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산길과 매서운 추위만이 연출하는 풍경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경남 함양군 편
  • ▲ 남덕유산 설경.ⓒ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 설경.ⓒ진경수 山 애호가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한 덕유산(德裕山)은 1975년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유산은 경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북덕유산(향적봉, 해발 1614m)과 남덕유산(南德裕山, 해발 1507m)이 쌍봉을 이룬다. 

    오늘 산행 목적지는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덕유산국립공원에 자리한 남덕유산이다. 서상 나들목을 나와 서상로 달리다가 눈과 구름에 덮인 거망산을 만나 잠시 멈춘다. 차에서 내리니 영하 9도를 밑도는 매서운 추위가 살갗을 스친다. 

    두 시간 남짓 달려 오전 9시 반경쯤 남덕유산 주차장(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83-1)에 도착하니 이미 주차장은 만차다. 다행히도 갓길 공간이 있어 겨우 주차한다. 그런데도 연실 승용차와 대형버스는 몰려오고 그 속에서 등산객들이 쏟아져 나오니 그야말로 인산인해가 아닐 수 없다.
  • ▲ 눈과 구름에 덮인 거망산.ⓒ진경수 山 애호가
    ▲ 눈과 구름에 덮인 거망산.ⓒ진경수 山 애호가
    백성들을 지킨 덕(德)이 넉넉한 산이라 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덕유산(德裕山). 북덕유산이라 불리는 향적봉(香積峰)이 부드러운 어머니의 산이라면, 남덕유산은 엄한 아버지를 떠올리는 거친 산세를 지녔다.

    어쩜 오늘 산행은 자식이 아버지가 되어서 극락에 계신 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래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차장(해발 약 600m)을 출발해 포장길을 따라 700m을 오르면 영각사(靈覺寺)에 도착한다. 

    신라 헌강왕 2년(877년) 심광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영각사 경내에 들어서니, 구광루, 극락전, 화엄전 뒤로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남덕유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곳에서 상언대사는 “진리와 지혜를 벗어나지 않고 진리와 지혜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 마음은 일체중생이 매일 사용하는 그것이다”라며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함양이 선비의 고장이라는 말도 이때부터라는 설이 전해진다.
  • ▲ 남덕유산이 감싸고 있는 영각사.ⓒ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이 감싸고 있는 영각사.ⓒ진경수 山 애호가
    영각사에서 마음 다잡고 남덕유산 가는 길로 들어선다. 겨울 산행의 필수, 아이젠을 착용하고 하얀 눈길을 걷는다. 뽀드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귀를 밝게 하고, 티 없는 백설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며, 덕유(德裕)의 찬바람이 소갈머리를 바꾼다.

    400m 정도를 이동하니 영각탐방지원센터에 닿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계곡을 끼고 시작되는 산길은 온통 백설의 양탄자를 깔아놓고 설국으로 안내한다. 차디찬 동토에도 불구하고 조릿대의 초록빛 싱그러움은 여여(如如)하다.
      
    대체로 완만하게 시작된 산행이지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이전의 몸 상태가 아님을 짐작하곤 산행을 포기할 수 없으니 페이스를 조절하기로 한다. 세월의 나이에도 산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을 제대로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 ▲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는 영각재 상행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는 영각재 상행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영각탐방지원센터 기점 1.5km에 이르니 남덕유산안전쉼터가 자리를 내어준다. 이곳까지 오르는 동안 몸의 열기와 덕유산의 찬기는 치열한 다툼을 한 듯하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에 젖은 옷은 체온으로 말라가고, 모공을 뚫고 솟아나서 모자마저 뚫고 나온 땀방울은 몽글몽글 맺혔다.

    배낭 옆에 꽂아 놓은 물이 슬러시가 되어 거친 숨을 달래고 성난 몸을 진정시키는데 한몫한다. 이곳부터 영각재까지 약 1㎞ 구간은 급경사의 오르막길이다. 눈길의 좁은 등산로가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북적이다 보니 발걸음이 더디다.

    오늘따라 힘들게 느껴지는 산행에서 그것은 참으로 고맙다. 줄지어 오르는 산객들의 흐름을 구태여 막아서게 되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 가슴은 터질 듯하고 종아리는 당겨지며 허벅지도 뻐근해질 즈음에 계단이 해발 1283m 영각재로 이끈다.
  • ▲ 상고대와 하봉.ⓒ진경수 山 애호가
    ▲ 상고대와 하봉.ⓒ진경수 山 애호가
    하늘은 뿌옇게 변하고 거세진 바람은 눈발을 휘날린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오늘의 목적지 남덕유산 정상까지는 일명 ‘천국의 계단’이 이어진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알 듯하기에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곧추선 좁다란 계단은 병목현상으로 한 발 올려놓기도 쉽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단 주변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상고대의 눈꽃,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 풍광은 발걸음을 멈추기에 어느 하나 손색이 없다.

