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의 꽃봉오리가 황매평전에 펼쳐져[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경남 합천군 편
  • ▲ 황매평전을 지나 오르게 되는 황매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 황매평전을 지나 오르게 되는 황매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황매산(黃梅山, 해발 1113m)은 경남 합천군 가회면·대병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영남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북쪽으로 덕유산(해발 1614m)과 가야산(해발 1430m), 남서쪽으로 지리산(해발 1915m)의 고봉 준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황매산은 매년 5월이면 하늘과 맞닿을 듯 드넓은 진분홍빛 산상의 화원이 펼쳐지는 철쭉꽃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4월 말 마지막 주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춘화(春花)의 과정을 거쳐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황매산의 철쭉 꽃봉오리를 만난다.

    시야의 범위가 좁은 야간 운전을 장시간 해야 하는 까닭에 출발을 서두른다. 이른 새벽 황매산 정상주차장(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산 219-16)에 도착한다. 칠흑같은 어둠,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어 헤드라이트를 착용하고 길의 방향을 잡아 철쭉 군락지로 오른다.
  • ▲ 여명, 그리고 그믐달과 별 하나.ⓒ진경수 山 애호가
    ▲ 여명, 그리고 그믐달과 별 하나.ⓒ진경수 山 애호가
    세찬 찬바람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발걸음에만 집중하며 오른다. 어둠 속을 홀로 걸어 오르니 만감이 교차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여명이 트기 시작하는 방향으로 그믐달과 유독 빛나는 하나의 별이 이룬 환상적인 조화가 참으로 희유하다.

    어둠도, 그믐달과 빛나는 별도 해가 뜨면 곧 여명 속으로 사라진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곧 사라져 갈 것이니, 탓도 포기도 하지 말고 그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는다. 

    또한, 지금의 부귀영화가 계속되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그것이 하나하나의 소중한 인연으로 얻어진 것임을 깨달아 나눔과 겸손으로 더불어 살아가리라. 얼마 전 선종(善終)에 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남긴 100달러짜리 지폐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 ▲ 여명이 밝아오는 황매산.ⓒ진경수 山 애호가
    ▲ 여명이 밝아오는 황매산.ⓒ진경수 山 애호가
    자연의 빛은 인공의 빛을 물리친다. 산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주변의 철쭉 나뭇가지들이 뭉텅이로 다가온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서 제1철쭉군락지로 내려가 여명을 맞는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라는 말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아도 절로 느껴진다.

    승리를 앞둔 경기에서 마지막 5분이 선수들에게 굉장히 힘들게 느껴지는 것처럼, 일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직전에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자연의 위대한 장관을 눈으로, 마음으로 맞기 위해 멀리서 어둠을 뚫고 기꺼이 달려온 탐방객과 함께한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자니, 젊은 시절 한창 들끓던 열정이 채 식지 않았음을 느낀다. 타오른 해를 바라보는 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갖가지 사연을 지니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저 태양은 다 들어주리라.
  • ▲ 제1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 제1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그 무렵 제1철쭉군락지에는 붉은빛으로 흠뻑 젖은 진분홍 꽃봉오리들이 곳곳에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너무 일찍 오셨네요, 성급하셔라.’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높은 산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며, 만개를 앞두고 입술을 꽉 다문 암팡진 모습 그 자체로 만족한다.

    야트막하거나 키 높이만큼 자란 철쭉나무들 사이를 걸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봄을 느낀다. 해발 800~900m의 광활한 구릉지인 황매평전에 대규모 철쭉 군락지가 형성된 연유가 있다고 한다.

    1980년대 목장이었던 황매평전은 방목한 젖소와 양들이 독성을 가진 철쭉만 남기고 잡목과 풀을 모두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후 젖소와 양들이 떠난 자리엔 철쭉만 남게 되었고 지금처럼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게 되었다고 전한다.
  • ▲ 제2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 제2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릉지 능선을 그리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걷는다. 드문드문 자란 나무들이 두리뭉실한 평전의 풍경에 입체감을 더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삶은 생각이 같은 끼리끼리의 삶이 아니라 다름을 아우르면서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다.

