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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지용제’는 명시 ‘향수(鄕愁)’를 지은 정지용(1902~1950) 시인의 시성을 기리기 위해 정 시인의 고향 옥천에서 매년 열리는 문학관광축제로 오는 19~21일 3일간 지용생가, 정지용문학관, 상계체육공원, 지용문학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며 우리의 언어를 시적 형상화한 시인이자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다.
1988년 해금 이후 그를 기리는 ‘추모제’에서 그와 함께하는 ‘문학축제’로 발돋움하며 문학이라는 차별화된 콘텐츠로 시작한 지용제 축제가 어느덧 올해로 30주년을 맞으며 지역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 했다.
우리 시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노래가 정지용 시인의 ‘향수’ 이다.
지용과 함께 1930년대 우리 문단을 풍미한 김기림은 지용이 “조선 신시사상에 새로운 시기를 그으려한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됐다”고 말한 바 있다.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과 언어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임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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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제는 시와 문학 예술을 주제로 지역문화단체 및 동아리들이 주축이 돼 외주대행보다는 직접 기획해 실행하는 주민주도형 축제로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용시창작가요제, 시인과의 만남, 시노래 공연, 전국시낭송대회 등 주제 프로그램과 카페프란스, 옛날 이발관, 향수마차, 시등 점등, 지용시 활용 설치미술전, 지푸라기 놀이터, 전래놀이 체험 등 지용관련 스토리텔링을 매치한 대중성이 조화된 핵심 테마 콘텐츠가 운영된다.
이 외에도 2017년에는 기존 프로그램을 보강해 지용시 책 조형물 설치, 교동호수 빛 축제, 고향 음식 만들기, 시문학 관광열차 등을 운영하고 지용문학공원 주변 청보리 식재로 시골풍경을 조성하는 등 한층 품격을 높였다.
또한 구읍 골목골목 전체를 활용하는 장소활성화 전략으로 향수 헌책방, 고향 골목길 자전거 투어, 추억의 가정집 등 관람객 참여형 콘텐츠도 연출한다.
지용생가 및 지용문학관이 자리한 구읍도심 전체가 어릴 적 흔히 보던 농촌집과 조그만 카페 등을 갖춘 시골 골목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골목 프로그램 운영으로 관람객들에게 추억의 볼거리 제공과 함께 향수를 자극하게 할 것이다.
축제 외에도 옥천에 오면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안내면의 향수30리 장계길과 KBS해피선데이 ‘1박2일’, EBS 한국기행, SBS 출발 모닝와이드 등 다양한 언론에 소개돼 유명세를 타며 전국 관광객들의 자전거여행 단골코스(정지용생가 ~장계관광지)와 명품 녹색길인 비단결 금강향수 100리 자전거길도 가봄직한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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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계절 푸르고 아름다운 산세와 맑고 깨끗한 금천계곡이 흐르는 장령산휴양림과 장령산의 신비로운 산세에 감탄한 의신에 의해 창건된 용암사마애불,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 용암사도 둘러볼 만하다. 용암사의 일출은 CNN ‘한국에서 꼭 봐야하는 곳 50선’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며 용암사에서 바라보는 옥천일대 경관은 헬리콥터를 올라타고 내려다 보는 듯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관람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계소 주변의 유원지로 아름다운 산세와 시원하게 흐르는 강줄기를 볼 수 있는 금강유원지(금강휴계소)는 전국에서도 아름다운 휴게소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에는 모터보트장, 야영장, 낚시터 등 다양한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매력적인 나들이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휴게소 인근에 있는 조령리 토속음식촌은 식도락가들도 즐겨 찾는 곳으로 인기가 대단하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1902 년6月 20日(음력 5月 15日) 충북도 옥천군 내남면 상계리 추정(현 옥천읍 향수길56) 父 연일정씨(延日鄭氏) 태국(鄭泰國)과 母 하동정씨(河東鄭氏) 미하(鄭美河)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지용(池龍)의 아명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해 지용(芝溶)이란 같은 발음의 한자에 맞춘 것이다.
‘향수’를 통해 우리민족의 이상적 공간을 그렸던 정지용. 우리역사의 질곡은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을 노래하게 한다.
일제 강점기는 그에게 ‘친일시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으며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돈은 그를 방황케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는 아예 그를 ‘월북시인’으로 낙인찍어 그와 그의 문학을 묻어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지용의 생애가 꼭 우리 역사를 닮았을까.
전혀 원하지 않았건만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민족. 그러나 기개 넘치는 우리민족은 강인한 민족적 의지로 다시 살아나 오늘의 우리로 거듭나게 됐다.
정지용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돼 서대문 형무소에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수용됐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됐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