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대 악산이란 걸 체험한 산행[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강원 원주시 편
  • ▲ 단풍이 절정에 이른 고도 800m의 사다리병창길.ⓒ진경수 山 애호가
    ▲ 단풍이 절정에 이른 고도 800m의 사다리병창길.ⓒ진경수 山 애호가
    치악산은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려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과 영월군 수주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원주시의 진산(鎭山)이다. 예로부터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으로 불리다가 상원사 꿩(雉)의 보은설화로 인해 지금의 치악산(雉嶽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치악산의 주요 봉우리로는 비로봉(飛蘆峰, 해발 1288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매화산(梅花山, 해발 1084m)·삼봉(三峰, 해발 1073m)과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 해발 1043m)·남대봉(南臺峰 해발 1,182m) 등 여러 봉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번 산행은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다녀오는 코스로, ‘신흥주차장 입구~황금장표~구룡사~세렴폭포~계곡길~비로봉 정상~사다리병창길~원점회귀’이며 산행 거리는 약 13㎞이다. 비로봉은 시루를 엎어놓은 모양이라 ‘시루봉’이라고도 불린다.
  • ▲ 세렴폭포.ⓒ진경수 山 애호가
    ▲ 세렴폭포.ⓒ진경수 山 애호가
    신흥주차장 입구를 지나 상점을 막 돌아서자 바위에 새겨진 황장금표(黃腸禁標)를 만난다. 황장목(黃腸木)의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하는 경계의 표시다. 이를 어기는 날에는 곤장 100대를 맞는 벌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계곡 옆에 설치된 데크를 걷자니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경쾌한 소리를 내는 계곡물에 마음이 흠뻑 젖는다. 다리를 건넌 후 구룡사 일주문을 통과하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 장쾌하게 흐르는 구룡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울창한 금강소나무의 솔향으로 온몸을 씻고 청결한 심신으로 구룡사를 만난다. 작은 소원 연동이 주렁주렁 매달린 목교를 지나면서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하는 구룡소가 눈길을 끈다. 이어 계곡을 따라 완만한 길을 이동하다 보면 다리를 건너자마자 대곡안전센터에 이른다.
  • ▲ 칠석폭포.ⓒ진경수 山 애호가
    ▲ 칠석폭포.ⓒ진경수 山 애호가
    이후 평탄석과 촉촉하게 젖은 매트가 깔린 산책로가 굽이치는 계곡과 나란히 세렴안전센터까지 완만하게 이어진다. 걷는 내내 심금을 울리는 물소리, 울창한 숲의 다채로운 색상, 애간장을 녹이듯 간간이 비추는 햇살 등이 낭만의 계절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세렴안전센터에서 바윗돌을 징검다리 삼아 계곡으로 이동해 높이 6.7m에서 2단으로 굽이쳐 내리는 장쾌한 모습의 세렴폭포를 만난다. 오탁의 세상을 맑고 밝게 정화하려는 듯 폭포수는 쉼 없이 청량하게 쏟아진다. 폭포가 퍼뜨리는 음이온이 몸속의 양이온을 중화시킨다.

    다시 세렴안전센터로 돌아와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곧이어 사다리병창길(능선길, 2.7㎞)과 계곡길(2.8㎞)을 만난다. 사다리병창길은 경사가 심하고 계단이 많아 매우 어려운 코스이고, 계곡길 역시 자유분방한 가파른 바윗길이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계곡의 환상적인 풍광을 먼저 만나기 위해 계곡길로 접어든다.
  • ▲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고도 900m.ⓒ진경수 山 애호가
    ▲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고도 900m.ⓒ진경수 山 애호가
    평탄한 듯한 계곡길 초입을 지나자, 치악산의 ‘악’의 명성답게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원시림처럼 거칠고 험난한 힘겨운 구간에 설치된 계단 덕분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칠석폭포에 도착한다. 폭포 주변에는 이미 산악회 등산객들로 북색통을 이룬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 돌머리를 누르며 계곡을 오른다. 수없이 굽이치는 물길을 거슬러 비로봉 제1교를 지나 데크와 계단을 오른다. 자연이 빚어 놓고 세월이 만든 신묘한 계곡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인정사정없이 치받는 거친 바윗길이 무심하게 길손을 맞는다.

    울울창창한 숲, 깊은 계곡, 푸른 이끼를 머금은 바윗길을 걷다 보니 진한 자연의 내음, 세월의 향기에 동화된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숨은 가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나마 거친 바윗길에 설치된 철제 난간 덕에 안전하게 오른다.
  • ▲ 해발 1217m 비로봉 삼거리.ⓒ진경수 山 애호가
    ▲ 해발 1217m 비로봉 삼거리.ⓒ진경수 山 애호가
    바윗길과 계단길이 번갈아 발에 닿는 무게를 더하는 오르막, 해발 900m에 이르면서 초록빛은 다채로운 색으로 모습을 바꾸며 산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 아름다움을 마주하자 감동이 복받쳐 오르니 가파른 오르막의 힘든 기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쉬이 길을 내주지 않으려는 듯한 울퉁불퉁한 바윗길엔 오색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내내 치닫는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돌아갈 수 없는 삶처럼 묵묵히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으니 지금을 즐기며 한발 한발 오른다. 곡풍이 등을 밀어 열을 식히며 힘을 덜어준다. 

