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산이 그린 수묵화에 발자국을 남기다.[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경북 봉화군 편
  • ▲ 청량산 봉우리들.ⓒ진경수 山 애호가
    ▲ 청량산 봉우리들.ⓒ진경수 山 애호가
    청량산(淸凉山, 해발 870m)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에 위치한다. 제각기 기이한 모양을 한 바위 봉우리들이 연꽃 모양으로 솟아 있어 경관이 수려해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다. 그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겨울 청량산을 찾는다. 

    영하 8도의 새벽을 가르며 세 시간여를 달려 청량산 입석 주차장에 도착한다. 길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래서 이곳이 입석(立石)인가 싶다. 산행코스는 입석-청량사-하늘다리-장인봉-자란봉-연적봉-탁필봉-자소봉-김생굴-응진전-입석으로 총 8.5㎞이다.

    등산로 입구에는 ‘원효대사 구도의 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옆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우측으론 거대한 퇴적층 암벽이 위용을 드러내고 좌측으론 천 길 낭떠러지가 잔도(棧道)를 연상케 한다.
  • ▲ 연화봉 아래에 자리한 청량사.ⓒ진경수 山 애호가
    ▲ 연화봉 아래에 자리한 청량사.ⓒ진경수 山 애호가
    발걸음에 골똘하다 보니 어느새 응진전 갈림길에 이른다. 직진하면 청량사를 거쳐 하늘다리로 이어지고, 우측으로 치고 오르면 응진전·김생굴·자소봉으로 오르게 된다. 당초 계획은 자소봉을 먼저 오르는 것이었는데, 발걸음이 청량사로 향하니 그냥 두기로 한다.

    산허리를 오르내리면서 굽이굽이 돌아가니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처음 피어나는 연꽃과 비슷한 연화봉(蓮花峰)을 만난다. 그 바로 앞에 향로의 모양과 흡사한 작은 봉우리 향로봉(香爐峰)이 형상을 드러낸다. 

    ‘산꾼의 집’ 앞에 있는 청량사(0.2㎞)와 경일봉(0.8㎞)·응진전(0.4㎞) 갈림길을 지난다. 이웃하여 청량정사(淸凉精舍)가 위치한다. 퇴계 이황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란다. 계단을 내려와 연화봉 아래에 자리한 청량사(淸凉寺) 경내로 들어선다.
  • ▲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청량산 하늘다리.ⓒ진경수 山 애호가
    ▲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청량산 하늘다리.ⓒ진경수 山 애호가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청량사 중심전각인 유리보전(琉璃寶殿) 앞에 서면 보호수 소나무 뒤로 햇살을 등에 진 석탑과 그 좌측으로 금탑봉(金塔峰)을 마주한다.

    때마침 사시기도 시간인지라 염불과 목탁 소리가 고즈넉한 산사를 중심으로 청량산의 만물을 깨우는 듯하다.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 전한다. 유리보전 앞에 서서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왜 사는가?’라기 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안고 유리보전 옆으로 길을 오른다. 반듯하게 정돈된 돌계단을 오르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 완만하게 시작한 계단은 점점 가팔라지다가 나무계단으로 모습을 바꾼다. 
  • ▲ 선학봉의 기암들과 소나무들의 어울림.ⓒ진경수 山 애호가
    ▲ 선학봉의 기암들과 소나무들의 어울림.ⓒ진경수 山 애호가
    급경사의 계단은 몸을 점점 달구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게 한다. 그런 상태를 알아차린 듯 짧은 평지가 쉼을 준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유산(遊山)으로 잠시 쉼표를 찍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원한 물 한 모금에 힘을 얻어 다시 계단을 오른다.

