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따라 향기가 되고 썩은 비린내가 될 수 있다”
  •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몽당연필은 덤벙덤벙 얼굴이다.’ 
    책상을 반으로 갈라 금을 긋는다. 쫄보는 많이 깎아 써서 길이가 아주 짧아진 연필 끝에 모나니 볼펜 몸체를 끼웠다. 까까머리 ‘불알친구’가 펄쩍 뛴다. 반칙이란다. 옆자리 내 짝꿍은 연필 따먹기 세계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고수다. 몽당연필 두어 자루를 투자하면 돌아올 때는 손에 한 움큼 쥐여준다. 책상 위에 납작 엎드린 채 실눈을 뜨고 공격 대상으로 정한 연필을 잔뜩 째려본 다음 내 연필을 엄지로 힘차게 때려 상대방의 연필을 맞춰 책상 밖으로 떨어트린다. 

    몽당연필은 연필 따먹기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다. 쫄보(겁쟁이)는 늘 희생양을 품에 안아야 했다. 낙타표 문화연필 한 자루 갖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다. 연필 따먹기 무대가 된 교실에서 코끝이 까맣게 묻어나도록 몽당연필을 모았다. 그때의 기억이 흐려지고 그때의 생각은 가물가물 추억으로 사라진다. 몽당연필로 그날의 일들을 죄다 기록했다.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한 청정한 물이 이 골짜기 물도 저 골짜기 물도 한데 모아 뱀꼬리 감기듯 느릿느릿 흐르다 북한강이 돼 두물머리에서 멈춘다. 강원도 금대산에서 발원한 물이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리며 굽이굽이 돌아 남한강이 되어 합수목에서 멈춘다. 하여 양수리라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 가면 물안개가 잔뜩 하다. 그럴지라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바글바글 모여 사는 백성들의 입을 적시는 젖줄이다. 

    좌우로는 족자도와 소내섬을 품고 있다. 어찌 보면 자라 대가리처럼 툭 튀어(삘거져)나온 둔덕에 남정네가 곤히 잠들어 있다. 작달막한 키에 눈만 부리부리하다. 지나는 여자 길손에게 물어본다. 나주 정씨와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남정네는 조선시대 양반이요 이름은 정약용이라 한다. 
  • ▲ 몽당연필과 지우게.ⓒ이재룡 칼럼니스트
    ▲ 몽당연필과 지우게.ⓒ이재룡 칼럼니스트
    화(禍)를 참지 못하여 잠을 설치고 분(憤)을 이기지 못해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쫄보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하거늘 왜 이러지? 능히 알지만 쫄보는 입이 닫혀버렸다. 혼자 씨부렁거린다. “ssibal” “ㅁㅊ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책도 눈 밖에 있고 키보드를 두드리면 오타 천지가 되어 버린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욕이라도 벌컥 내뱉어야 하거늘 가래톳 때문에 목구멍만 아프다. 무언가 뒤엉켜 있거나 실타래가 꼬인 것처럼 답답하다. 원인은 파리다. 마음이 흔들린다. 쫄보는 화분(禍憤) 무게에 눌려 마음을 비우거나 내려놓지를 못했다. 화분에 꽃을 심으면 될 일 이거 늘 망설인다. 그러니 연필 따먹기 고수보다도 한참 뒤지는 하수에 불과하다. 거북이 대가리가 자라 대가리로 보이니 마음이 어긋나 있다. 
    잠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호되게 종아리를 맞았다. 대뜸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활 그림자도 뱀으로 보이고 벼루 위에 물도 술로 보인다.” 참 웃긴 양반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번지에서 여태 잔다. 아주 평온하게 쿨쿨 때때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곤다. 
    책상 밖으로 떨어진 몽당연필을 주워 쓰고 또 쓴다. 덤벙덤벙 살자고 몽당연필에 말한다. 내가 누울 자리에 들자 터가 삐뚤빼뚤하다. 터를 반반하게 고르는 대신 터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달리 놓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럴 때 정작 필요한 것이 몽당연필이다. 
    2024년 5월 31일. 파리를 쫓아가다 보면 똥통으로 가게 되고, 꿀벌을 쫓아가다 보면 꽃을 만나게 된다. 서로 만나는 인연에 따라 향기(香)가 날 수도 있고 썩은 비린내(臭)가 날 수도 있기에 쫄보는 꿀벌을 쫓기로 했다. 이재룡 향기가 잔뜩 밴 종이 위에 한 땀 한 땀 꾹꾹 눌러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