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힐링수변테크산책로~출렁다리~솔섬~탑정리석탑 1시간 30분 계백군사박물관‧문화유산 돈암서원·박범신집필관 관람은 ‘덤’황산벌 5천 계백 결사대, 5만 신라군과 決死抗戰 ‘슬픈 역사’
  • 탑정호 소풍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소나무 28그루가 동그랗게 군락을 이룬 솔섬.ⓒ김정원 기자
    ▲ 탑정호 소풍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소나무 28그루가 동그랗게 군락을 이룬 솔섬.ⓒ김정원 기자
    충남 논산하면 660년 7월 황산벌(연산면 신양리)에서 백제 계백장군이 군사 5000의 결사대가 신라 김유신의 5만군과 맞서 싸운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기울어진 국가 운명을 말해주듯 계백은 결사항전으로 싸웠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논산 ‘계백군박물관’ 입구 좌측 산 중턱에 계백장군이 말에 타고 백제군을 호령했던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곳에서 탑정호는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호수는 예산의 예당호 못지않을 정도로 담수량이 많다.

    ‘탑정호소풍길’은 주차공간은 협소했지만 푸른 바다처럼 시야가 탁 트인 채 호수는 넘실됐고, 호숫가 갈대습지에는 갈대가 숲을 이뤄 새싹이 돋으면서 사그러들기 전 그 존재감을 최대한 알리려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한껏 뽐내고 있었다.

    논산시내 방향, 저 멀리에는 출렁다리를 시공하는 건설장비가 호수 중간에 높이 치솟아 있었는데, 조만간 탑정호에서도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탑정호 소풍길 입구에는 ‘코로나19’으로 문밖 출입을 자주 하지 못해 답답한 나머지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바깥나들이를 한껏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 탑정호 광장을 지나 본격적인 소풍길에 들어서면 힐링수변데크산책로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소풍길이 시작된다.ⓒ김정원 기자
    ▲ 탑정호 광장을 지나 본격적인 소풍길에 들어서면 힐링수변데크산책로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소풍길이 시작된다.ⓒ김정원 기자
    소풍길 데크길 초입 주변에는 장대같이 높게 자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 채 마치 습지처럼 보였지만, 물속에는 벼농사를 짓는 논바닥처럼 보였다. 

    탑정호소풍길 입구를 통과하면 힐링 수변데크 산책로를 시작으로 데크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호수 가장자리는 가는 곳마다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뤘고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지루하면 잠시 도로가에 나와 바람을 쐬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면 좋다. 도로가에는 벚꽃이 활짝 펴 봄이 왔음을 알렸다. 

    소풍길의 가장 아름다운 백미는 조그마한 물가의 동산이자 전망대인 ‘솔섬’이다. 28그루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원형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잠시 땀을 식혀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솔섬은 멀리서 보면 마치 새싹 여러개를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고 한 주먹으로 쥐고 남을 것 같은 풍경이다. 솔섬은 가까이서 보는 것도 예쁘지만 멀리서 보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솔섬이 워낙 협소해 그리 오래 머물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어떤 이들은 눈치 없이 아예 텐트를 치고 터를 잡고 독차지 하고 있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이곳 벤치에 잠시 앉아 좌우로 펼쳐진 호수를 보면 도시 생활로 찌들고 답답했던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 보낼 수 있다. 

    이어 데크길은 지그재그, 기역자(‘ㄱ’) 코스 등이 이어지고 끝없이 데크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물막이 둑이 나오고 그 길도 끝이 난다. 탑정호소풍길은 아기자기하고 큰 멋은 내지 않았지만, 걷는 내내 완만한 곡선보다는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 솔섬 인근 아름다운 데크길.ⓒ김정원 기자
    ▲ 솔섬 인근 아름다운 데크길.ⓒ김정원 기자
    탑정호소풍길은 백제군사박물관 앞 탑정호수변생태공원에서 출발해 수변데크 둘레길~솔섬~탑정리석탑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주변에는 대명산을 비롯해 봉황산, 조정산, 갈마산, 고정산이 탑정호를 에워싸고 있어 둘레길과 등산코스가 많다. 

    탑정호소풍길 1코스는 탑정호 광장~대명산 전망대~딸기향농촌테마공원~탑정호수변생태공원~백제군사박물관~탑정호수변생태공원~탑정호출렁다리~탑정호 광장까지 11.5㎞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탑정호소풍길은 △탑정호 광장~대명산 정상~탑정호수변생태공원(4.1㎞) △탑정호수변생태공원~휴정서원~변곡2리~병안유원지(6.4㎞) △병암유원지~평매마을전망데크~조정서원~박범신작가집필관(7㎞) △병암유원지~평매마을전망데크~조정서원~조정산정상~박범신작가집필관( 9.3㎞) △박범신작가집필관~봉황산정상~탑정호광장(2㎞) △박범신작가집필관~탑정호광장 (2.5㎞)을 둘러볼 수 있다.

    논산은 역사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볼거리가 아주 많다. 1경 관촉사를 비롯해 2경 탑정호, 대둔산, 계백장군유적지, 쌍계사, 개태사, 옥녀봉과 금강, 노성산성 등 계백장군과 논산8경이 있다. 

    또한 논산은 딸기의 고장이며 먹거리는 붕어찜 등이 유명하다.

    1994년도 건설된 탑정호는 유역면적 2만 1880㏊, 만수면적 662.0㏊, 유효저수량 3만 4940㎥, 수혜면적은 5117㏊에 이를 정로도 넓은 수역을 자랑한다. 
  • 탑정호 출렁다리 공사현장.ⓒ김정원 기자
    ▲ 탑정호 출렁다리 공사현장.ⓒ김정원 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

    탑정호를 뒤로 하고 국도를 따라 오는 길에 찾은 유네스코 유산인 논산시 연산면 연암리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조선시대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돈암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부터 군자가 덕과 학문을 닦았던 곳으로 옛 선비들의 자태만큼이나 예스럽게 잘 보존돼 있었다.

    돈암서원은 1634년(조선 인조)에 건립된 서원으로 1993년 사적 제383호에 지정됐으며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돈암서원은 1871년 전국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자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서원이자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1881년(고종 18년) 숲 말의 돈암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오르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 건축됐다.  
  • 백제군사박물관 왼쪽 산에 세워진 계백장군의 동상.ⓒ김정원 기자
    ▲ 백제군사박물관 왼쪽 산에 세워진 계백장군의 동상.ⓒ김정원 기자
    사당 내부에는 주향(主享)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판을 간직해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에는 김장생과 김계휘, 김집 선생의 책판 4168판을 보관했었으나 아쉽게도 현재 1841판만 남아 있다. 책판은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변화과정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응도당(凝道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수강학의 성격을 지닌 강당으로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됐다. 서원은 조선 인조 11년(1633년)에 건립됐으며 서원의 규모나 구조적 측면에서 한국서원의 대표서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숭례사에 제향을 위해 출입하는 문인 ‘내삼문(內山門)’이다. 이 문은 사당 앞의 어칸과 양 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에는 ‘지부해함’, ‘박문약례’, ‘사일화풍’ 등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 충남 논산 유네스코 유산 돈암서원. 기호학파 대표적인 인물인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돈암서원은 고풍스러운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 충남 논산 유네스코 유산 돈암서원. 기호학파 대표적인 인물인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돈암서원은 고풍스러운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과거 돈암서원에서 김장생과 그 후학들이 지켰던 ‘지부해함(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은 수백년이 지났지만 현대인들이 새겨들어 본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