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봄꽃들[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전남 여수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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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취산 진달래꽃.ⓒ진경수 山 애호가
영취산(靈鷲山, 해발 510m)은 여수시 삼일동·적량동·상암동·중흥동에 걸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동안 진례산(進禮山)이라고도 하고 영취산이라고도 해 혼란이 잦았으나, 여수시에서는 올해부터 '영취산'으로 통일하기로 했다고 한다.영취산은 인도 마갈타국의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堀山)을 한자로 의역한 것으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하셨던 곳을 의미한다. 진례봉과 시루봉, 영취산이 그리는 산세는 마치 연꽃 모양과 같으며, 그 품속에 흥국사(興國寺)가 자리하고 있다.영취산에는 30~40년 된 진달래 군락지가 다섯 군데로 분포 면적이 꽤 넓다. 이 산은 창녕 화왕산, 마산 무학산과 더불어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영취산 기암괴석과 진달래의 조화는 절묘한 풍광을 연출한다. -
- ▲ 벚꽃길.ⓒ진경수 山 애호가
영취산 산행 코스는 4개가 있으나, 이번 산행은 「돌고개 주차장~억새평원~가마봉~개구리바위~진례봉~도솔암~봉우제~시루봉~영취산~431봉~흥국사」 코스로 약 7㎞이다. KTX와 택시를 이용해 두 시간 반의 긴 여정 끝에 돌고개 주차장(여수시 월내동 548)에 도착한다.영취산의 고운 빛깔을 얼른 만나고픈 마음은 쏜살같은 KTX도 느릿느릿한 완행열차와 같다. 새로운 만남은 늘 궁금하고 마음이 설레지만, 한편으론 두렵기까지도 하다. 그런 마음도 막상 대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려 차분해지고 도전하는 의지로 충만하다.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파른 콘크리트 포장길을 오른다. 길옆으로 돋아나는 새싹들은 갈색의 숲을 연초록색으로 깃들게 한다.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은 키 큰 벚나무의 만개한 꽃을 꽃비로 내려 앉히고, 그 자리엔 새싹이 비집고 나와 빈자리를 채운다. -
- ▲ 돌고개 진달래 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산행 초반부터 애쓰게 하던 가파른 포장길이 보답이라도 하듯 임도를 가로지르면서 돌고개 진달래 군락지가 조망되기 시작한다. 전망바위에 이르러 돌고개 진달래 군락지를 더 가까이서 조망한다. 여수산단과 이순신 대교도 내려다보이는데, 아직 햇살이 약해 선명하지 않다.한동안 종아리가 뻐근하게 하는 급경사를 지나 주능선에 닿으니 완만한 산길이 이어진다. 바다와 산, 새싹과 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최적의 힐링 코스다. 골명재 갈림길을 지나면서 갈색의 억새평원과 가마봉 방향으로 분홍빛 돌고개 진달래 군락지, 골명재 방향으로 백설의 벚꽃 군락지가 동시에 펼쳐지니 눈이 호강스럽다.분홍빛으로 불타는 진달래 군락지, 키보다 훌쩍 자란 진달래꽃길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 빛깔이 어찌나 고운지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차례 오르막 꽃길을 걸어 능선에 오르면 가마봉까지 시야가 탁 트이고, 능선에서 분홍색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골망재 진달래 군락지가 시선을 빼앗는다. -
- ▲ 시선을 빼앗는 골망재 진달래 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나이가 들어도 청순하고 고운 자태의 꽃을 보면 혀끝이 짧아지고 마음이 청춘처럼 두근거린다. 그래서 좋은 것들을 보고, 좋은 일을 행하며, 좋은 말을 들어야 마침내 본래의 심성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봄날 산행엔 지긋하게 나이든 사람이 부쩍 많다.가마봉을 향해 분홍빛 천지의 언덕을 오른다. 여느 산처럼 야트막하게 자란 진달래 군락지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자라서 웬만한 성인 남자의 키를 훌쩍 넘는 그야말로 진달래 나무숲이다. 그 숲을 헤치며 데크 계단을 올라 가마봉에 서니 발아래로 펼쳐진 골망재와 돌고개 진달래 군락지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개구리 바위와 진례봉을 잇는 능선을 채우는 개구리 바위 진달래 군락지는 아직 봄이 저만치 떨어져 있다. 진례봉 뒤 좌측으로 시루봉을 오르는 길목의 봉우재 진달래 군락지가 분홍빛으로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암봉인 시루봉 뒤로 부드러운 토산의 영취산 능선이 이어진다. -
- ▲ 가마봉을 오르는 길의 진달래 군락지.ⓒ진경수 山 애호가
개구리 바위를 넘어서자 울퉁불퉁한 암릉이 진례봉까지 이어진다. 기암괴석 사이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진달래와 때를 기다리는 봉오리들이 위로를 건넨다. 드디어 영취산 진례봉에 도착한다. 지나온 가마봉과 개구리 바위 능선, 남해안 다도해의 해상 풍경, 여수반도의 전경 등 감상하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짭짤한 내음으로 흘린 땀을 씻는다.진례봉에서 줄기차게 이어지는 데크 계단을 내려선다. 계단참에서 바라보는 시루봉의 봉우재 진달래 군락지의 분홍색이 점점 선명해진다. 장군동굴과 응봉폭포를 지나 대나무 숲을 통과해 도솔암에 올랐으나 그곳은 정적만이 흐른다. 반기는 건 고목에서 피어난 청순한 백매화와 백목련, 그리고 암자를 감싸는 바위 사이로 곱디곱게 피어난 진달래꽃이다.가파른 데크 계단을 내려서서 잠시 완만한 길을 걷는가 싶더니 막바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임도사거리인 봉우재와 만나는데, 이곳에서 흥국사와 돌고개로 이어지는 임도와 시루봉과 영취산 방향의 산길로 이어갈 수 있다. -
- ▲ 진례봉(右)과 시루봉·영취산(左).ⓒ진경수 山 애호가
진달래꽃이 만발한 봉우재 진달래 군락지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광을 받은 진달래의 선홍색이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고 아름답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피어난 진달래, 산길 옆으로 너른 평야를 이루는 진달래 군락지를 바위에 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니 신선과 진배없다.고개를 들면 우뚝 솟은 진례봉과 개구리 바위, 능선 끄트머리로 골망재 진달래 군락지, 그리고 푸른 하늘이 쉼을 주고, 눈을 떨구면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선명한 임도와 봉우재 진달래 군락지가 봄바람에 살랑거리며 마음을 설레게 한다.눈과 마음, 그리고 육신까지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드는 사이 무거워진 엉덩이를 달래며 길을 재촉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 아닌 곳이 없으니 발걸음을 옮기는 것보다 멈추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시루봉에 도착해 산과 남해가 이루는 풍광을 조망한다. -
