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흠뻑 적시는 비를 기다리는 마음[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전북 완주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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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를 기다리는 벚꽃봉오리.ⓒ진경수 山 애호가
모악산(母岳山, 해발 793.5m)은 전북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상에서 동쪽 아래에 있는 쉰길바위가 마치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 모악산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남북으로 뻗은 산줄기는 서쪽의 금산사(金山寺) 방면의 내모악(內母岳)과 동쪽의 구이면(龜耳面) 방향의 외모악(外母岳)으로 나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구이·금평·안덕저수지를 채우며 만물을 키우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다.들머리는 네 개가 있는데 대개 금산사 방면에서 출발해 대원사 방면으로 산을 넘는 종주 코스를 선호한다. 이번 산행은 구이주차장~대원사~수왕사~무제봉~쉰길바위~모악산 정상~남봉~신선바위~천일암~590봉~전망대~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약 8.98㎞ 구간이다. -
- ▲ 구이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악산.ⓒ진경수 山 애호가
경북지역 산불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피해복구에 상당한 기간과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어젠 안타까운 마음에 산불복구 성금을 기부하면서 하루속히 비가 내려 산불이 진화되길 간절히 기도했다.두 시간여를 달려 오전 여덟 시 삼십 분쯤 구이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모태정까지 상가로를 따라 걷는다. 가로수 벚나무 가지가지마다 볼록한 벚꽃봉오리들이 가득하다. 어린아이 볼따구니처럼 유들유들하니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모태정에 도착하니 모악산 시비가 눈길을 끈다.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라고 고은 시인은 모악산을 표현했다. 그의 시구처럼 등산로 초입에 있는 성황당다리를 건너서 어머니 품으로 들어선다. 생명을 일깨우며 계곡의 암반 위를 미끄럼타듯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모악산은 청렴하고 사욕이 없다고 알리는 듯하다. -
- ▲ 선녀폭포.ⓒ진경수 山 애호가
계곡과 함께 걷는 등산로는 완만하고 편안해 나들이 코스로 적격이다. 보름달이 뜨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선녀폭포를 지나자 하얀 산벚꽃이 선녀다리 건너편에서 봄소식을 전한다. 아직 거무죽죽한 숲속에서 그 모습은 유독 돋보이고 심장을 벌렁거리게 한다.계곡을 건너 고도를 높이는 짤막한 돌계단을 오르면 다시 완만한 산책길이다. 이후 수박재다리와 사랑바위다리를 건너면서 같은 유형의 길이 반복된다. 시앙골다리를 건너자 돌계단이 제법 길어 숨이 가빠진다. 힘든 나들이객에게 잠시 쉬어가라며 쉼터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계곡을 따라 수령이 꽤 오래된 벚나무들이 개화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오르면 660년(백제 의자왕 20년)에 열반종 개산조(開山祖) 보덕스님의 제자 대원·일승·심정 등의 고승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대원사 경내로 들어선다. -
- ▲ 대원사 대웅전 뒤편에 핀 진달래꽃.ⓒ진경수 山 애호가
경내로 들어서자 노승이 설법하듯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 가지 아래로 청기와의 대원사 대웅전이 석탑과 함께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한다. 절 마당에서 한겨울에도 상록을 잃지 않은 잎사귀 사이로 붉은 꽃을 피운 동백(冬柏)나무 한 그루가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동백꽃은 나뭇가지에서, 땅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꽃을 세 번 피운다고 한다. 동백꽃은 아름다움과 꽃 속의 꿀 당도가 절정에 이르러 미련 없이 나뭇가지와 이별한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이 쉬이 시들지 않으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깨달음의 꽃을 피운다.나를 둘러싼 모든 아픔과 고뇌를 다 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일 게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이 뭔 의미가 있을까. 노자는 <도덕경> 제25장에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이란 말이 있다. -
- ▲ 정상 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이저수지.ⓒ진경수 山 애호가
즉,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땅을 딛고 살기에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살아가되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하며, 그러한 이치를 본받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창조하는 길이 아닐까. 그 길은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허나 근래 세태는 그렇지 않음이 안타깝다. 형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데, 한 나라의 법체계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위치하는 헌법을 위반해도 처벌은커녕 양심의 가책도 없이 떳떳한 공직자가 있으니 말이다. 공직자를 비롯해 모든 국민이 공적 이성을 가질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대원사의 동백꽃과 도덕경 현수막을 보고 문득 떠올렸던 생각에서 벗어나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대웅전 뒤편으로 오른다. 분홍빛 진달래가 경내를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서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
- ▲ 쉰길바위.ⓒ진경수 山 애호가
