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핫세’ 판넬·노령연금 청구안내문 ‘쫄보의 모습’
  •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행길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이유는 곧 바뀔 거란 걸 알기 때문 아닐까?
    “얘야, 우체부가 와서 군대니 뭐니 하더니 이걸 놓고 갔다.” 병무청에서 보낸 입영통지서였다. 1982년 1월 10일 8시까지 내수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징집통지서였다. 일방적인 겁박이었다. 
    “우편물이 왔습니다.” 국민연금공단에서 보낸 노령연금 청구안내문이었다. 2024년 6월 1일부터 수급개시 연령 대상이 되었다며 5년 이내에 연금청구를 하지 않으면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해 연금을 받을 수 없다는 무지막지한 공갈도 서슴지 않았다. 
    무심코 한눈파는 사이에 43년이 지워졌다. 산고의 고통을 이겨낸 후 하얀 도화지 위에 탯줄을 올려 두고 지그시 눈을 감으셨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처연하다. “아이고 우리 집 막내아들, 이쁜 복덩어리” 그랬던 어머니가 곁에 없다. 쫄보는 어머니가 그리운 아들이다. 또한, 아들이 보고픈 어머니이다. 사무치도록 외로움이 스산하게 몰려온다. 
    입영통지서 그리고 ‘올리비아 핫세’ 판넬과 노령연금 청구안내문이 모두가 행길에 서있는 쫄보의 모습이다. 
    “어 이게 누구야, 황금란?” 따사로운 햇살이 ‘마인 카페’ 창문 틈으로 숨어들어와 금란이 얼굴을 벌겋게 달군다. “많이 변했네….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어? 보면 뭘 해. 마음만 아프고 실망할 텐데…” 서로 말이 없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결혼은 했겠지?” “응,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밥 챙겨주고 나왔어.” 쫄보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못 했다. 가벼워야 할 시곗바늘이 세월에 눌려 무겁게 떨고 있다. (TV 드라마에서) 최민수와 고현정은 별장으로 도피해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으며 최후의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철문이 열리고 사형장에 둘이 마주 앉는다. 검사 박상원과 깡패 최민수가 클로즈업되어 마음을 옥죈다. “나 떨고 있냐?” “아니” 약지 손가락 반지를 빼서 박상원에게 건네준다. 
    하늘이 느끄름하다. 된바람 불 적에 만나 ‘올리비아 핫세’를 마음에 품고, 샛바람 오기 전 물레방아 룸살롱을 습격하여 최후의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마파람 맞으며 22년 만에 철문이 열린 ‘마인 카페’에 마주 앉았다. 몹시도 거친 센바람이 분다. 불어오는 이 바람에 쫄보는 넋을 잃었다. 말할 수 없이 찌든 삶의 무게가 어깨에, 고단한 일상으로 흐트러진 마음이 머리에, 힘겨운 하루의 고난이 두 다리에 걸려 있다. 침이 마른다. 하늘이 느끄름하다.
    ‘마인 카페’ 카운터 옆 턴테이블에서 LP판이 돌아간다. ‘너는 바보야 그를 잡고 말을 못 하면 떠나가 버려 어서 말을 해. 흔적 없는 거리거리마다 말 못 하는 사람들뿐이야’ 
    쫄보는 21년 동안 추억의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그 시절 그때의 느낌과 설렘을 한 바가지 마시고 깔끔하게 익사했다. 파릇파릇했던 월현 마을 아씨는 쫄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시울을 내리고 오관을 다독인다. 눈으로는 배배 꼬인 몸가짐을 보고, 귀를 통해서 거친 숨소리를 듣고, 코를 통해서 체취를 느낀다. 혀를 통해서 최후의 하룻밤 맛을 음미하고, 피부를 통해서는 닭살 돋은 숨결로 숨을 내쉰다. 
    시간은 또다시 속절없이 흘러 햇수로 21년을 더 넘겼다. 약지 손가락을 세워 ‘011을 010으로’ ‘238국을 5238’로 바꿔보았다.
    같은 육십 대 당신과 난 너무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누른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 대단히 죄송합니다."
    2024년 4월 2일. ‘정만 주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울고 말 것을 미워하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후회할 것을….’ 이재룡 켜켜이 쌓인 추억을 허물어 참글로 마지막 매듭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