彌勒과 觀音이 만나는 세계 ‘하늘재’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충주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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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암산(布巖山, 해발 962m)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이를 지나는 백두대간에 솟은 산이다. 이번 산행은 미륵세계사 앞 주차장을 출발하여 미륵대원지를 거쳐 하늘재 산책길 걸은 후에 포암산 고스락을 다녀오는 원점회귀 코스다.이동 거리는 미륵세계사 주차장에서 하늘재까지 산책코스 2.0㎞이고, 하늘재에서 포암산까지 산행코스 1.6㎞로 왕복 총 7.2㎞이다. 실제 산행 거리는 3.2㎞에 불과하지만. 백두대간 줄기답게 산세의 맛은 좀 매서운 편이다.미륵세계사 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볼록한 바위 위에 얹혀 있는 둥근 바위가 마치 부도(浮屠)를 연상케 한다. 미륵세계사 대웅전과 선원을 지나면 해발 378m에 위치하는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가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자리한다.이 사찰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석등, 당간지주, 귀부(龜趺),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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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덕주공주(德主公主)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던 중 월악산 미륵리에서 관음보살이 현몽한다.그러자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 덕주사(德周寺)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磨崖佛)을 조성하자, 마의태자는 현재 충주 미륵대원지에 북향의 석굴을 지어 미륵불(彌勒佛)을 조성하여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이러한 미륵대원지의 애틋한 사연을 안은 채 하늘재로 향한다. 콘크리트 포장길을 걷다가 우측으로 널찍한 공터로 남아 있는 ‘충주 미륵리 원터(忠州 彌勒里 院址)’를 지나면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하늘재’라는 표지석을 만난다.이곳에서 우측으로 하늘과 잇닿은 2천 년 숲길이자 한민족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 걷기 길이 시작된다. 이 길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바로 인접해 ‘미륵리 3층 석탑’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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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은 시대마다 이름을 달리했는데, 신라시대에 계립령(鷄立嶺), 고려시대에 대원령(大願嶺)이라 불리었다. 대원령은 지금의 닷돈재, 하늘재, 지릅재를 포함해 부르는 이름이다.대원이란 부처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으로 순우리말로 ‘한울’이어서 한울재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한훤령(寒喧嶺)으로 포암산 오르는 길에는 한훤산성 흔적이 남아 있다.이곳에서 해발 525m 하늘재까지는 1.8㎞로 고갯길이지만 길이 널찍하고 경사가 급하지 않다. 소나무·전나무·참나무들이 이루는 울창한 숲길로 한여름에도 무더위를 피해 걷기 좋다.군데군데 자연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쉼터가 있어 힘들면 쉬어갈 수 있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에 숲속에 풍기는 향기와 습한 공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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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을 걷는 동안 조선 후기의 ‘백자 가마터’를 지난다. 이 가마터의 크기는 길이 20m, 폭 5m 정도로 7개의 소성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약간 경사진 길을 휘돌아 오르면 우측으로 ‘연아를 닮은 소나무’가 있다.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의 스파이럴 자세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하늘재 화장실과 안내소를 지나면서 주홍빛 하늘말나리꽃이 반긴다. 안내소를 지나면서 우측 계단을 오르면 탄항산(炭項山, 해발 856m)으로 가고 좌측 계단을 오르면 포암산으로 갈 수 있다.산길을 오르지 않고 관음리 방향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계립령 유허비와 ‘백두대간 하늘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 뒤편 계단을 오르면 하늘재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내부에는 산신령을 중심으로 좌우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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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에서 포암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평탄한 흙길이 이어지고 통신중계소를 지나 한훤산성 흔적으로 보이는 너덜지대를 오른다. 이후 너덜지대에서 내려와 산길을 오르면 ‘백두대간 하늘샘’을 만나 마른 목을 적신다.하늘샘을 지나면서 가파른 경사의 물기가 흥건한 바윗길을 오른다. 비스듬한 자세로 길목을 지키고 있는 집채만 한 바위 밑을 빠져나가면 암벽을 타고 설치된 곧추선 철제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 길은 하늘재에서 0.5㎞ 지점을 지나면서 거칠고 사나운 바윗길로 바뀐다.돌부리와 나무뿌리가 뒤엉켜진 구간과 촉촉하게 적은 암릉 구간을 오르는데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 잔돌이 깔린 산길을 오르다가 돌탑을 만나 한 돌을 올리며 무탈하기를 기원하고 고도를 높여가며 암릉 구간을 오른다.붉은 가지를 한껏 뻗은 금강송이 바위와 어우러져서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저절로 발길이 멈추고 ‘멋지다’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바위가 층층 계단을 이룬 암릉 길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검은 구름이 시샘하듯 산 풍경을 가린다. 