- ▲ 기암괴석과 진달래의 조화.ⓒ진경수 山 애호가
암봉에서 계단을 내려와 영취산으로 향한다. 흙산의 영양분이 풍부한 탓인지 막 피어나기 시작한 진달래꽃의 빛깔이 한층 풍부하고 선명해 아름답기 그지없다. 치켜세운 꽃술은 마치 커다란 눈을 가진 여인네의 아름다운 속눈썹 같고, 그 흔들림이 마치 윙크를 던지는 듯하다.완만한 오름에 이어 평탄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걷는다. 검은 돌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돌탑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드디어 커다란 돌탑과 표지목이 세워진 영취산 정상에 닿는다. 이어지는 내리막에도 곳곳에 돌탑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잠시 내려선 길은 다시 431봉을 향해 오름이 시작한다. 흙길이어서 발바닥 촉감이 편안하다.431봉을 내려서자 거친 바윗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만나자 흥국사 방향인 우측으로 하행을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이정표가 없으니 감각에 의지해 방향을 찾는다. 흙길이 계속 이어지는가 했더니 너덜지대가 시작된다. 편안함 뒤에 찾아오는 발바닥의 시련이 시작된다. -
- ▲ 영취산의 진달래꽃.ⓒ진경수 山 애호가
노자 도덕경 제58장에는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이라 했다. 즉 재앙이란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이고, 행복이란 재앙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재앙과 행복의 그 끝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그러니 잘 나간다고 우쭐대지 말고, 잘 안된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진달래도 때가 되면 화려하게 피고, 그 시절이 지나면 시들어 떨어지고 새잎이 나오는 것처럼 행복과 불행은 늘 반복된다. 그러니 그런 것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오직 본심을 찾는 길일께다.너덜지대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선행자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하행한다. 고도를 낮출수록 바위 틈새를 뚫고 자란 나뭇가지 끝에선 어린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정신집중을 해도 너덜지대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기란 그렇게 녹녹지 않다. -
- ▲ 고즈넉한 흥국사에 찾아든 봄.ⓒ진경수 山 애호가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매달린 등산 리본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산길을 한동안 헤매었을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던 너덜너덜한 길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니 드디어 계곡을 만나 한숨 돌린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자 큼지막한 돌탑들이 흥국사로 안내한다.평평하고 널찍한 돌이 놓인 탐방로 좌우로 돌탑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목교를 지나 영취산 흔들바위를 만난다. 이후 여러 돌탑 밭을 지나는데, 이곳의 돌탑이 108개라 한다. 돌탑을 지나 흥국사 경내로 접어드니 전각과 돌담의 기와에도 하얀 벚꽃과 목련꽃이 만개했다.흥국사는 고려 때 세워진 호국사찰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승수군이 활약했던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영취산의 길목마다 넘쳐난 분홍빛 꽃들과 고즈넉한 흥국사의 백화의 향연은 상춘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다.이 사찰의 분위기에 빠져드니 봄이 오는 소리와 더불어 깨달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하다. 한쪽 끝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 그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아니라, 바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
- ▲ 활짝 웃는 동백꽃의 낙화.ⓒ진경수 山 애호가
오랫동안 머물며 명상의 시간을 더 갖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여수에 왔으니 유명한 오동도(梧桐島) 동백꽃을 만나러 간다. 비록 동백꽃이 끝물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이 워낙 영롱하니 주저하지 않고 만나러 간다.예전부터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아 오동도라 불리게 되었지만, 현재 이곳에서 자생하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어 ‘동백섬’ 또는 ‘바다의 꽃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방파제를 따라 오동도에 도착해 빽빽한 동백나무 숲속으로 완만한 구릉길을 걷는다.조릿대의 종류인 이대를 비롯해 후박나무와 팽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숲을 이룬다.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해 용굴과 병풍바위 등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이것들을 만나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섬 남단의 오동도 등대를 둘러보고 동백찻집에서 만난 영롱한 낙화의 동백꽃을 만난다. 세 번 꽃을 피운다는 동백꽃처럼 살고픈 마음을 간직하고 오동도에서 여수엑스포역까지 걸어간다. 곳곳에서 만나 벚꽃과 동백꽃을 보면서 내일을 살아갈 순수한 마음과 붉은 열정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