀빛, 분홍빛, 붉은빛의 꽃과 꽃망울이 장식한 아름다운 공간은 눈을 황홀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사랑으로, 낭만으로, 소망으로, 추억으로의 산책길 곳곳을 둘러보며 봄의 향연을 만끽한다. 이곳에는 백운산 등산 8코스(14.6㎞)가 있지만, 원점회귀코스는 아니다. 백운산의 정기와 매화마을의 봄꽃 향기를 듬뿍 받은 심신이 내일은 또 어떤 아름다운 삶을 만들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