    힘에 버거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금탑봉이 발아래 내려다보이고, 연화봉과 눈높이를 맞춘다. 이렇듯 제아무리 높다 한들 애써 그곳에 오르고 보면 참으로 공허할 정도로 평범함을 다시 돌이켜 본다. 그래서 그 과정이 외려 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해발 390m 입석에서 출발해 해발 740m인 주능선인 뒷실고개로 올라선다. 산 오름에 익숙한 등산객이라면 가뿐하게 오를 수 있는 거리다. 그러하나 이제부터는 몇 차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봉우리들을 넘는 코스라 그리 만만치 않다. 
  • ▲ 장인봉 턱밑에서 바라본 청량산 주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 장인봉 턱밑에서 바라본 청량산 주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한차례 오르내림 끝에 신비로운 새가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의 자란봉(紫鸞峰)에 닿는다. 청량산 하늘다리가 학이 솟구치는 듯한 선학봉(仙鶴峰)으로 길을 잇는다. 하늘다리로 발을 내디디니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좌우로 펼쳐진 풍광이 열두 폭에 그려진 수묵화와 같다.

    선학봉에서 삐져나온 기암들과 소나무들의 어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 모습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갈등과 반목보다 화합하는 국민이 됐으면 좋겠다 싶다. 하늘다리를 건너 선학봉에서 바라보는 연적봉(硯滴峰)과 탁필봉(卓筆峰)이 장관이다.

    선학봉을 넘어 잔설이 얼어붙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면 청량폭포(1.5㎞)와 장인봉(0.3㎞) 갈림길에 이른다. 늘 그렇듯 정상은 손쉽게 내줄 턱이 없다.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보상이라 하듯 청량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 자란봉(左), 선학봉(中), 장인봉(右).ⓒ진경수 山 애호가
    ▲ 자란봉(左), 선학봉(中), 장인봉(右).ⓒ진경수 山 애호가
    이제 청량산 주봉인 장인봉(丈人峰)이 지척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오르니 숲으로 둘러싸인 해발 870m 최고봉에 닿는다. 정상석에 적힌 장인(丈人)이라는 글귀가 늙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 산이 알려주는 것 같다.

    잠시 머물며 되풀이되는 의심을 뒤로 한 채 다시 뒷실고개를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우리네 삶도 그때 그 시절로 회귀해 미흡한 점을 보완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번 지나온 여정은 되돌이킬 수 없으니, 매 순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지금에 충실할 뿐이다.

    급경사의 계단을 올라 연적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거친 돌덩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 굴곡진 길로 지쳐가는데 가파른 계단이 다리 품을 더 팔게 한다. 계단은 힘들게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를 듬뿍 선사한다. 지나온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진한 감동이 밀물처럼 심장을 후려친다. 가히 감탄사가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 ▲ 연적봉에서 바라본 탁필봉.ⓒ진경수 山 애호가
    ▲ 연적봉에서 바라본 탁필봉.ⓒ진경수 山 애호가
    금탑봉 산허리로 하산할 산길이 보인다. 저 아래까지 언제쯤 갈까 해도 차근차근 걷다 보면 닿는 게 산행이다. 이 순간도 삶의 마무리를 향해 타박타박 가고 있는 우리네처럼 말이다. 커다란 암봉을 휘돌아 가니 철제 계단이 기다린다. 

    이 계단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하며 오르니 연적봉(硯滴峰, 해발 846.2m)이다. 청량산의 봉우리들은 물론 먼 산까지 사방팔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이웃한 탁필봉(卓筆峰)을 바라보니 정말 생김새가 붓끝을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가는 청량산의 맑고 깨끗한 찬 바람에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듯 일순간 삶을 깨달은 것 같다. 자연의 오묘하고 신기함이 일부러 꾸민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이니, 햇빛과 비바람으로 청량산이 수려한 풍광을 빚어냈듯 세속의 풍파 속에서 나만의 행복을 빚어보리라.
  • ▲ 연적봉(左), 탁필봉(中), 자소봉(右).ⓒ진경수 山 애호가
    ▲ 연적봉(左), 탁필봉(中), 자소봉(右).ⓒ진경수 山 애호가
    연적봉의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 화가 치밀어 오르니 아직 수행이 부족한 걸까? 연적봉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서 버너와 코펠을 이용해 음식을 먹고 있는 등산객을 보니 그나마 없는 머리털이 뾰족 서는 느낌이다.

