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과 자민련, 충청정당 ‘흥망성쇠’…공화당→자민련→선진당→‘DJP공동정권’
  • ▲ 지난 23일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페이스북 김 전 총리 페이지 캡쳐
    ▲ 지난 23일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페이스북 김 전 총리 페이지 캡쳐

    충청도가 낳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손꼽혔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타계(他界)하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에 그가 남긴 큰 족적에 대해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충남 부여가 고향으로 1988년 13대 총선 당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충청권의 맹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공화당에 이어 15대 총선을 앞두고 지금까지 세인들의 머릿속에 충청권 대표정당으로 각인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의 타계를 계기로 충청도의 이익수호를 표방하고 보수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던 정당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명멸(明滅)해 간 충청권 정당들의 발자취를 낱낱이 살펴본다.

    충청정당의 시초는 13대 총선 때 충남에서 ‘바람’을 일으킨 공화당이었다.

    김 전 총리는 1987년 12월에 치러진 13대 대선을 목전에 두고 그해 10월 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는 대선에서 8.1%의 득표율로 4위에 그쳤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충남을 발판으로 국회 내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공화당은 △서울 3석(42석) △경기 6석(28석) △충남 13석(18석) △충북 2석(9석) △강원 1석(14석) △경북 2석(21석) △전국구 8석 등 총 35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충남에서 대전 동구갑·동구을·중구·서구 등 대전 4곳의 선거구를 모두 휩쓰는 기염을 토했고 김 전 총리는 부여에 출마해 무려 81.8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충북에서는 청주을, 충주시·중원군 2곳에 공화당 깃발이 꽂혔다.

    공화당이 온전한 충청권 정당은 아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충남에서는 크게 이겼지만 충북에서는 9곳 가운데 불과 2곳에서 당선인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충청권 정당은 13대 국회에서부터 캐스팅보트를 맡았다. 원내 재적 299석 가운데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등을 각각 획득한 데 따른 것이다. 즉 민정당도, 평민당과 민주당이 합쳐도 과반수를 넘지 못함에 따라 공화당이 자연스레 국회 표결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공화당은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간판을 내린다.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이 힘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1992년 14대 총선 때 충청권을 기반으로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은 없었다.

    충청권 전역에 이른바 ‘녹색바람’을 불러 일으킨 자민련은 1회 지방선거와 15대 총선을 거치며 충청정당으로 자리매김 했다.

    자민련은 김 전 총리가 민자당에서 사실상 축출된 뒤 ‘충청도 핫바지론’을 앞세워 1995년 창당한 정당으로 1995년 6월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부터 ‘힘’을 발휘했다.

    자민련은 당시 대전, 충남, 충북 광역자치단체장 선거를 모두 쓸어 담았고 나아가 강원지사 선거까지 석권했다. ‘충청도 핫바지론’이 국토의 중원인 대전·충남·충북·강원 등 4곳에서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자민련의 ‘열풍’은 다음해 15대 총선에서도 이어졌다. 대전 7석(7석) 충남 12석(13석) 충북 5석(8석) 등이 자민련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대구에서도 13석 가운데 8석을 승리하는 등 충청권 정당 역사상 최대 의석수를 기록했다.

    자민련은 지역구 41석에다가 전국구 9석을 더해 총 50석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1997년 12월 대선 전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내각제 개헌을 연결고리로 ‘맞손’을 잡는다. 이른바 ‘DJP연합(김대중+김종필)’으로 대선을 치른 것이다.

    ‘DJP연합’은 대성공이었다. 김 후보는 충청권을 등에 업고 4수 끝에 대권을 쟁취했다. 김 후보는 충청권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39만표 차이로 이겼고 전국 득표수 격차 역시 김 후보가 이 후보를 39만표로 제쳤다.

    김 후보는 앞서 3번의 대선도전에서 단 한차례도 충청권에서 1위에 오른 적이 없었다. 결국 충청표심이 김 후보의 청와대행(行)에 결정적 지원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자민련은 1998년 DJP공동정권이 출범하면서 국정운영의 절반을 맡았고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에 이어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총리에 또 다시 올랐다.

    자민련은 1998년 6월 2회 지방선거에서도 대전·충남·충북 등  3곳은 물론 인천까지 4곳의 광역단체장을 배출했다. 지방선거에서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공동정권 답게 ‘연합공천’으로 표심의 선택을 받았다.

    1회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16대 총선 전인 2000년 4월까지 자민련이 ‘승승장구’ 했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1999년 DJP공동정권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등을 두고 현격한 시각차를 나타내면서 점차 사이가 벌어졌고 자민련은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연합공천이 아닌 단독공천으로 승부수를 띄웠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대전 3석(석) △충남 6석(11석) △충북 2석(7석) 등 지역구 12석, 비례대표 5석을 얻어 총 17석에 그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자민련의 토양인 충청권에서 조차 입지가 흔들린 것이다.

    DJP공동정권은 2001년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이 자민련의 합세로 통과하자 마침내 붕괴됐다.

    자민련은 독자적으로 2002년 3회 지방선거에 임하며 세(勢)불리기에 나섰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충청권에서 충남지사 선거에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3회 지방선거는 충청표심이 정치적으로 자민련에 등을 진 ‘변곡점’이란 풀이가 많다.

    자민련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대참패를 기록하며 정당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민련은 전국에서 충남 10석 가운데 4석만을 건졌다. 김 전 총리는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해 10선 금배지를 노렸으나 정당득표율 저조로 인해 낙선하는 수모를 겪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자민련 이후 국민중심당 등의 충청권 정당이 창당됐으나 정치권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2008년 4월 18대 총선을 앞두고 충남 예산 출신의 이회창 전 총리가 주도해 자유선진당이 만들어졌다.

    선진당은 국민중심당과 세를 합쳐 총선 2개월 전에 창당됐다. △대전 5석(6석) △충남 8석(10석) 등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을 합쳐 총 18석을 획득했다. 충북에서는 이용희 후보만이 보은·옥천·영동에서 선진당 공천장으로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선전했다는 시각도 있으나 마이너 충청정당이 출범한 것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나왔다.

    선진당은 19대 총선에서 충남에서만 3석을 건지고 비례대표 2석을 얻어 총 5석을 획득하고 사실상 무너졌다.

    충청정당은 13대 총선이후 14대와 20대에서만 없었을 뿐 각종 선거 때마다 존재했으나 2016년 20대 총선과 올해 7회 지방선거에서는 출현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호남권을, 자유한국당이 영남권을 각각 배경으로 정치권의 양대축으로 성장하고 해당 지역의 발전을 도모했다며 충청권 정당의 출현을 기대하는 시각을 나타낸다.

    충청권 시각으로 지역현안을 다룰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각 권역에서 돌아가며 수장을 맡을 수 있는  ‘내각제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 전 총리는 대표적인 내각제 개헌론자로 불렸다.

    앞으로 어떤 세력이, 어떤 명분과 형태로 충청정당을 또 다시 판 위에 올려 놓을지 주목된다. 문재인 정부 등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는 개헌안에 내각제의 포함 여부도 지켜 볼 대목이다. 

    한편 김 전 총리 측은 27일 오전 8시 빈소인 서울아산병원에서 영결식을 하고 9시에 발인할 계획이다. 김 전 총리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장지를 부여 가족묘원에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