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세종시장,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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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민호 세종시장.ⓒ세종시
오랜만에 ‘월요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작년 12월 탄핵정국으로 중단했던 월요이야기를 재개하려다 보니 어느새 해를 넘기게 되었군요. 감회가 새롭고도 깊어집니다.지난 4월 12일부터 19일까지 일본과 베트남으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오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 개막식에 참여하는 일정을 필두로 쿄오토오(京都), 오오사카(大阪), 나라현(奈良)을 거쳐 베트남의 하노이시(市)를 방문했습니다. 이들 도시의 특징은 한 때 그 나라의 수도(首都)였거나, 수도의 역할을 했거나, 현재 수도라는 점입니다.행정수도가 될 우리 세종시의 미래 도시비전을 설명하고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오오사카에서는 한글문화도시로서의 세종시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한국어가 얼마나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민족 자부심을 높이고 있는지, 함께 했던 재일동포들과 부풀어 오르는 가슴으로 뿌듯해 했습니다.그들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불현듯 30여 년 전 동경대학 유학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지방자치 실시를 눈앞에 두고 지방자치법을 연구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간 내무부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었습니다.항일민족 정신에 불타던 젊기만 한 시절, 일본이라는 나라를 사갈처럼 싫어했지만 우리와 가장 행정문화가 유사한 지방자치의 선진국 일본에서 지방자치를 배우는 일은 가장 가성비 높은 효과적인 길이라 생각해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다는 심정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비록 배우러 가지만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내 각오의 상징으로 이를 악물고 가방 속에 태극기를 넣어들고, 광복절인 8월 15일 일본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출국 계획을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비행기편 사정으로 날짜는 정확하게 못 맞추었습니다만, 광복절 며칠 전 동경의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비행기 안에서 몇 가지 결심을 가슴에 새겼습니다.“첫째, 말을 배우지 노래는 절대 배우지 않겠다.” 어쩐지 일본노래를 좋아하면 영혼을 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둘째, 학위논문에는 절대로 ‘한일 비교 운운’하는 식으로 단 한 줄도 한국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 나는 정부 공무원이다. 배우러 온 만큼 철저히 일본제도에 대해 논문을 쓰자.“셋째, 가난한 한국 경제에 일본 땅에서 단 한 푼의 한국 돈도 쓰지 않겠다.”일본 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한국인은 싫다’는 이유로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가족의 초청에도 보증인이 필요하던 때, 보증 서 줄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던 저를 도와준 분들은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동경의 민단 사무국장께서 생면부지의 저를 한국 공무원임을 보고 보증을 서 주셨고, 알지 못하는 한 재일동포 어르신께서 자신이 소유한 집을 저에게 빌려주어서 겨우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집을 내어주시던 그 어르신께서 저를 바라보며 조용히 충고하셨습니다.“아침에 김치 먹고 왔지요? 일본 사람들은 그 냄새에 구역질이 난다고 해요. 그러니 김치를 먹었으면 우유나 껌을 씹고 나가세요.”충격적이었지만,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치욕적이지만 훗날을 도모하며 참는 것)의 고사를 생각하며 그날부터 아침 김치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아파트 현관문 위에 태극기를 걸었습니다.당시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을 향한 편견과 차별은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하고 비열한 처지에 대해 발표하는 일본인 학생에게 울분을 참지 못해, “단 한 가지만이라도 좋다. 한일 관계 5천년 역사 속에 우리 한국이 일본에 해를 끼친 일이있다면 말해다오. 여기서 사과하겠다.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에 수없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자를 가르쳐주고, 유교를 가르치고, 도자기를 가르치고, 심지어 6.25 한국전쟁은 일본의 전후 경제 개발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일본의 문화와 경제 발전은 한국의 도움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되갚은 것은 늘 침략이었고 수탈이었다. 그러면서 감사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요구한다. 재일 한국인을 동정하지 말라. 대신 사과해 달라.” 라고 말했습니다.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세미나가 끝나고 우르르 저를 따라 나서던 일본인 학생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은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앞선 나라였고,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민족’이라는 인식과 결합되며 차별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당시 총무처 생활비는 매달 21만 엔.유학생 1인 기준이라 4인가족의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가족의 생활비는 국내 봉급이 따로 나왔지만, “한국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고자, 아내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지탱해주었습니다.졸업논문도 일본의 “광역연합”에 대해 썼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있지도 않은 제도였지만, 일본에는 이슈가 되던 주제였습니다. 그것이 30년이 지난 지금 충청 “광역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부활될 줄을 누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또 한 가지 일본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켜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열렸던 한국 내무부와 일본 자치성 간 한일 내정관계자 교류회의에서 일본 측은 식사를 겸한 환영의 자리를 마련하였고, 일본 측은 각자가 정성껏 준비한 한국 노래를 불렀습니다.한국 측도 일본 노래를 불러야 할 분위기였지만 아무도 준비가 안 된 상태라 당시 차관님이 저를 긴히 돌아보며, “우리 측에서는 아무도 일본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최사무관이 대표로 일본노래 최신 유행곡으로 불러 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당황으로 등골에서 땀이 흘렀습니다. ‘영혼을 팔기 싫어서 일본노래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운운하는 말은 이 좋은 친선자리에서 속 좁고 개념 없기만 한 말로 들릴 분위기였으니까요.하지만 저는 끝내 일본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대신, 당시 최고의 한국의 유행곡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을 일본어 자막을 보며 일본어로 불렀습니다. 일본노래는 부르지 않겠다는 제 결심을 지키면서도, 상대에 대해 예의를 지켰다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지어지는 묘수였다고 생각합니다.일본 출장 중, 여러 가지 상념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차에 반가운 인연과 선이 닿았습니다. 당시 저를 보증 서 주었던 민단 사무국장님과 무려 30년 만에 연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자녀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2세로 내 딸과 또래였지만,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해서 내가 왜 한국말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아빠에게 말했더니 아빠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기억이 나던 딸이었습니다.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던 그 딸이 이제는 한국어를 배우러 유학을 와서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고,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그 변화가 참으로 벅찼습니다.저는 이번에 동경에 있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김치를 선물했습니다. 기뻐하던 그들의 모습... 이제는 우리가 국적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BTS와 K-POP, K-푸드, 그리고 한국어를 세계가 사랑하는 지금, 국격이 높아졌다는 것을 해외의 한국인들에게서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됩니다. 일본을 떠나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빙긋이 웃음이 지어졌습니다.시대는 늘 변합니다.이제는 그 시절도 아니고 그때 그 사람들도 아닙니다. 사람도 시대도 많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변했습니다. 변하기 전과 변한 후의 우리의 모습 또한 변해야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너그러워졌고, 부드러워졌으며 또한 아름다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시간의 변화가 아니고 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역사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고 힘의 흐름입니다.”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생각났습니다.오오사카에서 저는 한국어를 말하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정중한 일본어로 대화를 건네주었고, 실로 처음으로 노래방에 가자고 권유하여 그들이 부르는 일본노래를 박수를 치며 들어주었고, 나에게 노래를 청하길래 ‘서울 서울 서울’을 일본어 버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본노래를 못 불러 미안하다고 했습니다.비행기 안에서 30년 전의 저의 모습과 지금의 저의 모습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