    이렇게 건조한 시기에 자칫 산불이라도 발생한다면 이 아름다운 자연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직 이런 행동을 하는 등산객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다시는 산을 찾지 말거나,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탁필봉 밑을 빠져나가 거대한 바위를 끼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내려가다 자소봉 갈림길을 만난다. 산객의 발길과 비에 파헤쳐진 거친 길을 오른 후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면 원래 보살봉(菩薩峯)으로 불리었던 자소봉(紫霄峰)에 닿는다. 
  • ▲ 금탑봉(中)과 축용봉(後).ⓒ진경수 山 애호가
    ▲ 금탑봉(中)과 축용봉(後).ⓒ진경수 山 애호가
    북서쪽으로 문명산(해발 893m) 자락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과 동북쪽으로 웅장한 산세가 일품인 탁립봉(卓立峰)을 조망한다. 뒤를 돌아 남쪽으로 연꽃봉우리처럼 앉아 있는 금탑봉(金塔峰)과 그 뒤로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축융봉(祝融峰)을 조망한다.

    축용봉 산자락을 따라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서 쌓았다는 산성과 금탑봉 산허리 절벽을 따라 하산할 길이 어슴푸레 보인다. 공민왕의 피난처가 지금은 우리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저 축용봉에서 이곳을 바라본다면 분명 절경일 게다.

    거친 돌길을 내려와 자소봉 갈림길에서 김생굴과 응진전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산허리를 따라 내려가는 길은 천 길 낭떠러지기다. 난간 줄이 설치되어 안전하긴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코스다. 금탑봉이 점점 큰 모습으로 다가오고, 연화봉과 향로봉, 청량사 석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 ▲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기암절벽.ⓒ진경수 山 애호가
    ▲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기암절벽.ⓒ진경수 山 애호가
    봉우리들의 산허리를 잇는 다리를 건너서 가파른 통나무 계단을 지그재그로 내려선다. 청량사 갈림길에서 김생굴 방향으로 데크 길을 걷는다. 연적봉과 탁필봉, 그리고 자소봉을 이루는 기암의 모습을 가까이서 조망한다. 세월의 흐름이 와 닿는 느낌이다.

    맞은편 향로봉과 연화봉의 장대한 모습이 풍경을 압도한다. 통일신라 시대 서예가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진 김생굴(金生窟)에 도착한다. 그 옆으로 김생폭포가 있으나 건기(乾期)라 얼어붙은 흔적만 볼 수 있다.

    어느새 경일봉 자락에 위치한 ‘돌넛널 무덤’ 자리에 이르러 병풍처럼 늘어선 청량산 암봉들을 눈에 담는다. 경일봉 갈림에서 응진전 방향으로 내려선다. 얼어붙은 계단을 조심해서 내려간 후 청량사 갈림길에서 응진전 방향의 금탑봉 산허리로 접어든다.
  • ▲ 건들바위 아래 응진전.ⓒ진경수 山 애호가
    ▲ 건들바위 아래 응진전.ⓒ진경수 山 애호가
    어풍대(御風臺)에서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와 연꽃 꽃술에 자리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눈에 담아본다. 절경은 쉬이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지만,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게 삶이 아니던가.

    물을 마시면 지혜와 총명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총명수(聰明水), 허나 바닥이 드러나 있으니 다음을 기약한다. 계속 이어지는 금탑봉 산허리 걷기 길,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에 오른다. 서늘한 바람이 세차게 들고나니 잡념이 들자마자 훑어 씻어낼 것 같다.

    산허리를 돌아서니 절벽 꼭대기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바람에 건들거리는 바위가 앉아 있고, 그 절벽 아래엔 의연하게 응진전(應眞殿)이 위치한다. 금탑봉을 둘러싼 기암절벽에서 강한 에너지를 느낀다. 12폭 수묵화 속을 걷는 청량산 산행에서 자연의 순수함을 만끽하니, 남은 삶을 살아갈 청량(淸亮)한 기운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