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산골영화제와 함께 하는 산행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전북 무주군 편
  • ▲ 덕유산 향적봉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 덕유산 향적봉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덕유산(德裕山)은 경남 함양군·거창군과 전북 무주군·장수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1975년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주봉인 향적봉(香積峰, 해발 1614m)은 우리나라에서 한라산(해발 1947m), 지리산(해발 1915m), 설악산(해발 1708m)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산명(山名)은 백성들을 지킨 덕(德)이 넉넉한 산이라 하여 덕유산(德裕山)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덕유산은 향적봉과 남덕유산이 쌍봉을 이루고 있으며, 향적봉이 부드러운 어머니의 산이라면, 남덕유산은 엄한 아버지를 떠올리는 거친 산세를 지녔다.

    2025년 6월 6일부터 8일까지 무주군 일원에서 개최되는 제13회 무주산골영화제의 메인 협력파트너인 ㈜진우아이엔씨의 초청으로 이틀은 영화제를 즐기고, 하루는 덕유산 향적봉을 다녀오는 힐링 산행키로 한다. 이번 산행 코스는 ‘탐방지원센터~백련사~오수자굴~중봉~향적봉~백련사~원점회귀’로 산행 거리는 약 19㎞에 달한다.
  • ▲ 구천동 제15경 월하탄.ⓒ진경수 山 애호가
    ▲ 구천동 제15경 월하탄.ⓒ진경수 山 애호가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 5시 30분쯤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아직 어둑어둑한 탐방로에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선녀들이 달빛 아래 춤을 추며 내려오듯 두 줄기 폭포수가 비스듬한 암반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구천동 제15경 월하탄(月下灘)에 이른다.

    이어 계곡을 잇는 다리를 건너면 덕유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를 만난다. 이곳부터 탐방로와 구천동 옛길을 복원한 구천동어사길을 선택해서 걸을 수 있다. 상행은 탐방로, 하행은 어사길을 걷기로 한다. 폭포와 반석이 절묘한 승경(勝景)을 이루는 구천동 제16경 인월담(印月潭)에 도착한다.

    향적봉과 칠봉의 갈림길을 지나 사자가 목욕을 즐겼다는 구천동 사자담(獅子潭)과 청류동(淸流洞)을 지난다. 그리고 천상의 칠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한 후 너럭바위에 앉아 비파를 뜯으며 놀았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구천동 제19경 비파담(琵琶潭)을 만났다.
  • ▲ 제19경 비파담.ⓒ진경수 山 애호가
    ▲ 제19경 비파담.ⓒ진경수 山 애호가
    덕유산휴게소를 지나 금포탄(琴浦灘)을 지나면서 하늘빛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 소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리에 둔감해지는 감각을 깨우듯이 말이다. 길은 굽이치는 계곡을 따라 점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

    적막한 길과 동행하는 냇물 소리에 조금씩 빛이 깃들고, 곤줄박이와 어치 등과 같은 새들과 함께하니 호젓했던 산길에 생기가 넘쳐 분주함마저 감돈다. 보는 것이 남의 행실, 듣는 것이 남의 말이어서 남을 잘 아는 척하지만, 정작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구천동 제27경 명경담(明鏡潭)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맑디맑은 담수에 몸뚱이는 물론 마음도 한꺼번에 비추어본다. 속세에 얼룩진 심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돌이켜보고 가다듬는다. 다시 이어진 발걸음은 백련교를 건너 덕유산 백련사 일주문을 통과한다.
  • ▲ 구천동 제27경 명경담.ⓒ진경수 山 애호가
    ▲ 구천동 제27경 명경담.ⓒ진경수 山 애호가
    사바세계를 떠나는 중생들이 속세와 연을 끊는 곳이라는 이속대(離俗臺)를 지나 백련사(白蓮寺) 앞에 도착한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숨어 살던 이곳에서 하얀 연꽃이 솟아 나와서 이 자리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향적봉2코스로 가려면 백련사 경내를 통과하여 오르고, 중봉으로 가려면 오수자굴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이번 산행은 오수자굴로 올라 백련사로 하행키로 한다. 계곡으로 들어서자 원시림을 연상케 하는 숲길이다. 

