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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수는 역학 서적을 덮고 일어선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팔자소관이라는 생각을 한다. 최백수의 눈길이 다시 책장으로 온다. 책장을 볼 때마다 회한이 몰려오고, 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
최백수의 눈이 머무는 곳엔 ‘감치명령’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 나쁜 신문이란 소설보다 더 비판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쁜 신문의 주인공이 임금을 주지 않는 사이비 신문사와 싸우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임금을 못 받았다고, 먹고 살 수가 없다고, 억울해서 못 살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법원을 찾아갔다. 그렇지만 법원은 살려주기는커녕, 억울함을 풀어주기는 고사하고 더 혹독한 고통만 안겨준다는 내용이다.최백수는 감치명령이란 소설을 빼든다. 붉은색 표지엔 자극적인 문구가 쓰여 있다. “판사는 날 경찰서 유치장에 감치했지만 난 판사를 따가운 여론의 감옥에 유치할 것이다. 판사는 날 겨우 10일간 감치했지만 난 판사를 평생 동안 감치할 것이다.”
자신이 쓴 글이지만 낯설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여 년 전에 쓴 글이다. 최백수는 책의 뒤표지를 바라본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이 소설 한 권엔 우리시대의 아픔이 다 녹아있다. 3년 동안 봉급 한 푼 주지 않는 부실 신문사에서 상처 받은 한 중년 가장이 살려달라고 법원을 찾아갔다. 판사는 동정은커녕 쪽박까지 깨부수고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전국각지에 난립한 영세부실신문, 판사의 사법폭력, 중년 가장의 배고픔 등은 우리시대의 아픔이다. 이 시대적인 아픔이 눈물겹도록 그려져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난 최백수는 두 눈을 감는다. 그 당시의 아픔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감치명령 뒤표지의 말은 처절하게 계속 된다.“지방에 난립한 사이비 신문의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면 우선 신문개혁부터 해야 한다. 재벌신문을 개혁하는 게 편집권을 독립하는 문제이지만, 사이비신문 문제는 기자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생존의 문제다.
무엇보다 기자들을 배고프지 않게 해주는 대책이 시급하다. 기자가 먹고 살기 위해 광고를 하고, 신문을 팔기위해 홍보나 비판기사를 쓰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사주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언론이 아무리 사회정의를 외쳐도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최백수는 이 책을 쓴 게 벌써 10여 년 전이니 세상은 많이 변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 당시에는 사이비 부실신문 문제가 사회의 독이었지만 지금은 인터넷 신문 문제가 사회의 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방식만 변했을 뿐이지 언론이 우리 사회에 독을 뿜는 것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최백수는 감치명령이란 책을 펼쳐든다. 작가의 집필의도란 글이 눈에 들어온다.“난 죄가 없어!”
이건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서 쓴 소설이다. 난 몇 년 전 어느 기자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사법폭력을 당했다는 소릴 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고심했다.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우리사회의 예절 아닌가. 배가 고파죽겠으니 제발 밥 한 술만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냥을 못 주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는 게 예절이다.
왜 남의 집에 와서 구걸하느냐고 야단치며, 쪽박을 깨는 것은 물론이고 두들겨 패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누군들 가만있겠는가? 사이비신문사에서 3년 동안 글을 썼지만 단 한 번도 봉급을 못 받았다.
봉급날을 기억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봉급을 못 주는 것을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봉급을 못 주는 사유를 설명하며, 언제까지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것이다.
법원엘 찾아가면 돈은 못 받더라도 위로는 받을 줄 알았다. 동냥은 고사하고 쪽박마저 깨뜨리고 유치장까지 가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너무 억울했다는 것이다. 임금을 달라는 것은, 퇴직금을 우선 배당해 달라는 것은 분명히 법에 명시된 근로자의 권리다.그런데도 판사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항의하자 다음엔 틀림없이 우선 배당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약속을 하고도 판사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째서 두 번씩이나 약속을 어겼느냐고 몇 마디 했다는 이유로 판사는 그 기자를 유치장에 가뒀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을 것이다.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며 놀라워했다. 간혹 무고한 시민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는 기사를 보고 설마 했다.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의심했다.
그건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 작가는 전직 국가공무원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작가로서, 평생 사회의 잘못된 점을 꼬집는 일을 해온 지성인의 양심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최백수의 눈엔 아직도 주인공의 울부짖는 모습이 선명하고, 귀엔 울부짖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린다. 이 소설 주인공의 고백은 처절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회정의 차원에서도 묵과할 수가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양심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보복하기로 결심했다.
그 판사를 직권남용으로 형사고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제기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격이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일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