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 최백수는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하다. 남들은 연말이라 다 바쁘다고 아우성인데 혼자만 한가한 게 쓸쓸하다. 남들이 바쁠 때 함께 바빠야 사는 맛이 나는 건데 혼자만 한가하니 소외당한 기분이다.
    슬며시 소파 옆에 쌓아둔 신문을 뒤진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운세가 있는 면을 찾는다.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건지 막막해서다. 게다가 어젯밤 꿈자리도 어수선했다. 나이가 들면서 어떤 목표를 세우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무엇을 이루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자는 뜻이다. 그것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미래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미래가 많지 않은데 투자나 저축을 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최백수는 과거를 돌이켜본다. 나이를 따지면서 초조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건 60대부터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엔 나이를 먹지 않는 게 야속했다.
    어서 빨리 세월이 흘러서 성년이 되었으면 싶었다. 성년이 되어야만 담배도 피울 수 있고, 극장도 갈 수 있다.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살아온 날이 15년에 불과한데 죽을 날은 70년이나 남았다.
    대충 계산을 해봐도 살날이 산 날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어린 시절엔 나이를 따진다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세월 가는 게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60세를 지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리 많이 산다고 해도 80대 중반을 못 넘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계산을 하면 살날이 불과 20년도 못 남았기 때문이다. 최백수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본다. 1948년생이다. 무자(戊子)생 쥐띠다.
    내년이면 69세다. 마음으론 이미 칠십을 살고 있다. 어느 날부터 칠십 세가 된다는 게 겁이 났다. 육십과 칠십은 한 살 차이지만 심리적으론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육십은 노후를 즐길 생각을 하며 사는 나이다.
    그러나 칠십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서서히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다. 죽으면 묘를 쓸 것인지 화장을 할 것인지, 묘를 쓴다면 선산으로 갈 것인지, 내 산을 사야 하는 것인지…. 묘를 쓴다면 마누라와 합장을 할 것인지, 따로 쓸 것인지….
    노후를 즐기는 것과 죽음을 준비하는 차이는 이렇게 크다. 아무리 백세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칠십대 후반의 나이에 꺾이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는 곳마다 돈 많은 과부댁 없느냐는 농담을 입에 달고 다니던 유지가 있었다.
    갑자기 작년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보고, 그분의 나이를 생각해 봤다. 바로 열 살 많았다. 그렇다면 내 수명을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십 년 남은 것이다, 아니 십 년이 안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분은 건장한 체구에 힘이 장사였다. 술도 말술이었다. 밤새 술을 마셔도 끄떡도 없었다. 평생 병을 모르고 살던 분이다. 그런 사람도 겨우 78세에 세상을 떴다. 최백수는 자신과 비교해 본다.
    두 번의 암 수술에 허약하기로 소문난 자신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십 년을 산다는 보장도 없다. 십 년도 과욕이다. 십 년이 얼마나 짧은 세월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당연히 어떤 목표도 가질 수가 없다. 최백수는 아침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오늘도 막막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침에 읽다가 만 신문을 펼쳐든다. 오늘의 운세에서 쥐띠를 찾는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최백수는 빙그레 웃는다. 운세를 본다는 사람 치고 구체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두리뭉슬하게 말하는 특성이 있다.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이다.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맞으면 용한 것이고, 안 맞아도 그만인 것이다. 그게 바로 점술이다. 이렇게 엉성한 운세지만 독자는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신문 1면에 나는 기사를 쓰기위해 수많은 기자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만 오히려 독자는 운세가 많다는 소릴 들었다.
    1면 톱기사보다도 독자가 많은 게 바로 운세라는 것이다. 최백수는 이렇게 두리뭉실한 운세를 누가 만든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돋보기를 쓴다.
    ‘김영근 철학관장’
    이란 직함이 쓰여 있다. 그 직함보다도 눈길을 끄는 게 있다. 바로 전화번호다, 전화번호를 보면서 상업성이란 말을 떠올린다. 수많은 사람이 운세를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하나는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심심풀이 땅콩 취급을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갈증을 느끼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노린 게 전화번호일 것이다. 이런 중앙지에다 운세를 연재할 정도라면 대단히 용한 철학자일 것이라는 상상을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직접 한번 만나서 운명을 감정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문에 운세를 연재하는 철학자란 간판을 달고 으스대는 모습이 떠오른다. 신문사 입장에선 독자에게 읽을거릴 제공해서 좋고, 철학관 입장에선 자신의 신통력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여서 좋을 것이다.
    공생관계인 셈이다. 동업관계라는 특성 때문에 어느 신문이고 다 오늘의 운세를 게재하는 것일 게라고 짐작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최백수는 점괘를 중얼거리면서 음미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는 소리다, 지금 자신은 과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오늘 일을 걱정하고 있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막막해서 운세를 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