암릉 구간이 시들해지면서 청록의 숲이 우거진 가파른 산돌 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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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홍역을 치르듯 오르니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평탄한 숲길을 걷는다. 이런 달콤한 맛에 산에 오른다. 거친 산행의 가뿐 숨소리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드센 산행 뒤에 이어지는 평탄한 걸음에서 달콤한 행복을 느낀다.다시 철제 계단을 오른 후 난간을 잡고 암릉 구간을 걸으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안무에 덮인 채 하얀 속살을 희미하게 드러내는 포암산을 조망한다.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산 풍경이 아직도 구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암릉과 계단 구간을 반복하며 오르자니 노란 가는기린초꽃이 포암산 고스락이 지척이라 알린다. 막바지 바윗길을 오르면 해발 962m의 백두대간 포암산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평평한 돌로 층층이 쌓아 올린 기단 위에 포암산 고스락 돌이 알처럼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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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락에 오른 것을 환영이나 하듯이 구름이 서서히 걷힌다. 고스락 둘레에는 웃돌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조망은 거의 없다. 발꿈치를 들어 만수봉(萬壽峰, 해발 983m)과 월악산 영봉(月岳山 靈峯, 해발 1097m)을 바라보지만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이 신통치 않다.이곳에서 만수봉까지는 5.0㎞이고, 하늘재까지는 1.6㎞이다. 일부 등산객들은 포암산과 만수봉의 연계 산행을 즐기기도 하지만 만수봉 산행은 만수휴게소에서 출발해 만수계곡을 거쳐 고스락을 다녀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선호한다.이제 올랐던 길을 따라 하늘재로 다시 내려가는데 마치 미래 삶의 길을 안내하듯 햇빛이 길을 훤하게 밝힌다. 숲속을 가르는 바윗길에 이어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변 산 풍경을 감상하지 못해 조금은 아쉽다.가는 빗줄기가 멈추면서 등산객들이 제법 많이 오른다. 이처럼 올라오는 등산객이 있는가 하면 필자처럼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산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떠나는 사람 잡지 않는다. 어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산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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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면서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을 조망한다. 희미하게 보이는 박쥐봉, 북바위산, 용마산, 마패봉, 신선봉 등을 눈 크게 뜨고 살피지만, 운무에 가려 산들을 구별하기 어렵다.이렇게 산명(山名)을 따져가며 조망하는 것이 뭔 의미가 있겠는가? 눈앞에 파도처럼 일렁이며 펼쳐진 산등성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의 물결이 아니던가? 구태여 이 산, 저 산 따져가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부질없다.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명언이 떠오른다. 그저 자연 속에서 여여(如如)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할 수 있다면 부족한 것도 넘쳐나는 것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이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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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암산 고스락에서 나비처럼 날아 순식간에 내려온 듯하다. 이제 상행 시에 만났던 금강송으로 가까이 가보니, 등산객들이 기념사진 촬영한다고 나뭇가지에 올라서 반질반질하다. 등산객들이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금강송과 바위가 어우러진 암릉을 내려가면서 전방으로 주흘산(主屹山, 해발 1076m)과 탄항산을 바라본다. 암릉 구간을 지나 소나무 숲을 가르는 계단을 지나 울창한 참나무 숲길을 걷는다.이어 바윗길을 내려가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집채만 한 바위 모서리 위에 불쑥 튀어나와 얹은 바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다. 우리네 삶도 이처럼 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 없이 살아가다가 느닷없이 불행한 사고에 직면하기도 한다.그러나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을 살지라도, 가끔은 멈춰서 뒤를 돌아보면 위험도 보이고 자신도 보이지 않을까? 이러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에 산을 찾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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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길을 내려가다 암반에 쌓은 작은 돌탑을 지나고, 암릉 길을 하행하면서 오를 때 미처 다 보지 못한 풍광을 천천히 감상한다.은퇴자의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본모습을 되찾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행하는 것처럼 말이다.발걸음을 더디게 한 암릉 길이 끝나고 바윗길을 내려가면서 돌탑과 금강송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눈다. 얼마 가지 않아 늦은 오후 햇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선바위가 문득 눈에 띈다. 돌머리 위에 돋보이는 소나무를 바라보라며 나타난 듯하다.이어 바윗길과 계단을 반복해 하행하다가 하늘샘을 지나고 곧이어 하늘재에 도착한다. 하늘재 관음리 쉼터를 둘러보고 포암산의 능선을 조망한다. 다시 하늘재를 넘어 고갯길을 따라 미륵세계사 주차장으로 내려와 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