    빛을 잃은 계곡엔 으슥함마저 엄습해 온다. 울퉁불퉁 바윗길은 완만한 경사로 줄곧 이어지면서 계곡과 멀어졌다가 이내 가까워지길 반복한다. 목교를 지나면서 이른 아침의 여린 햇살이 수목과 대지를 비추기 시작한다. 금시에 만물이 깨어나 꿈틀거리며 생기를 되찾는다.
  • ▲ 만물에 생기를 주는 여린 아침 햇살.ⓒ진경수 山 애호가
    ▲ 만물에 생기를 주는 여린 아침 햇살.ⓒ진경수 山 애호가
    산길의 작은 돌이 물에 불은 듯 큼직한 바위들로 모양을 바꾸며 너덜지대를 이룬다. 이런 길에선 자칫 길을 잃기 쉽다. 다행스럽게 안내 밧줄이 설치돼 있어 안전하게 너덜지대를 빠져나온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맑은 계곡물은 잔잔하게 움직이는 물결의 그림자마저 담는다. 

    서서히 계곡과 이별을 준비하면서 고도를 높인다. 잘 정돈된 자연석 계단을 오르자 해발 1242m에 위치한 오수자굴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오수자라는 스님이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순수하고 맑은 이러한 자연은 스님의 득도에 일조했겠다 싶다.

    데크 계단과 가파른 바윗길이 반복하며 이어진다. 길쭉한 참나무들은 산죽을 품에 안아 어울림의 조화를, 등산객에게 그늘을 만들어 베풂의 덕행을 일러주는 듯하다. 이 산의 부드럽고 높은 산세의 깊은 골짜기가 백성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 ▲ 오수자굴.ⓒ진경수 山 애호가
    ▲ 오수자굴.ⓒ진경수 山 애호가
    고도를 높일수록 참나무들은 키를 낮추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열리며 유월의 따가운 햇볕에 온몸이 그대로 노출된다. 해발 1470m를 알리는 이정표가 중봉까지 0.5㎞가 남았다고 알려준다. 구릉에 올라 부드러운 쌍봉으로 다가온 중봉과 시선을 맞추고 그곳으로 향한다.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참나무 숲길은 간간이 철쭉 꽃잎이 흩뿌려져 있어 꽃길을 걷는 것 같다. 생명력이 넘치는 푸르름이 가득한 숲사이로 불끈불끈 튀어나는 바위에 힘찬 기운을 느낀다.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지나온 산길이 마치 갓난아이의 볼살 같다.

    백암봉에서 횡경재로 이어지는 능선 뒤로 켜켜이 이어진 산등성이들이 너울댄다. 덕유산 능선에서 무룡산·삿갓봉·남덕유산·서봉, 그리고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중봉 자락엔 듬성듬성 연분홍빛이 덧칠한다.
  • ▲ 덕유산 중봉 자락에 핀 철쭉꽃.ⓒ진경수 山 애호가
    ▲ 덕유산 중봉 자락에 핀 철쭉꽃.ⓒ진경수 山 애호가
    지척인 중봉까지 이동하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장쾌하게 펼쳐진 풍광과 아름답게 핀 철쭉꽃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드디어 해발 1594m 중봉에 도착한다. 사방으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남덕유산을 바라보니 지난해 겨울, 그곳에서 만났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설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산은 계절마다 색다른 얼굴로 등산객들을 즐겁게 하지만, 그 산이 지닌 본질은 변함이 없다. 

    가치 있는 삶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여기기보다는 이 산들처럼 삶의 가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방편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쩜 더 지혜로운 사람의 사고가 아닐까 싶다. 이는 결코 변질이 아니라 외려 깊은 가치를 부여하는 실용이 아닐까 싶다.
  • ▲ 중봉에서 동엽령을 거쳐 서봉까지 이어진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 중봉에서 동엽령을 거쳐 서봉까지 이어진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이제 오늘 산행의 최종 목적지 향적봉을 향해 덕유평전(德裕平田)을 걷는다. 중봉에서 내려서자마자 좌측으로 노랑원추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초록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바람에 쉼 없이 흐느적대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유연하면서도 굳건한 모습이 엄마를 닮았다.

