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도시와 고즈넉한 농촌의 경계[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대전광역시 서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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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九峯山, 해발 264m)은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 가수원동, 괴곡동, 흑석동, 봉곡동에 둘러싸여 길게 누워 있다. 남쪽으론 갑천이 휘돌아 흐르는 노루벌과 북쪽으론 아름다운 서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이 산은 서쪽 대고개에서 비재까지 아홉 개의 암봉(巖峯)이 솟아있어 구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산의 형국이 마치 아홉 마리 봉황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세라 하여 구봉산(九鳳山)이라고도 불린다.구봉산에는 ‘나눔길·여백길·채움길’이란 이름을 지닌 둘레길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어 자신의 체력에 맞춰 등산코스를 정할 수 있다.봄엔 진달래, 가을엔 단풍이 유명하고, 노루벌의 일출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초여름 한낮의 풍경은 어떨지 궁금이 일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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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은 어디서든 올라가기 좋지만, 오늘 산행은 ‘한천약수터~숲길~대고개~구봉정~비재~관풍정~비재~나눔길 일부~여백길 일부~한천약수터’를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약 7.5㎞이다.한천약수터 공영주차장(대전시 서구 관저동 843-16)에 도착하여 0.1㎞ 떨어진 한천약수터를 지나 포장길을 조금 오르면 구봉정 1.0㎞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짙푸른 녹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맑은 햇살이 숲의 싱그러움을 더한다. 수풀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향기와 구수한 흙내음이 코를 간지럽게 하고, 청아한 새소리가 귀를 열어주니 잠자고 있던 오감이 활짝 깨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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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만나 구봉정으로 오르는 능선 대신 대고개 방향으로 7부 능선의 희미한 산길 흔적을 따라간다. 산 중턱을 가르는 오솔길을 지나고 널찍한 임도를 걷는다. 송전탑 부근에 이르러, 설치된 철망 울타리를 따라 능선 방향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대고개를 슬쩍 비켜 지난 구봉정 방향의 능선길에 닿는다.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줄지어 선 능선길을 걷자니,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숲을 찾아 위로를 받는 게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곧이어 가파른 암봉을 이어간다.야트막한 산이지만 속살은 동네 앞산이나 뒷산과 달리 여느 높은 바위산의 산세를 여실히 닮았다. 오늘 산행의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좌측 아래로 봉곡동과 넓은 벌판, 그리고 켜켜이 층을 이룬 산줄기 뒤로 대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우측 아래로는 서구의 전경이 펼쳐지고, 뒤로는 대고개 봉우리가 조망된다. 송전탑 부근으로 한창 꽃을 피운 밤나무 떨기가 보인다. 이제야 철망을 설치한 까닭을 알만하다. 도심 가까이에 이런 산이 있다는 건 행복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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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봉을 내려와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 다시 암봉을 오른다. 날카로운 퇴적암들이 뒤엉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산비탈로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한 예리한 바위를 두 소나무가 몸을 서로 꼬아 온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다.돌이 깔린 능선을 걸으면서 한쪽으론 복잡하고 바쁜 도시의 풍경을, 다른 한쪽으론 한적하고 고즈넉한 농촌 풍경을 조망한다. 어쩌면 극단의 중심에서 중도를 깨닫는 길인 듯하다. 한동안 이어진 완만한 돌길 끝자락에서 또 넘어야 할 세 번째 암봉을 조망한다.암봉을 오르기 위해 가파른 경사의 암릉을 내려간다. 안부에 이르니, 한천약수터·집넘어골·구봉정·봉곡동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밧줄 난간이 설치된 암릉을 비지땀을 흘리며 오른다.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봉우리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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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암릉 길을 올라 세 번째 봉우리 정상에 닿으니 큰 소나무 한 그루 아래 돌탑이 있다. 발아래에는 경쟁하듯 빼곡하게 솟아있는 회색 건물들 사이로 푸르른 생명의 띠가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대전시 서구의 전경이 펼쳐진다.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봉우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구봉정으로 향한다. 거친 암릉을 올랐으니 다시 날카로운 암릉과 돌길을 내려선다. 성애원·상제집략판목·구봉정·봉곡동 갈림길의 이정표를 만난다.구봉정을 향해 걷는 길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푸르른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능선에 놓인 바윗덩어리를 비껴가며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걷는다. 길옆으로 삐쭉 튀어나온 바위에 오르니 조망이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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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긋한 앉음새가 어미 노루와 새끼 노루가 뛰어노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노루벌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눈부신 풍광이 펼쳐진다. 