    산객들의 눈치를 보며 잽싸게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다. 구름에 싸이기 시작한 하봉의 모습과 계단 옆으로 즐비한 상고대의 눈꽃을 눈으로 가슴으로 서둘러 담는다. 계단 끝자락은 희뿌옇게 변해버린 숲속의 거친 돌길로 이어진다. 
  • ▲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첫 번째 봉우리.ⓒ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첫 번째 봉우리.ⓒ진경수 山 애호가
    이제 남덕유산 정상까지 0.8㎞를 남겨두고 남은 여정을 위한 잠시 에너지 충전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사방으로 펼쳐진 몽환적인 눈꽃 세상은 심장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뾰족 솟아오른 첫 번째 봉우리를 향해 눈꽃 나무를 헤치고 나아간다.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허벅지가 땅기도록 힘겹게 오르니 그 보상으로 자연은 파노라마처럼 멋진 풍광을 펼쳐놓는다. 봉우리 꼭대기를 밀어내는 거센 바람도 밀물처럼 다가오는 벅찬 감동을 어쩔 도리가 없다. 

    순백색 상고대의 눈꽃이 순결무구(純潔無垢)하게 살라고 전하는 듯하다. 앙상한 뼈대뿐일지라도 수분과 차디찬 바람을 만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나는 나무처럼 살라 한다. 비록 가진 것이 비천할지라도 자신도 남도 원망하지 말라 한다.
  • ▲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두 번째 봉우리.ⓒ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두 번째 봉우리.ⓒ진경수 山 애호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혁신할 수 있으니, 마치 제갈공명이 유비를 만났던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아니던가. 상고대의 눈꽃도 영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첫 번째 봉우리의 암릉을 따라 설치된 계단과 데크가 마치 천상의 설원에 펼쳐놓은 무지개를 걷는 듯 황홀하다. 사방으로 훤하게 트인 전경과 동시에 불어닥치는 차디찬 거센 바람에 혼쭐나니 슬퍼도 눈물 나고 기뻐도 눈물 나는 것처럼 깊은 감동이 가슴을 저민다.

    아버지의 위엄은 단 한 번으로 끝나기가 만무하다. 바위 뼈대를 곧추세운 두 번째 봉우리가 곧바로 다가선다. 남덕유산의 힘찬 비상을 온몸으로 느낀다. 고꾸라질 듯 암벽에 매달린 계단을 오르자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장엄한 설원이 수묵화를 그려놓는다.
  • ▲ 삿갓봉과 무룡산으로 잇는 마루금.ⓒ진경수 山 애호가
    ▲ 삿갓봉과 무룡산으로 잇는 마루금.ⓒ진경수 山 애호가
    우측으로 월성재를 거쳐 삿갓봉과 무룡산, 그리고 동엽령을 거쳐 향적봉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조망한다. 희뿌연 구름으로 인해 또렷하게 분별할 수 없지만 저만치에서 손짓하는 모습이 어슴푸레 느껴진다. 

    물결처럼 설원에 늘어선 언덕마루를 넘어설 때마다 남덕유는 눈꽃 송이를 흔들며 환영 인사를 건넨다. 줄곧 내달린 걸음에 피곤이 몰려올 즈음에 마지막 세 번째 봉우리인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남은 기운을 낸다.

    끝어질 듯 이어지는 등산객 행렬을 따라 거친 숨을 몰아내며 쉼 없이 오르다가 잠시 멈춰서서 지나온 봉우리를 바라보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온통 백설 천지다. 건강상태 난조를 달래가며 우뚝하게 솟은 봉우리들을 넘어온 심장과 다리가 참으로 대견하다 싶다. 
  • ▲ 남덕유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원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원 구간.ⓒ진경수 山 애호가
    정상을 지척에 두고, 세 시간 이상을 걸어온 허벅지 근육은 터질 듯하다. 정상과 이어지는 계단에는 정상 기념촬영을 하려는 산객들의 대기열이 길게 늘어섰다. 마침내 해발 1507m의 남덕유산 정상에 도착한다.

    울퉁불퉁한 바윗돌 위에 서니 거센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고, 살을 에는 듯한 세찬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닥친다. 정상 부근에 내려앉은 뿌연 구름은 풍경을 내줄 마음이 없는 듯하다. 서봉을 거쳐 하산하려는 계획을 바꿔 원점 회귀하기로 한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길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성공을 위해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 이제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길목에서 세상을 위해 할 일이 하나둘 보이는 것처럼, 남덕유산의 눈꽃 풍경 속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찬미한다.
  • ▲ 남덕유산의 상고대.ⓒ진경수 山 애호가
    ▲ 남덕유산의 상고대.ⓒ진경수 山 애호가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다. 두 번째 봉우리를 향해 작은 구릉을 넘는 순간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무대의 커튼이 걷히듯 산덩이들의 물결을 따라 순백의 정원이 순식간에 펼쳐진다. 눈길 닿는 곳곳마다 절경 아닌 곳이 없으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광명의 진리가 게슴츠레한 이들의 동공을 확장해 새로운 세상을 조견(早見)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순간을 보기 위해 힘들게 산에 오른 산객들에게 남덕유산은 외면하지 않고 큰 선물을 안겼다. 

    겨울 눈꽃을 보려거든 남덕유산을 찾으라는 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천상의 계단인지, 악의 계단인지는 산객들마다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그 힘든 발걸음은 내일의 삶에 에너지가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깨달음의 등불로 타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