대원사 경내를 나와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계단을 딛고 올라설 때마다 찌든 땀을 쏟아내는 것처럼 온갖 잡념을 벗어내며 오른다. 자연의 숨결에서 마음의 자유를 찾기도 하지만, 종종 육신의 고통이 정신을 맑게 하기에 산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계단 오름이 힘든 탓인지 겨우 0.1㎞을 올랐을 뿐인데 꽤나 힘들다. 푸른 소나무 숲 아래에 있는 쉼터 정자에서 다른 등산객처럼 잠시 쉬어간다. 다시 이어지는 계단 길, 정상의 송신탑을 보면서 발걸음에 힘을 쏟는다. 동백 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쉼터 정자를 만난다.막바지 데크 계단을 오르기 전에 휴식을 취하라 한다. 그 옆으로 수왕사를 둘러보는데 암자라기보다 토굴에 가깝다. 이 암자는 680년(신라 문무왕 20년)에 보덕화상이 수도장으로 쓰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약수 한 사발을 들이킨다. -
- ▲ 쉰길바위에서 바라본 모악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가파른 데크 계단과 돌계단을 치고 올라 주능선에 닿는다. 기세가 한풀 꺾인 듯한 능선길, 젊은 부부가 다정스럽게 앉아 팥빵을 나눠 먹기에 ‘맛있게 드세요’라며 말을 건네니, 먹어보라고 빵조각으로 되돌려 준다. 이런 것 또한 산행의 맛이 아닌가 싶다.무제봉에 이르자 조망이 터진다. 너른 푸른 하늘은 점점 구름으로 채워지고, 안무에 가려진 풍광들은 색채를 잃어간다. 경각산 아래 구이저수지가 마치 거북이 귀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구이면(龜耳面)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싶다. 먼 옛날 이곳 경각산(男)이 모악산(女)에게 청혼해 생명의 근원, 풍요의 상징인 구이저수지 물이 넘쳐흐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쉰질바위와 정상을 조망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울퉁불퉁 돌길에 이어 데크 계단을 오르니 정상을 앞두고 두꺼비처럼 생긴 바위를 만나 그 곁에 잠시 쉬어간다. 적절한 쉼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다시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도착한다. -
- ▲ 모악산 정상.ⓒ진경수 山 애호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쉰길바위, 아뿔싸 계단으로 무심코 올라오다 보니 지나버렸다. 이처럼 정신 놓고 살다 보면 삶은 늘 실수투성이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다시 하산해 두꺼비 바위를 거쳐 쉰길바위에 닿는다. ‘쉰 길’은 약 120m 높이의 깎아지를 듯 높고 험준한 바위산을 일컫는다.그래 이처럼 실수는 곧바로 인정하고 고치며 살면 되지 뭐, 그래도 실수하기 전에 한겨울의 언 냇물을 건너듯 매사 신중해야 할지어다.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는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아무리 살펴봐도 상상력이 떠오르지 않는다.쉰길바위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진 전망을 조망한다. 구름은 점점 먹구름으로 바뀌고 바람은 차갑게 얼굴을 스치며 흘린 땀에 찬기를 더한다. 지금이라도 얼른 비가 내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 전망대를 거쳐 정상으로 오른다. -
- ▲ 헬리포트에서 바라본 구이저수지.ⓒ진경수 山 애호가
송신탑이 있는 모악산 정상은 다행스럽게 개방되어 정상을 오른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샷 촬영하려는 등산객의 줄이 길게 늘어선다. 개방된 건물 옥상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멋진 조망을 감상한다.동쪽으로 전주 시가지, 경각산과 구이저수지를 조망하고 그 뒤로 멀리 마이산이 보일까, 서쪽으로 금평저수지와 금산사를 조망하고 멀리 변산반도가 보일까, 남쪽으론 내장산이 보일까, 그 모습들이 세찬 바람과 함께 희뿌연 안무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간다.정상에서 내려와 신선바위로 길을 바꾼다. 송신소 건물이 능선을 가로막아 잠시 내려서서 산허리를 돌아 다시 능선을 오르는데 계단길이 낡고 부실해 위험천만하다. 안전사고 발생 전에 수리가 시급해 보인다. 능선을 따라 0.2㎞를 이동해 남봉인 헬리포터에 도착한다. -
- ▲ 신선바위.ⓒ진경수 山 애호가
하늘에서 하얀 꽃송이를 뿌리기 시작하고, 안무가 경각산을 비롯해 인근 산들을 집어삼킨다. 그래도 좋으니 산불 진화와 예방을 위해 흠뻑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신선바위로 하산하는 길은 정비가 덜 되어 있어 거칠고 험한 편이라 조심한다.두 신선이 구이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인 신선바위,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 한다. 선녀들이 선녀폭포에서 맑은 물에 목욕하고, 이곳에서 신선들과 어울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는 맑고 신령한 기운으로 명상하기 좋은 곳으로도 알려졌다.내린 듯 만듯한 눈이 그치고, 발걸음은 천일암으로 향한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편안한 흙길이고 경사도 완만하다. 불광전 앞에 서니 다시 눈발이 세차게 날린다. 혹여 하늘에 기도발이 닿은 것인가. 산허리를 휘도는 흙길을 걸으면서 노란 생강나무 꽃과 시선을 맞추고 산의 기운을 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정자 쉼터에 도착한다. -
- ▲ 하행 길에 만난 진달래꽃 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590봉까지도 완만한 경사의 흙길을 오른다. 590봉에서 주차장까지 2.0㎞는 거친 바윗길과 가파른 계단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북풍을 막아주는 병풍바위 아래 피신처를 거쳐 전망대에 도착하니 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야경을 감상하기엔 최적의 장소인 듯하다.몇 차례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고도가 300m대에 이르니 어두침침한 숲속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며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세차게 휘몰아치던 눈발은 진눈깨비로 슬쩍 모습을 바꾼다. 모태정에 이르러 벚나무길을 걷는데 벚꽃봉오리들이 깜짝 놀라 잔뜩 움츠리고 있다. 길가의 따끈한 어묵 국물이, 향긋한 카푸치노 커피 한 잔이 절로 생각나게 하는 날씨다.새봄을 기다리는 만물에 꽃샘추위는 그나마 견딜만하다. 산불은 자연을 파괴하고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리고 있다. 인재(人災)라는 점이 너무나 안타깝다. 설마 하는 안이함을 버리고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누구든 산불 피해복구를 위해 조그마한 성의를 표시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