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기석이 즐비한 수석전시장[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괴산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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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왕봉(九王峰, 해발 879m)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희양산과 함께 동서로 나란히 위치한 바위산이다.879년(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인 지선이 큰 연못을 메워서 봉암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못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의 신통력으로 용을 구룡봉으로 쫓아내었는데, 그 봉우리가 지금의 구왕봉이라고 한다.이 산의 특징은 구왕봉 고스락에서 은티마을 쪽으로 뻗은 대단애와 색깔이 곱고 다양한 지름티재의 가을 단풍이며, 급경사와 암릉이 많아 난코스에 속한다.이번 산행은 ‘은티마을주차장~산행입구~호리골재~마당바위~구왕봉 고스락~지름티재~산행입구~은티마을주차장’의 원점회귀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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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티마을주차장 한쪽 편에 세워진 정자 옆에 있는 시루봉‧희양산‧구왕봉‧악휘봉 등산안내도를 살펴보고 은티마을로 향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온 노송과 장승, 은티마을 유래비, 그리고 동고제(洞告祭)를 지내는 제단을 지나는 포장길을 걷는다.이어 개울 다리를 지나 세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하면 다시 세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경사가 완만한 길을 이동한다. 이어 만나는 은티펜션 푯말이 있는 세거리에서 왼쪽 길로 간다.밭 사이로 난 포장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새 희양산과 구왕봉 세거리인 산행입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지름티재·희양산(3.6㎞)」 방향이고, 우측으로 가면 「호리골재·구왕봉(3.0㎞)」방향이다.호리골재 방향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이 포근하게 안아주고, 산책길은 평탄하게 이어져 발걸음이 편안하다. 명상하기 좋은 산책길로 손색이 없고, 울긋불긋한 단풍은 마음속 깊이 잠들었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런가 하면 산책 길가에 마련된 텅 빈 바위의자가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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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걷기 명상을 하다 보면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를 만나면서 좁은 숲길로 이어진다. 이곳부터 호리골재까지는 오르막 산길이다.돌길을 지나서 정글과 같은 숲속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을 오른다. 비바람의 횡포에 견디지 못해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쓰러진 나무가 만든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그 나무에서 다시 생명의 줄기를 이어가는 인연의 소중함도 만난다.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마치 무명에서 벗어나 광명을 받듯이 능선 너머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받는다.능선에 올라서면 호리골재이다. 이곳에서 ‘구왕봉(1.6㎞)‧악휘봉(3.0㎞)‧은티마을(3.8㎞)’갈림길의 이정표를 만나 구왕봉으로 방향을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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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길은 소나무와 참나무, 애목과 노목이 서로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서로 의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산의 모습을 만든다. 자연의 섭리에서 밝은 지혜를 얻는다.이 산이 바위산이라고 입증이라도 하듯 산길 주변으로 커다란 바위와 기암들이 자주 시선을 이끈다. 봉우리에 도착하여 나뭇잎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구왕봉을 조망한다.봉우리에서 하산하는 산길은 암릉이다. 나무에 붙어 자라는 모양의 버섯바위와 성벽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바위를 지나고, 인자한 산객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석문을 지나간다.돌무더기처럼 쌓아 올린 석탑 등 갖가지 기암을 거쳐 안부에 이른다. 이어 다시 두 번째 봉우리를 향해 돌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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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오르면서 필자가 임의로 이름 붙인 바위를 언급하자면, 불알, 투구, 복돼지를 비롯해 은티마을 바라보며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호랑이바위 등이 있다. 이 등산길은 그야말로 기암괴석의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한다.참나무 숲속의 암릉 길을 비스듬히 파고드는 가을 햇살이 자연의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오르는 산길 옆으로 누군가 일부러 슬쩍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암반들이 곳곳에 즐비하다.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째 봉우리에 도착한다. 곧이어 하산을 해야 하는데 소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소나무에게 곡주 대신에 물 한잔으로 양해를 구하고 바위 틈새를 통과한다.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필자가 임의로 명명한 병풍, 도마뱀바위를 지나 잠시 하행했다가 다시 산길을 올라 세 번째 봉우리에 도착한다. 