    햇살을 등에 지고 제1철쭉군락지를 지나 제2철쭉군락지로 들어선다. 가끔 가던 발길을 멈춰 세우고, 태양을 향해 돌아서서 빛을 안으면, 그 아래 철쭉 꽃봉오리들도 앞다퉈 그 에너지를 흡수한다. 덕분에 산객도 윗도리를 벗어 가뿐한 차림으로 변신한다.

    우측 아래로 정상주차장이 보이고, 우측 전방으로 걷게 될 황매산 정상, 삼봉, 상봉, 중봉, 하봉이 길게 늘어서 있다. 황매산의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며 전체적으로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 하니, 이곳을 찾는 모든 산객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 ▲ 제3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 제3철쭉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아침 햇살을 있는 그대로 받는 황매평전이 찬란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다. 한낮에 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높다란 구릉지에 올라서니 어느덧 제3철쭉군락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구릉에 세워진 산불초소에 오르는 하늘계단도 보인다.

    미로찾기 게임을 즐기듯 제3철쭉군락지 곳곳을 걸으며 철쭉의 꽃봉오리들과 눈을 맞춘다. 그 모습이 마치 입술을 굳게 다문 야무진 소녀 입술과 같고, 또한 그 형상이 마치 깨달음의 밀알인 보리수 열매의 씨와도 같다.

    초록빛 평전을 가로질러 ‘황매산 철쭉 제단’과 하늘계단을 올라 산불감시초소에 닿는다. 그곳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을 조망한다. 초록 옷을 입기 시작한 발밑 산들과 달리 아직도 회갈색을 빛을 간직한 머리 위의 황매산 능선이 대조를 이룬다.
  • ▲ 600계단과 전망대, 그 뒤로 황매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 600계단과 전망대, 그 뒤로 황매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봄은 산 밑에서 오고, 가을은 산머리에서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고독하다는 것은 어쩜 숙명이 아닌가 싶다. 옛날 임금이 자신을 낮추어 과인(寡人)이라 칭했다. 나라의 모든 재난과 재앙은 덕이 적은 자신의 탓이라는 의미다.

    미국 33대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Harry S. Truman)의 명패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The Buck Stops Here)’라고 쓴 것도 그런 의미일 게다. 높은 자리에서 그냥 멋져 보이려고 쓴 말이 아니라 늘 책임감 있는 사고와 행동의 지침으로 삼았지 않았나 싶다.

    산에서 느끼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날도 산객은 멀리 풍경을 조망하려다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발밑에 장애물을 보지 못해 낙상해 몸도 카메라도 망쳤다. 이처럼 멀리 보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실패하지 않는 법이다.
  • ▲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매평전.ⓒ진경수 山 애호가
    ▲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매평전.ⓒ진경수 山 애호가
    산불감시초소에서 황매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평석이 깔린 길을 따라 내려선다. 좌측 산 중턱에는 산청미리내파크와 주차장이 있다. 안부에 도착해 눈앞에 우뚝 선 황매산 전망대와 그 뒤로 수줍은 듯 머리를 살짝 내민 정상을 조망한다.

    황매정각과 황매산 제단을 지나 600계단을 오른다. 제법 숨이 가빠오니, 몇 차례 쉬어가며 오른다. 전망대에 이르러 황매평전을 조망한다. 다가오는 5월, 이곳에 펼쳐질 진분홍 물결을 상상해 보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싶다.

