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웅의 소설식 풍자칼럼 ‘사랑 타령(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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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신년 새해가 밝았었습니다.”
    최백수는 TV를 보다가 말고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고쳐지지 않느냐고  답답해한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새로운 해를 맞았다고 떠들어 댄다. 작년엔 을미(乙未)년을 맞았다고 난리를 치더니 올해는 병신(丙申)년이 밝았다고 법석을 떤다.

    병신년은 아직도 한 달 이상 남았다. 갑자(甲子) 을축(乙丑)으로 시작되는 육십(六十)갑자(甲子)를 연도에 붙이는 것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것이다. 역학상의 새해는 입춘이 되어야만 시작된다.
    2016년 입춘은 2월 4일이다. 오늘이 1월 1일이니까 입춘까지는 아직도 34일이나 남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이상 남았는데도 병신년이 시작되었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오전 11시를 정오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어째서 해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최백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소리가 언론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쉰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언론이다.”
    신문 방송에서 그렇게 떠들지만 않으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언론은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사명이 있다. 그런데도 언론이 잘못된 말을 확산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얼핏 단순한 일 같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다. 도둑을 없애는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도둑질을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언론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는 일이 지금도 한창 벌어지고 있다.

    어제저녁부터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을미년이 저물고 있다는 카톡이었다. 자정을 넘기면서부터는 병신년이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카톡이 쏟아졌다. 을미년이 저물려면 아직도 한 달 이상 남았고, 병신년이 밝는 것도 역시 한 달 이상 남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을미년이 저물었고, 병신년이 밝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게 다 언론 때문이다. 언론에서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생각한다. 신문 방송에서 하는 일은 심사숙고해서 하기 때문에 틀릴 리가 없다고 맹신한다.

    “이런 문제의 발단은 언론이다.”
    최백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막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마땅히 고칠 방법이 없어서다. 언론은 최백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직도 병신년이 밝으려면 한 달 이상 남았다는 사람의 글을 실거나 기사화도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다음부터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연도에 육십갑자를 붙어서 병신년 새해라고 하려면 입춘이 넘어서부터 쓸 수 있다는 교육을 해야 맞는다. 사리가 이런데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렇게 단순한 문제 하나 고치지 못하는 사회가 한심하다. 이 문제의 발단이 언론이라서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잘못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면서 자신들의 잘못은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최백수의 관심은 다시 오늘의 운세로 돌아간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이게 답이 될 순 없다. 동문서답이다. 답을 찾을수록 엉터리란 생각이 든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얼토당토않은 얘기만 늘어놓았다. 동문서답의 극치란 생각을 하면서 띠별 운세를 정독한다.
     “베풀면 마음이 오히려 편하게 된다.”
    “음주운전은 절대하지 말 것”
    “나의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라”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철학원장은 개별상담을 한 게 아니다. 오직 태어난 연도만 알고 국민을 상대로 운명을 감정한 것이다. 최소한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는 알아야 운명을 감정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어난 연도 하나만으로 운명을 감정했으니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러니 뜬구름 잡는 답만 나올 수밖에 없다. 비유한다면 물만 갖고 밥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밥을 지으려면 최소한 쌀은 있어야 한다.

    콩이나 팥 같은 잡곡도 좀 있어야 맛을 낼 수 있다. 물만 갖고 어떻게 밥을 짓겠는가? 최백수는 신문에 연재되는 운세를 보고 이렇게 따지는 사람은 자신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심심풀이로 보는 것이다. 이걸 만드는 신문사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신문사 편집국장으로부터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호기심 많은 친구가 편집국장에게 물었다.
    “매일 철학관으로부터 오늘의 운세를 전달받나요?”
    “당연하죠.”
    이렇게 대답하려다가 빙그레 웃었다. 갈등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직성에 흠집이 생기고, 그렇다고 친한 처지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뭔가 결심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