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가을 보내고 겨울 준비로 분주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강원 평창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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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五臺山)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강릉시·홍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주봉인 비로봉(毗盧峰, 1563m)을 중심으로 호령봉(虎嶺峰, 1561m), 상왕봉(象王峰, 1491m), 두로봉(頭老峰, 1422m), 동대산(東臺山, 1434m) 등 다섯 고봉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산명(山名)의 유래는 산의 가운데에 있는 중대(中臺)를 비롯하여 북대(北臺)·남대(南臺)·동대(東臺)·서대(西臺)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고 있고, 산세가 다섯 개의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과 같다 하여 오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이번 산행은 상원사주차장을 출발해 오대산 중대에 자리한 상원사를 거쳐 중대 사자암~적멸보궁~비로봉~상왕봉~북대 삼거리~임도~상원사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총 거리는 약 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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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주차장에 도착하여 청량한 계곡물이 흐르는 관대교(冠帶橋)를 지날 때, 조선의 세조가 이 계곡물에 목욕하다가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일화를 떠올린다.‘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문수성지’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끼고 돌아 오대산 선재길을 따라 상원사로 향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9㎞ 숲길 구간의 선재길은 오대산의 단풍 끝물을 즐기려는 상추객으로 분주하다.단풍이 붉게 물든 계단 길을 올라 청풍루를 거쳐 문수전 앞에서 잠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지혜로운 산행을 시작한다. 만산홍엽을 기대하며 오백 리가 넘는 길을 달려왔건만, 전각 뒤로 보이는 산은 이미 갈색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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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를 놓친 단풍산행의 아쉬움은 있지만, 오대산이 지닌 또 다른 매력과 지혜를 발견하는 발걸음에 집중키로 한다. 상원사 경내를 나와 소나무 숲 사이로 설치된 계단을 오른 후, 낙엽이 수북이 쌓인 돌길을 걷자니 번뇌를 버리고 나를 보라 하는 것 같다.마음을 비운 탓일까, 아직 남아 있는 단풍에 둘러싸인 중대 사자암을 발견하곤 발걸음 재촉한다. 오대산 비로봉을 만나기 전 비로전 앞에서 세상을 두루 비추는 진리의 빛을 어서어서 만나길 서원해 본다. 종무소 옆의 감로수를 한 표주박을 들이키고 석조계단을 오른다.산행을 시작해 줄곧 오르막이 이어져 발걸음이 지쳐갈 무렵, 계단 옆 부도처럼 생긴 모양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리듬에 맞춰 오르니 한결 걸음이 부드럽다. 비로봉과 적멸보궁 갈림길에서 장엄한 연등으로 가득한 적멸보궁을 먼저 다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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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寂滅寶宮)은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후 남긴 사리(舍利)를 봉안한 성스러운 장소를 말한다. 법당 뒤편 나지막한 봉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진신사리(頂骨眞身舍利)가 모셔져 있다.오대산 적멸보궁은 영축사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다. 봉분 앞에는 작은 마애불탑(磨崖佛塔)이 세워져 있다. 전면에는 오층탑, 후면에는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가 조각되어 있다.마애불탑 앞에서 합장 삼배를 하고 고개를 들면 인자한 비로봉 능선이 부드럽게 너울댄다. 그곳으로 향해 적멸보궁을 내려와 드문드문 돌이 섞인 흙길을 걷는다. 강원도 고봉들이 석산인데 비해 오대산은 흙산으로 숲이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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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산할 능선과 뒤편으로 가물가물한 나옹대를 조망하며 걷는다. 잠시 편안하게 걸었던 흙길은 자연석이 놓인 오르막길로 얼굴을 바꾼다. 고도 1200m대, 활엽수들은 쉼에 들었고, 침엽수들만이 푸릇한 생기로 삭막함을 달랜다.가끔씩 눈에 띄는 쓰레기를 줍고, 구멍 뚫린 고사목에 끼워 놓은 돌들을 꺼내 준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인간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모습이 애처롭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아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잔뜩 허리를 세운 자연석 계단, 숨이 차오르고 종아리가 뻐근해지면서 오대산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체험한다. 얼마나 가파른지 비로봉 0.4㎞을 앞둔 해발 1378m에 심장돌연사 예방 안전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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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뛰는 고동을 고르게 하고,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성난 듯 바짝 몸을 세운 막바지 구간을 오를 채비한다. 