    고도가 1000m를 넘어서자 갈색빛이 만연하고 숲이 열리면서 멀리 천지봉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급경사의 바윗길과 계단길이 연이어지면서 심장은 더욱 바쁘게 거칠어진다. 헐떡이는 숨을 달래며 계단을 오르자 병풍바위가 내려다보며 힘내라 응원한다.
  • ▲ 비로봉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 비로봉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마침내 해발 1217m 비로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제 비로봉 정상이 지척이다. 평상에 앉아 거친 호흡을 고르며 신광(身光)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는 비로봉을 만날 준비를 한다. 이곳에서 정상부까지는 낙뢰 다발지역이라 비 올 때 주의해야 한다. 

    빛바랜 잎을 반쯤 떨군 참나무숲 사이로 가파른 계단과 돌길을 오른다. 여느 산이나 정상을 앞두고 허리를 펴기 마련이지만, 치악산 정상부는 더 꼿꼿하다.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기암을 지나 막바지 계단을 오르자 비로봉(해발 1288m) 돌탑이 마중 나와 반긴다.

    서늘한 바람이 등산객의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미륵불탑은 삼매에 들었는지 고요할 뿐이다. 사방을 둘러가며 발밑으로 보이는 남대봉과 향로봉, 삼봉, 투구봉, 토끼봉, 천지봉 등이 이루는 근육질 능선은 시선을 압도한다. 
  • ▲ 산허리까지 내려온 단풍.ⓒ진경수 山 애호가
    ▲ 산허리까지 내려온 단풍.ⓒ진경수 山 애호가
    사다리병창길로 하산을 시작하자 곧바로 칠성탑을 만난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 곧추선 계단에 발을 내려놓자 천지봉과 앞으로 걸어갈 능선의 앉음새가 옹골차다. 가을은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로 내려온다더니, 벌써 단풍이 산허리에 이르렀다.

    말라 비틀어진 갈색 나뭇잎을 매달고 아등바등하는 숲 사이로 돌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마치 익어가는 세월에 하나둘 몸을 떠나간 치아가 연상된다. 불과 몇 개 남은 것만이라고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애절하고 간절하지만, 더 늘그막엔 혀만 남으리라. 

    노자는 가르침을 청하러 온 공자에게 이가 다 빠진 입을 벌리고 혀를 쭉 내밀었다고 한다. 도덕경 제36장에 나오는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즉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단단한 것을 이긴다’라는 말을 늙은이의 혀로 대신한다는 뜻을 되새겨 본다.
  • ▲ 하산길을 내려다보며 배웅하는 뾰족한 비로봉.ⓒ진경수 山 애호가
    ▲ 하산길을 내려다보며 배웅하는 뾰족한 비로봉.ⓒ진경수 山 애호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아는 걸까. 뾰족한 비로봉이 내려다보며 안전하게 가라고 손짓한다. 비로봉 기점 0.7㎞ 지점의 기암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기암이 나무를 키운 건지, 나무가 바위에 기생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신묘한 조화가 경이롭다.

    구불구불한 급경사의 계단을 내려서면 기암들이 잰걸음을 늦춘다. 비로봉에서 시작해 고도가 낮아지며 1.1㎞ 지점을 지나자 가을이 점점 깊어진다. 기암과 함께 오색단풍의 화려한 향연에 빠져든다. 말등바위 전망대에서 치악산이 선사하는 마지막 풍광을 즐긴다.

    전망대에서 솔향 그윽한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미끄럼틀을 타듯 계단을 내려간다. 노랗고 불그스레한 황홀한 단풍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가을의 추억이 심장 속으로 파고드니 힘들었던 여정이 외려 에너지의 원동력이 된다.
  • ▲ 황홀함이 가득한 단풍길.ⓒ진경수 山 애호가
    ▲ 황홀함이 가득한 단풍길.ⓒ진경수 山 애호가
    단풍과 기암 놀이에 이동하는 시간보다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한참을 내려선 것 같은데 아직도 해발 800m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눕기 시작한 해는 산등성에 걸쳐 있고 약해진 빛마저 구름이 가리니 산속이 아슴푸레하다.

    구룡사를 3.3㎞ 앞두고 바윗길과 가파른 계단길이 계속되며, 거대한 바위 옆을 지나자 절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사다리병창을 만난다. 길게 내리뻗은 암반 양옆으로 설치된 철제 난간과 숲에 가려진 벼랑 탓에 짜릿함이 덜하다.

    양쪽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어둑한 귓전에도 들릴 무렵, 세렴폭포가 0.5㎞ 거리에 있다고 알리는 이정표를 지난다. 이젠 힘들고 가파른 돌길과 계단의 끝이 보인다. 계곡과 사다리병창 갈림길에서 계곡을 건너 세렴안전센터에 닿는다.
  • ▲ 사다리병창길.ⓒ진경수 山 애호가
    ▲ 사다리병창길.ⓒ진경수 山 애호가
    그냥 가기엔 아쉬워 홀로 있는 세렴폭포를 독대하려 계곡으로 들어간다. 폭포수는 아침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쾌하다. 그 기운을 받아 이제 완만한 산책로를 걷는다. 힘든 산길 끝에 찾아온 걷기 편한 길이다. 어둑한 계곡의 물보라는 성인처럼 더 밝은 빛으로 다가온다.

    우리네 삶은 산길처럼 굴곡의 연속이다. 오죽하면 도덕경 제58장에 ‘화혜 복지소의, 복혜 화지소복(禍兮 福之所倚, 福兮 禍之所伏)’이라 했던가. 즉, ‘화 속에 복이 깃들어 있고, 복 안에 화가 숨어 있다’라는 말이다.  

    고난의 기운이 쇠하면 행복이 생겨날 것이고, 행복의 밑천이 바닥나면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지금의 고난과 행복은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현재 걷고 있는 걸음에 집중하며 행복한 나를 발견하고, 내일에도 또 오늘처럼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