갑천이 유유히 흐르는 노루벌 뒤로 멀리 대둔산이 아른거린다.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워 한참을 머뭇거리다 다시 암릉 위를 거닐다가 철제 계단을 내려서니 성애원·구봉정·봉곡동 갈림길을 지난다. 다시 계단과 암릉을 오르면서 그다지 고되지 않은 산행길에서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도 되는가 싶을 정도다.잠시 내려선 길은 아름다운 목교와 매끈하게 솟은 암릉에 매달린 계단으로 이어지고 곧이어 네 번째 봉우리에 닿는다. 거칠고 험한 바위들 사이에서 한 그루의 소나무가 도심 속의 사람들과 농촌 속의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을 의연한 모습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짙은 녹음에 속살을 감추고 있었던 넘어온 봉우리들이 점점 멀어지고, 넘어야 할 봉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듯 지척이다. 계단을 내려섰다가 다시 불쑥불쑥 튀어나온 바위들이 박힌 암릉 길을 올라 다섯 번째 봉우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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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암봉 위에 서면 대전시 서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넘어야 할 여섯 번째 암봉과 구봉정이 세워진 일곱 번째 봉우리를 보니 비록 키는 작지만 옹골찬 산세를 지닌 산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된다.암봉을 몇 걸음 내려와서 운동기구가 설치된 데크 전망대에서 갑천의 물길 따라 형성된 아름다운 노루벌 속으로 빠져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구름다리로 옮겨 계단을 오르자 이내 도착한 여섯 번째 봉우리다.계단을 내려와 성애원·구봉정·봉곡동 갈림길을 지나 뾰족하게 우뚝 솟은 암봉 위에 앉아 있는 구봉정에 올라선다. 눈높이로 빈계산, 금수봉, 백운봉, 계룡산 등 켜켜이 포개진 산줄기가 발아래 보이는 대전시 서구를 감싸고 있다.산 따라 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라고 거듭 강조하려는 듯 노루벌과 산이 산을 업고 산등성이들이 너울대며 다시 다가온다. 구봉정에서 계단과 거친 바윗길을 0.1㎞ 내려온 후 이내 잔잔한 물결을 타듯 암릉 길을 올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여덟 번째 봉우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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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돌길을 내려가는가 싶더니 이내 미끄럼 주의 안내판이 있을 만큼 경사가 가파른 돌길이 이어진다. 조심스레 하행하여 체육시설과 정자가 설치된 안부 쉼터에 닿는다. 이곳은 구봉정에서 0.5㎞ 지점이고, 구봉근린공원과 괴곡동(고릿골)로 연결된다.괴곡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릉을 지나 비재에 닿는다. 이곳은 구봉정으로부터 0.9㎞ 남짓 떨어진 곳으로, 구봉그림공원(1.3㎞)과 구봉정(철제계단, 1.1㎞)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구부정한 소나무 숲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한낮 무더위에 지친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평탄한 길도 잠시, 이내 울퉁불퉁한 거친 바윗길이 이어진다. 숲에 가려진 산길의 생김새는 숲속에 들어서야 알 수 있듯이, 사람 사이에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한동안 이어진 오르막길은 커다란 소나무 뒤로 얼굴을 내민 정자, 관풍정(觀風亭)에 이르러 숨을 고른다. 이곳이 오늘 산행에서 만난 아홉 번째 봉우리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땀과 뜨겁게 달구어진 몸을 관풍정의 바람 그늘에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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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오는 정겨운 새소리, 다른 한쪽에서는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이 희비를 엇갈리게 한다. 도시의 소음을 따라 바라본 대전시 서구는 계룡산의 기운에 포근하게 안겨 있다.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회색빛 건물이 외려 정겹게 느껴진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노루벌의 아름다운 풍경이 종종 마음속에 들어온 까닭이 아닐까 한다.관풍정에서 비재로 돌아와 능선길을 마다하고, 구봉정을 오르는 철제 계단이 있는 둘레길로 접어든다. 금방이라도 한 움큼 쥐면 짙푸른 물이 줄줄 쏟아 내릴 것 같은 울울창창한 숲속을 거닌다.8부 능선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은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하며 이어진다. 도시의 소음은 녹음 덕택에 줄어들고, 더위에 지쳐가는 몸은 외려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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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 그린공원 갈림길을 지나 구봉정 방향으로 발길을 계속 이어가다가, 구봉정 갈림길에서 철제 계단을 오르는 구봉정길로 배턴을 잇는다. 널찍한 바위에 앉아 하늘을 가린 푸른 숲을 보니 참나무가 앞서 자린 참나무의 나뭇가지를 피해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이른바 수관기피로 나뭇가지들끼리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현상이다. 저 나무들처럼 우리네 삶도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울까. 다시 길은 암봉의 뿌리 옆으로 발걸음을 이끌며 직벽을 이룬 거대한 암봉과 마주한다.둘레길에서 간간이 만난 암벽은 지루함을 달래주고, 돌길을 지날 때는 쌍둥이 돌탑이 반갑게 맞아준다. 구봉정 철제 계단을 지나, 성애원 갈림길에서 한천약수터 방향으로 뜨겁게 달궈진 너덜겅 지대를 걷는다.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몸을 불태운다.푸르른 그늘이 그리운 순간, 구봉산 능선 이정표를 만나면서부터 햇볕은 피했지만,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철제 계단이 대신한다. 계단 중간쯤에 만난 한천약수터 이정표부터 주차장까지는 시원한 숲길이 이어진다.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는 새소리가 수고했다고 위로하니 몸도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