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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광주~나주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며 빚어진 한일 학생 간 충돌사건에 대해 일본경찰의 편파적인 조사에 항거하는 광주고보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가두시위를 벌인지 87년의 시간이 흘렀다.
광주고보가 일어서자 인근 학교와 시민들까지 합세하며 대규모 시민운동으로 확산됐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신간회가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됐다.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일제치하에서 항일 학생 운동의 도화선이 된 광주고보의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이날은 전에 학생의 날로 불리다가 2006년부터 지금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광주고보로부터 촉발된 학생 운동은 1960년 4·19학생혁명,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3선 개헌 반대운동, 유신철폐 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1987년 6월 항쟁으로 까지 이어져 왔다.
앞서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며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도 학생운동의 큰 맥락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잠재된 저항의식이 어느 곳에서 촉발되고 분출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이처럼 일제치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는 늘 학생과 청년이 있었고 그들의 움직임이 시대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1987년 6월 항쟁이후 군부종식과 함께 개정된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근간으로 한 9차 헌법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근래 들어 개헌 논의가 사회 안팎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최근 이 개헌론에 ‘최순실’이 쐐기를 박았다. 밥그릇의 크기를 재기 시작한 정치인들은 우왕좌왕하고 행정조직은 김영란법과 더불어 아주 낮은 자세로 엎드려 ‘절대자리’를 부지하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어이 다시 학생들이 일어섰다. 백만 청년 백수시대의 어두운 현실 앞에서 숨죽여 발버둥 치다가 비로소 깨어나 그 틀을 깨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어느 때라고 명확한 출발신호를 주지 않아도 핏속에 흐르는 유전자가 먼저 꿈틀거리고 연필 쥔 손가락이 미적분을 풀다가 저절로 웅켜쥔 채 내 한 몸보다 가족과 사회,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어섰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다시 87년 전의 정의와 울분이 섞인 젊은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충북대를 비롯한 지역의 대학생들은 이날을 전후해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며 불확실한 국정운영과 비정상적인 정권을 규탄했다.
청년 학생들이 일어서자 시민들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바야흐로 시대의 변화를 요구하는 거대한 산맥같은 움직임이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다.
이날 충북도교육청은 학생문화교육원에서 기념식을 열고 태극기를 흔들며 선배들의 뜻을 기렸다.
김병우 교육감은 “광주고보 학생들은 모순된 현실을 통렬히 깨닫고 있었으며 정의와 양심, 구국의 정신이 뚜렷한 가운데 청년 지식인의 소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과감히 항일운동에 몸담았다”며 “불의와 폭력을 용기 있게 거부할 수 있는 학생이 되기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시대를 바꾸는 힘은 깨어있는 청년·학생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