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청사년 지혜와 성장이 가득하길…”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전북 진안군 편
-
구봉산(九峰山, 해발 1002m)은 전북 진안군 주천면과 정천면 경계선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에 분출한 마그마가 식어 형성된 봉우리 주변이 풍화와 침식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뾰족한 기암괴석의 봉우리 아홉 개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그리하여 붙여진 산 이름이 구봉산이다. 등산코스는 수암마을과 양명마을을 기점으로 산행자는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제1, 2의 구봉산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들이 편리하게 산을 찾을 수 있다.이번 산행코스는 구봉산주차장을 출발해 1봉에서 8봉을 거쳐 돈내미재에 도착한 후 구봉산 천왕봉을 다녀와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약 7.2㎞이다.
-
세상살이가 어찌 내가 하고자 하는 맘대로 다 이뤄지겠는가. 두 발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주말이면 우리나라 아름다운 산들을 찾겠노라고 했건만. 느닷없이 찾아든 불청객들, 예컨대 건강문제나 새로운 일거리가 찾아들면 하는 수 없이 적절하게 타협하게 된다.산행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오늘, 청사년(靑蛇年) 초하루에 구봉산을 오르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산뜻한 신년 출발을 위해 미진한 공부를 하느라 새벽에 잠든 탓에 오전 느지막이 주차장에 도착한다. 벌써 해돋이를 보고 하산하는 부지런한 등산객을 만난다.구봉산 1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빨강, 검정, 노랑 등 다채로운 색들이 병합된 갈색의 숲으로 접어드니, 허옇고 검푸른 나무줄기와 돌들이 어우러져 오르막길을 이룬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둥글거나 모난 돌더미, 돼지감자 같거나 미꾸라지처럼 매끈한 나무들을 만난다.
-
그들은 겨울 산행에서 땀을 덜 내려고 차근차근 걷는 내 발걸음을 내치지도 채근하지도 않고 동행한다. 땀방울이 맺히고 오랜만에 걷는 종아리가 뻐근해질 무렵 능선길이 나타나면서 구봉산 정상이 2.0㎞ 앞에 있다고 알린다.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구봉산 천왕봉과 기기묘묘한 여덟 개의 봉우리, 그리고 구름다리와 데크 계단이 빚어내는 풍광이 마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인위(人爲)의 신비로운 조화가 변화와 재생을 창조할 수 있음을 보인다.고도가 높아질수록 더뎌지는 걸음걸이 탓에 잦아드는 숨소리, 근데 오히려 경이로운 풍광에 심장이 뜀박질한다. 어느덧 풍채가 좋은 소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는 암봉, 구봉산 제1봉(해발 668m)에 닿는다. 전망대에서 희멀겋게 멀어진 성치산과 적상산, 향적봉을 조망한다.
-
등산로에서 0.1㎞를 삐져나온 제1봉에서 다시 돌아가 제2봉을 향해 암반과 계단을 오른다. 돌탑을 쌓아놓은 제2봉(해발 720m)에 이른다. 지나온 제1봉과 앞으로 올라야 할 제3, 4봉을 조망한다.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어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숲은 구봉산의 암릉미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마치 미련과 욕심, 사사로운 이익에 매몰되면 결코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하얀 속살을 드러낸 가파른 암릉과 곧추선 계단을 힘차게 딛고 올라서니, 구봉산 제3봉(해발 728m)에 닿는다.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며 태평무(太平舞)를 추는 듯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정겹다. 극도로 혼란을 겪은 나라가 올해엔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란다.
-
제4봉을 향해 춤을 추는 소나무의 등줄기가 반질반질하다. 얼마나 많은 등산객이 밟고 올라섰으면 그럴까, 자꾸 못살게 굴면 피부가 헐어 송진이 흘러내릴 판이다. 고상한 춤사위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잘 보호했으면 좋겠다.제3봉에서 계단을 내려선 후 다시 가파른 계단과 눈 덮인 돌길을 오른다. 갓을 쓴 듯 허리를 바짝 세운 계단을 오르니 ‘구름정’이 세워진 제4봉(해발 752m)에 도착한다. 아쉽게도 정자가 노후가 되어 붕괴 위험이 있어 사용이 금지됐다.정자를 대신해 그 앞에 널찍하게 펼쳐진 암반에 자리를 깔고 앉아 신선처럼 음식과 차로 시간을 즐긴다. 겨울 해는 아쉬울 정도로 쉬이 기운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으니 보조를 맞춘다. 오고 감이 기약 없으니 부지런히 눈에 담고 마음에 담는다.