    전망대에서 가파른 돌길을 올라 해발 1004m 온수봉에 닿는다. 암봉 주변에는 진달래꽃이 한창이다. 꽃 무리 뒤로 황매산 정상이 보인다. 0.3㎞ 전방에 있는 정상을 향해 선바위 틈새를 간신히 통과한다. 날카로운 선바위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피었다.
  • ▲ 황매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 황매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선바위를 통과해 돌길을 내려서면 완만한 흙길의 능선이 이어진다. 한차례 바윗길을 오른 후 신갈나무 숲속 흙길을 다시 걷는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가파른 바윗길을 네발로 기어오른다. 휴일인 까닭에 이곳을 찾는 산객들이 제법 많다.

    드디어 해발 1113.1m 황매산 정상에 도착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황매의 부유한 기운을 받는다. 밤새 달려와 잠이 부족한 탓인지 체력 소진이 빠른 듯해 잠시 쉬어간다. 대부분 산객은 이곳에서 되돌아가지만, 정상을 넘어가 삼봉을 거쳐 상봉에 오를 계획이다.

    삼봉(三峯)으로 가기 위해 정상에서 내려와 바위 능선 옆길로 들어선다. 등산객들이 자리를 펴고 식사 중이라 망설이며 피해가려는데, 그들이 미안하다며 오이와 쌈을 건넨다. 맛있게 얻어먹었지만 외려 즐거운 식사를 방해한 것 같아 쑥스럽다. 이게 등산객의 정인가 싶다.
  • ▲ 상봉에서 바라본 합천호.ⓒ진경수 山 애호가
    ▲ 상봉에서 바라본 합천호.ⓒ진경수 山 애호가
    능선으로 올라서면 산길 옆으로 파릇파릇 솟아난 새싹들과 현호색꽃, 다채로운 색과 모양의 이름 모를 야생화가 발길을 붙든다. 약간의 오르내림은 있지만, 진달래꽃이 한창인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며 편안하게 걷는다.

    세 개의 암봉으로 이뤄진 해발 1104m의 삼봉에 도착한다. 삼봉은 황매산 정기를 총 결집해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암벽이 험준하고 위험해 지금은 우회로를 만들어 놓았다. 산행 초급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산길이다.

    삼봉을 지나 밧줄이 매달린 암봉을 손쉽게 오른 후, 완만한 길을 걷다가 잠시 내려선다. 이어 울퉁불퉁한 바위가 거칠게 뒤엉켜 이룬 암봉을 오르는데, 안전 밧줄을 지지하는 말뚝이 삭아서 쓰러지고 흔들린다. 그나마 위안은 바위 틈새를 채운 연분홍 진달래꽃의 만남이다.
  • ▲ 주차장 근처 철쭉군락지에서 바라본 황매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 주차장 근처 철쭉군락지에서 바라본 황매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이어 정자 쉼터가 있는 상봉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황매평전을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널따란 캔버스에 진분홍 물감을 흠뻑 칠하고 싶다. 황매평전의 끝자락이 암봉인 모산재로 이어진다. 황매산의 절경인 모산재에 반하였기에 하산해 그곳으로 떠나기로 한다.

    하산을 시작하자 좌측 아래로 합천호가 보인다. 하산 길은 매우 거칠고 험준한데, 안전 밧줄과 지지대는 너무 허술하다. 군립공원의 안전불감증이 너무 심한 듯하다. 조속히 보수해 안전한 산길로 즐거운 산행이 됐으면 좋겠다.

    중봉삼거리에 이르러 3코스 황매평전길을 걷는다. 도랑의 물길은 유유히 길게 흐르면서 생명을 끊임없이 틔우고, 봄날의 새들이 높이 날아 지저귀니, 그야말로 봄나들이를 제대로 체험한 셈이다. 수목원을 지나 원점회귀에 앞서 철쭉군락지를 만나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한다.

    이번 산행은 ‘정상주차장~제1,2,3철쭉군락지~하늘계단~산불초소~황매정각~600계단~전망대~황매산 정상~삼봉~상봉~중봉삼거리~수목원~원점회귀’의 약 8.5㎞이다. 이제 두 번째 산행지인 모산재 주차장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