이곳은 너른 암반이 펼쳐있는 형상으로 보아 마당바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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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봉우리에서 잠깐 하행한 후 네 번째 봉우리를 향해 산길을 오른다. 고스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장승바위를 지나서 암릉을 오른다.이어 참나무 숲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구왕봉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암반이어서 수목이 없다. 그래서 잃음이 있으면 얻음이 있고, 얻음이 있으면 잃음이 있다고 하는가 보다.이곳에서 마분봉과 악휘봉의 산등성과 은티마을 향해 뻗어 내린 약 300m 길이의 대단애(大斷崖)를 조망한다. 그리고 대단애의 끝자락에 자리한 은티마을을 굽어본다.눈 앞에 펼쳐진 풍광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걷다보면 암반으로 이뤄진 네 번째 봉우리에 도착한다. 이후 잠시 하행하고 나서 다시 참나무 숲을 지나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오르면 구왕봉 고스락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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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왕봉 고스락은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없다. 고스락에서 약 십여 미터 정도 하산하면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 이곳에서 기이한 형상의 고사목을 만나고, 희양산 자락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봉암사의 단풍이 가지가지 색상으로 절정에 이룬 모습을 조망한다.밧줄을 잡고 급경사를 하행한 후 마사토의 탐방로를 내려가는데, 세찬 바람에 참나무 낙엽이 꽃비를 내리듯 쏟아져 내린다. 한여름 태풍에도 거뜬하던 나뭇잎이 힘없이 나뒹굴어 휘날리는 모습에서 생사의 무상함을 느낀다.하산하면서 구왕봉을 돌아보니 바위산 그 자체이다. 드디어 두 번째 조망점에 이르니, 중압감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희양산이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온통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하얀 속살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구왕봉은 자신보다는 희양산을 조망하기 위하여 태어난 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양산을 자세히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산이다. 이렇듯 우리네도 남을 잘 보고 잘 아는 것보다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게 더 어려운 까닭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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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가파른 세미클라이밍 지대를 하행한다. 밧줄을 붙잡고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조심해서 안전하게 하산한다.소나무 뿌리의 도움이 있어 하산이 좀 더 수월해지고, 암벽 하산까지 마치니 안전산행을 축하라도 하는 듯 절정에 오른 알록달록한 단풍이 흐느적대며 반긴다.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소나무와 바위의 신비한 단짝 현상을 만난다. 소나무가 앉은 바위인지, 바위를 챙긴 소나무인지? 무엇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런 기이한 모습을 어느 산에서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희유한 일이다.기쁜 마음으로 충만하고 즐거움이 가득할 즈음에 산불감시 초소를 지나 지름티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곧바로 직진하면 희양산(1.5㎞)이고, 좌측으로 하산하면 은티마을(3.0㎞)이다. 구왕봉까지는 0.5㎞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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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티재에서 은티마을을 향해 완만한 돌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오후 햇살을 받아 맑고 선명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화사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한다.하산하는 동안 산 그림자로 인해 좀처럼 투명하고 맑은 느낌의 단풍을 볼 수는 없지만, 단풍의 색깔이 곱고 색도 가지가지여서 풍부한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손색이 없다.저녁 햇살이 드는 곳을 지나자 울긋불긋한 갖가지 고운 색으로 치장한 풍요로운 단풍이 몸과 마음을 물들인다. 가을 산행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하다.잔잔한 조릿대의 물결 위로 알록달록한 단풍이 구름을 이루고, 온통 세상을 황금색으로 치장한 보물창고를 맛보며 하행하면서 돌길 위로 드문드문 출현한 바위들과 눈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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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한 돌길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화사한 가을 단풍의 시간 여행을 계속한다. 얼마나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는지 배터리가 다 닳아버렸다.하행하는 내내 가을 풍경의 정취에 심취한 채 긴 의자가 설치된 쉼터와 얼굴바위를 지난다. 이어 희양산 성터와 지름티재 합류점을 지난다.다시 쉼터를 지나 희양폭포와 지름티재 합류점을 지나서 등산로입구에 이른다. 하행 구간 내내 자연과 동화되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나답게 즐기는 행복을 누린다.등산로입구에서 깊은 가을 들녘의 배웅을 받으며 완만한 경사의 포장길을 걸어 은티마을주차장으로 돌아와 총 8.7㎞의 가을 단풍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