    주목과 구상나무의 군락지 구간에 들어서니, 생나무와 고사목의 우뚝 선 모습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잠들면 죽은 것이고 깨어나면 산 것이요, 들숨 날숨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있으면 산 것이다. 딱딱하면 죽은 것이고 유연하면 산 것이다.

    이렇듯 사고의 유연성이 안팎으로 막힘 없이 드나들 수 있고, 시민의식이 깨어있을 때만 산 자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몸뚱이는 살아있다고 한들 그 정신은 죽은 바와 다르지 않다. 노자 도덕경 25장에서도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리라는 것은 자연을 본받을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 ▲ 중봉에서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덕유평전.ⓒ진경수 山 애호가
    ▲ 중봉에서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덕유평전.ⓒ진경수 山 애호가
    그런가 하면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함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의 유구한 세월을 품고 존재하는 주목에서 많은 걸 배운다.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룬 당태종 이세민의 3개 거울이 생각난다. 자신의 옷맵시나 처신을 돌아본 동감(銅鑒), 역사를 통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한 사감(史鑒), 성인군자를 통해 지혜를 얻은 인감(人鑒)이 바로 그것이다.

    사색의 숲길을 걷다가 문득 마주친 철쭉의 매혹적인 자태에 매료되어 한동안 꼼짝달싹 못 하고 그 자리를 지킨다. 마법에서 풀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느라 또 시간을 지체한다.
  • ▲ 중봉-향적봉 주목·구상나무 군락지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 중봉-향적봉 주목·구상나무 군락지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향적봉까지 0.3㎞를 앞에 두고 능선에서 산비탈로 내려선다. 향적봉대피소를 지나 다시 향적봉을 향해 오르막길에 나선다. 100여m를 오르자 드디어 해발 1614m 향적봉에 도착한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향적봉 훼손지 복원 안내판이다.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이후 설천봉 관광곤도라 운행으로 인해 구름 인파가 모이면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향적봉의 생태계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훼손지 복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훼손은 1년, 복원은 100년’이란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젠 기도의 향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향기가 쌓여서 생태계 복원이 성공되길 기원한다.

    향적봉에는 휴일을 맞이하여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등산객들이라기보다는 대부분 곤도라를 타고 설천봉에 도착해서 향적봉으로 올라온 관광객들인 듯싶다. 향적봉 정상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정상 표지석이 있다. 그곳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을 제대로 감상한다.
  • ▲ 설천봉-칠봉 탐방로의 슬로프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 설천봉-칠봉 탐방로의 슬로프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북쪽 정상 표지석 부근의 바위에 오르니, 올해 2월에 화재로 전소된 설천봉 상제루쉼터 자리가 보인다. 이 아름다운 산에 옮겨붙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설천봉에서 칠봉으로 이어지는 탐방로 구간 중 슬로프 구간이 선명한 자국을 드러낸다.

    영상 30도 안팎의 뜨거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향적봉2코스 방향으로 하행한다. 비교적 가파른 계단과 돌길로 꽤 힘든 코스이다. 우거진 참나무 숲길 2.5㎞을 내려오면 백련사 삼성각 옆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명부전, 대웅전, 원통전, 범종각, 우화루, 사천왕문을 차례대로 내려와 어사길을 걷는다. 이 길은 탐방로보다 계곡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운치도 있다. 군데군데 담(潭)·폭(瀑)·탄(灘)·대(臺)가 있으나, 그렇지 않은 곳도 별반 차이가 없다.

    늘 그랬듯 산행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두근거리게 하고, 또 한 주를 힘차게 살아갈 꿈과 희망을 준다. 혹여 내일 어떤 일이 삶을 힘들게 할지라도, 오늘의 산행에서 얻은 자연의 힘찬 에너지로 치유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