정상을 지척에 앞두고 이어지는 계단, 몸의 열기를 식히듯 찬바람이 상쾌하고 햇살도 선명하게 드러낸다.창공을 향해 삐죽삐죽 몸을 뻗은 갖가지 모양의 고목이 힘을 낼 용기를 준다. 한자리에서 길고 차디찬 겨울을 굳건히 버티고 지켜온 그들만이 갖는 에너지이리라. 남은 힘을 모아 막바지 계단을 치고 올라 드디어 해발 1563m 오대산 비로봉에 닿는다.겹겹이 층을 이루며 희뿌연 안개 속으로 멀어져 가는 산줄기들이 장엄하다. 힘겹게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풍광이다. 노인봉과 동대산, 두 번째 목적지인 상왕봉, 두로봉 앞 산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북대미륵암과 나옹대, 저 멀리 주문진을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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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능선길을 걷는다. 헬기장까지는 완만한 경사로 거의 평지에 가까운 흙길이고, 길섶의 숨죽인 나지막한 초목은 탁 트인 시야를 만들어 주니,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걷기에 더없이 좋은 때이고 길이다.더욱이 곳곳에서 만나는 수령이 오래된 괴목이 펼치는 오묘함에 눈이 호강한다. 오대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광이다. 순수 예술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헬기장에 도착해 지나온 비로봉과 앞으로 가야 할 상왕봉을 조망하며 내 위치를 발견하고 할 일을 깨닫는다.내리막길이 시작되면서 300년 이상된 주목군락 보호지역을 지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그 강인한 생명력을 닮고 싶다. 고령의 주목나무 주변으로 새로운 주목나무가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호해야 다음 세대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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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나무 군락지에 이어 푸른 하늘에 은빛 선을 그으며 반짝이는 자작나무 군락지가 능선 길에 다채로움과 신비를 더한다. 옆자리에서 살아가는 신갈나무와 자작나무의 수관기피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계절이다.나이 들어 몸을 가눌 수 없어 굽어진 신갈나무를 젊고 튼튼한 자작나무가 흔쾌히 한쪽 어깨를 내어주는 모습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들은 비록 다를지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으며, 배려하며 동행하는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자작나무 숲길을 걷다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인내하며 살아가는 나무를 만난다. 무자비한 인간의 욕심으로 빚어진 참혹한 광경에 죄스럽기 짝이 없다. 나무에 올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아이젠과 스틱에 찍혀 생긴 쓰라린 상처가 이리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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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자연을 그냥 눈으로만 감상하고 마음으로 보듬어 주시라. 산에 남기는 건 발자취만, 가져가는 건 추억만 가져가시라. 무거워진 마음에 발걸음마저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이 느낌은 그 나무의 고통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리라.숲속을 빠져나와 너른 초지에서 닿으니 상왕봉이 지척이다. 정상을 0.3㎞를 앞두고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오른다. 길섶에 때늦게 핀 연분홍색 이질풀꽃이 눈길을 끈다. 아름다운 자태에 이질이라, 이질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느린 걸음도 멈추지 않으니 해발 1491m 상왕봉에 닿는다. 까마득하게 멀어진 비로봉, 여기까지 걸어온 발이 대견스럽다. 여정의 절반, 해는 비로봉 능선에 가깝게 기울어지고, 초행의 홀로하는 하산에 두려움이 어찌 없으라. 그래도 두 발과 믿음으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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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봉에서 구불구불한 거친 돌길을 1㎞ 정도 내려서니 해발 1460m 북대 삼거리에 닿는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상원탐방지원센터·북대미륵암과 두로령 방향이 등산로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오대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는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두로령 방향으로 힘겹게 구릉을 올랐으나 체력이나 시간상 무리가 될 듯해 다시 내려와 상원탐방지원센터로 발길을 돌린다. 남은 길이 6.1㎞인데, 해는 뉘엿뉘엿 지니 발걸음을 재촉해 완만한 산길을 내려간다.임도 합류점에서 북대미륵암을 바라보며 다음을 기약하고, 임도를 따라 쭉 고도를 낮춰 하행한다. 끝물 단풍이 고개를 숙인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한다. 곡풍을 안고 내려서자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울퉁불퉁한 바위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청량한 물소리는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크게 다가온다. ‘우자선변(愚者善辯)이요, 지자과언(智者寡言)’이라 했던가, 어리석은 자는 잘 떠벌이지만, 지혜로운 자는 말수가 적다. 이 가을에 지는 해처럼 자연은 소리 없이 오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