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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수는 한계를 느낀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팔이의 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뭔가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든다. 마실 게 없다면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다.하얀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여 마셨다가 과거를 토해내 듯 뱉어버리고 싶다. 그러면 속이 뻥 뚫릴 것 같다. 자기감정을 추스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기분이다. 물론 이십 년 전에 끊은 담배가 있을 리가 없다.
최백수의 눈길이 주방으로 향한다. 어딘 가에 술이 좀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사실 잠을 가장 쉽게 청할 수 있는 방법은 술이다. 술 몇 잔만 마시면 금방 곯아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오전에 치과에서 잇몸치료를 받았다. 기만 있어도 이빨이 얼얼하다. 거기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자해행위나 마찬가지다. 결국은 침을 놓는 방법뿐이 없다. 최백수는 침을 빼어든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어떤 침을 어떻게 놓을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바깥쪽 발바닥이 아픈 것을 고치려면 방광정격을 놓아야 한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을 고치려면 담기맥을 다스려야 한다. 평소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면 당연히 불면증을 치료하는 처방을 써야한다.
평소엔 잠을 잘 자는 편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다. 건강한 사람도 더러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있다. 그걸 병이라고 생각해서 침을 맞는 것은 과잉처방이다.
발바닥이 아픈 침을 놓으면 자연히 잠도 올 것이다. 허약한 사람은 침만 맞아도 피곤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침을 놓기로 결정한바 있다. 최백수는 침을 꺼내들고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란 말을 중얼거린다.
음양오행의 공식이다. 세상만물은 음(陰)과 양(陽)으로 구분되고, 음양은 다시 오행(五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세상엔 천차만별한 사람들이 엉클어져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살펴보면 오행(五行) 즉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목(木)은 나무처럼 곡직(曲直)하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화(火)는 불처럼 정열적인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토(土)는 흙처럼 포용력이 넓은 사람을, 금(金)은 쇠처럼 강직하고 결기가 강한 사람을, 수(水)는 물처럼 지혜롭게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목 화 토 금 수란 공식을 생각할 때마다 침은 참으로 신비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동양철학은 논리가 정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동양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으로 사람의 운명도 알아맞히고 병까지 고칠 수가 있는 걸까?
아무튼 최백수는 방광정격이란 침을 놓기 위해 또 다른 공식을 중얼거린다.
“모보관사((母補官寫)”
허약한 장부를 보(補)하는 침(針)의 공식이다. 허약한 것을 보할 때는 어미를 먼저 보(補)하고 관(官)을 사(寫)한다는 뜻이다.사암오행침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허약한 것을 보하려면 직접 보하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어미(母)를 먼저 보하고 관(官)을 사하는 것일까? 최백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침을 놓아보면 효과는 탁월하다. 그러니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신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보관사라는 공식을 음미해본다. 방광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론으로 따지면 수(水)에 속한다.
수(水) 중에서도 양(陽)에 속하는 장기다. 우리 몸에서 수의 기능을 하는 장기는 신장(腎臟)과 방광(膀胱)이다. 신장은 음(陰)이고 방광은 양(陽)이다. 한방에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지만, 조화가 깨지면 병이 온다고 본다.
수(水)에게 상생(相生) 역할을 하는 모(母)는 금(金)이고, 상극(相剋)역할을 하는 관(官)은 토(土)이다. 그럼 상생은 무엇인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어미가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까워하기는커녕 더 못줘서 안타까워하는 게 모정이다.
그걸 상생관계라고 한다. 만약 자식이 허약하다면 자식에게 보약을 먹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사암오행침에서는 그 어미부터 보약을 먹이는 격이다. 물론 타당한 면도 있다. 어느 어미가 죽어가는 자식을 방치하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