-
구름정에서 내려서면 유명한 구봉산 구름다리를 만난다. 이 보도현수교는 2015년 7월에 지상고 47m, 길이 100m, 폭 12m로 설치돼 구봉산 제4봉과 제5봉을 잇고 있다. 이 다리를 건너는데 출렁거림은 크게 느낄 수 없었다.그 바람에 오르내림의 수고 없이 편하게 구봉산 제5봉(해발 742m)을 지난다. 이후 기울기가 심한 계단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제6봉(해발 732m)에 닿는다. 구봉산의 산행거리는 비록 짧지만 몇 차례 오르내림이 반복되기에 체력 소비가 심한 편이다.제6봉에서 급경사의 암릉 구간을 안전 밧줄에 의지해 안전하게 하행한다. 이어 곧추선 암봉에 설치된 잔교와 유사한 계단을 오른다. 아마도 이 계단이 설치되기 전에는 밧줄을 잡고 힘들게 올라섰어야 했을 터. 이처럼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와 편리는 누군가의 투쟁과 노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협곡을 지나는 짜릿한 오름길, 급경사의 암봉에 매달린 계단의 끝자락 구간에서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잔뜩 세운 암봉을 만난다. 후들거리는 발걸음이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자 안전 밧줄이 설치된 가파른 암릉이 기다린다.구봉산 제7봉(해발 739.8m) 정상이 호락호락 내줄 마음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두 손을 들어 항복하듯 암봉 꼭대기에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와 정상석이 수고했다며 반긴다.암봉을 오르내리면서 눈에 와닿는 풍경이 어느 하나 절경이 아닌 게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연스러움은 늘 그렇듯 사람들에게 순수함을 안겨준다. 제7봉에서 계단을 하행하면서 절벽 틈새에 붙어 자라는 거북손 군락을 만난다.
-
구봉산 제7봉과 제8봉 사이에도 작은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편하게 이동한다. 이 구간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전경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수평선과 수직선 상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감탄사만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굵직한 선을 그리면 힘차게 솟아있는 구봉산의 암봉들을 넘나드는 산행은 그야말로 풍경화 속으로 들어가 점경이 되어 발자취를 남기는 일이다. 이 자연에 남기고 가는 것은 오직 내 발자취, 그리고 가지고 가는 것은 이 봉우리들이 주는 감동과 추억이리라.계단을 올라 암봉 중턱을 지나는데 하늘과 맞닿은 절벽에 풍성하게 자란 거북손이 고개를 숙이며 내려다본다. 절벽 중턱에 뿌리를 박고 안전산행의 신호수처럼 무심하게 서 있는 소나무와 인사를 나눈다. 다시 절벽에 간신히 매달린 계단을 오른다.
-
계단 끝에 이르러 우측으로 암릉을 치고 오르면 구봉산 제8봉(해발 780m)에 닿는다. 정상석과 반갑게 손 터치를 하고 암릉을 내려와 지그재그 계단을 내려간다. 하행의 막바지 구간은 밧줄이 늘어선 암릉 구간이다.드디어 해발 700m의 돈내미재에 도착한다. 이제 남은 구봉산의 마지막 봉우리는 제9봉 천왕봉(해발 1002m)이다. 그림자는 점점 길게 드리우고 오후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구봉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북향이라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아이젠을 착용하고 산허리를 휘돌아 오르자 하얀 수염처럼 길게 늘어선 계곡의 고드름을 만난다. 이어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데크 계단과 나무 계단, 그리고 돌길이 반복되는 그야말로 극기 훈련을 방불케 하는 산행이다.
-
끝없이 이어지는 오름길, 힘들수록 말수가 적어지는 산행에서 동행자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격려로 힘찬 발걸음을 옮긴다. 구봉산 제1봉에서 제8봉까지 오르내리면서 체력을 소진한 터라 급경사의 미끄러운 눈길을 오르자니 곱절은 더 힘들다.돈내미재에서 정상까지는 0.5㎞에 불과하지만, 실제 체감하는 거리는 훨씬 긴듯하다. 얼마나 올랐을까 급경사의 계단 막바지 계단참이 형성된 해발 926m의 전망대에 이른다. 이곳에서 지나온 8봉의 모습을 조망한다.눈앞에선 구봉산 천왕봉이 그 허리에 계단을 내보이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정상까지 앞으로 80m만 남겨둔 시점이지만, 빠르게 기우는 해와 하산 시 체력을 고려해 다시 돈내미재로 돌아가 하산키로 한다. 아쉽지만 구봉산 정상은 다음에 다시 찾는 구실로 남게 둔다.욕심 채우려 억지를 부린다면 훗날 가혹한 고통만이 따를 뿐이다. 청사년 올해엔 지혜와 변화, 성장과 재생이라는 화두로 출발해 희망찬 한 해가 되리라. 내일도 여전히 미래를 밝힐 붉은 해는 떠오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