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세종시장, 제80호
  • ▲ 최민호 세종시장.ⓒ세종시
    ▲ 최민호 세종시장.ⓒ세종시
    세상에는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것이 많습니다.

    이름과 내용이 다르다고 사람들이 모두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정작 화를 나게 하는 것은 '핵심적 내용'이 손상을 입었을 때입니다. 이를 ‘본질’이라 합니다.

    '본질'이 훼손당하면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칼국수에 칼이 없다고 화를 내지 않고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고 비난하지는 않지만, 칼로 썰어 만드는 칼국수라 써놓고 기계면을 준다면, 또 붕어 모양이어야 할 붕어빵 대신 다른 모양의 빵을 준다면 주인에게 항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존재의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세계 각국의 중산층을 비교한 글이 한때 화제였던 적이 있습니다.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은 중산층의 기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국어를 하나쯤은 할 수 있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한다.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공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중산층 기준은 "페어플레이,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갖고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이었습니다.

    미국 공립학교가 제시한 '미국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국 중산층'은 “부채가 없고, 30평(100㎡)대 아파트에 살고 월급이 500만 원 이상 되며, 자동차는 2000cc급의 중형차를 타며, 통장 잔고는 1억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여행은 1년에 몇 회 이상 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정리된다고 합니다.

    중산층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는 국민마다 ‘삶의 본질’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간 누구랄 것도 없이, 물질적 가치가 꿈이요, 행복이요, 삶의 본질적 목적이라 여기며 달려온 것 같습니다. 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갈구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제1조건은 돈이라 생각하는 것은 소수의 국민이 아닙니다.

    본질을 존재의 목적이라 한다면, 비본질은 이를 달성하는 수단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본질은 목적이요 비본질은 수단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돈은 무엇일까요? 자동차와 은행 잔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본질과 비본질.

    우리는 종종 본말이 전도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고, 꼬리가 머리를 끌고 가는, 비본질이 본질을 뒤엎는 현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식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혼 자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어느 통계를 보면서, 본질과 비본질이 뒤엎어졌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결혼식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국가와 지역의 발전이 목적인데 수단에 불과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는 현실도 직시하게 됩니다. 돈을 버는 것은 수단이요, 돈을 쓰는 것이 목적일진대, 벌기만 할 뿐 쓸 줄 모르는 가치의 착란에 빠지는 사람도 많이 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일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어떠해야 하는가요?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나 딜레마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명확하게 분별함으로써 번민의 질곡에서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비본질이 본질을 뒤엎는 사회가 되면, 우리 사회는 파도처럼 요동치고 서로를 원망하며 악순환에 빠져 부패와 부조리로 다 뒷걸음질 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