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박은용 명예회장, 50년간 봉제업 ‘한우물 파’“‘스카이빙 기술’ 세계 최고… 착용감 개선‧공기 저항 줄여”“모터바이크族 감소하지만, 또 다른 분야의 일 있다” “소가 있는 한 가죽이 있고 가죽이 있는 한 무엇인가 만들어야”“인간이 사는 한 옷은 필수…지구 멸망 전까지 옷은 필요”
  •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 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이길표 기자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 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이길표 기자
    “둥둥둥….” 모터사이클의 강력한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저음의 배기음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할리 데이비드슨‧혼다 등 모터사이클에 헬멧을 쓴 모터바이크 족은 가죽점퍼 등 멋진 옷을 입고 바람을 가르며 자유를 향해 질주한다. 강렬한 속도감과 독특한 스타일은 라이더만의 자유다. 

    모터사이클 레이서(Motor-Cycle Pacer)들이 가장 입고 싶어 하는 가죽의류는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韓一, 대표이사 박완홍, 대전시 중구 어덕마을로 1-18)이 만든다. 이 회사가 만드는 옷은 모터사이클 레이서와 모타바이크 족(族)의 가죽 슈트, 가죽의류, 텍스타일 의류 등 여러 종류를 만든다. 가격도 수백불에서 수천불을 호가한다. 세계적인 가죽의류를 만드는 회사가 대전광역시에 있다고 하면 더 놀란다. 

    1974년 창업(한일산업사) 이후 피혁‧섬유 의류의 외길을 걸어온 박은용 한일 명예회장(82)은 가볍고 세련된 가죽의류제품은 글로벌 바이어와 모터바이크 족들로부터 세계 최고의 품질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 회사는 미국과 유럽, 일본, 캐나다 등으로 전량 수출한다. 

    박 명예회장은 현재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장남(박완홍 대표이사)에게 회사를 물려줬지만, 평생을 봉제업(가죽의류)에 헌신했다. 한일 대전 본사에는 사무직원만 있고 가죽 의류를 만들지 않는다.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이 회사도 중국과 베트남에 공장을 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외화가 크게 부족한 박정희 정권은 수출드라이브를 건다. 당시 한일은 레이서와 모터바이크족 가죽의류를 만들어 대박이 났다. 당시 언론이 대전의 작은 기업 한일이 100만불 수출탑, 300만불 수출탑, 500만불 수출탑, 1천만불(1993년) 수출탑, 2천만불 수출탑(2004)을 받자 인터뷰가 쇄도했다.

    ◇대전 봉제 업체에 취업한 것이 50년간 가죽의류 ‘한 우물만 파’ 

    “충북 영동에서 막내로 태어난 박 회장은 아버지가 한약방을 해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군대에 갔다가 오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님은 재산을 불리려다가 실패했다. 막상 취직을 하려고 하니 갈 곳이 없었다. 매형에게 부탁해 대전에 아는 점포(봉제)에 취직했고, 꾀 안 부리고 열심히 일하니 오너들이 나를 잘 봤다. 의자공장을 인수해 운영을 맡겼고, 공교롭게도 1년도 안 돼 대전지역 공장 30개가 모두 부도가 났다.” 
  •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길표 기자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길표 기자
    그는 생존하기 위해 조그마한 건물 2층에서 봉제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야구장갑을 꿰매’는 하청 일을 했지만, 회사가 너무 어려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1985년 여름, 서울에 있는 한 분이 서울의 미쓰이(三井)라는 일본 회사에 가면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언질을 줬다. 그러나 미쓰이와 연결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성에 미싱 기술자를 홍인장 커피숍에서 면접을 마치고 일어서는 데 미쓰이 버스가 주차장에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버스기사에게 물었더니 직원들이 동학사 워크숍에 갔다가 유성에 온천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목욕을 하며 제일 점잖은 분을 보고 등을 밀어주며 말문을 텄고, 마침내 미쓰이에 ‘한 번 오라’는 답변을 얻어냈다. 서울 미쓰이를 찾아가 영업과에서 샘플을 받아 납품해 경영 위기를 넘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쓰이로부터 오다(계약)를 받기 시작했고, 우리 공장 아래층에 270명을 모집해서 공장을 제대로 돌려 미국‧일본‧유럽‧아시아 등에 수출했다. 결국, 인건비가 높아지면서 중국으로 갔고, 지금은 베트남까지 진출했다. 2023년 매출액(2024 6월 결산)은 130억원으로,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매출은 작지만, 모터바이크족 가족 의류만큼은 국내보단 전 세계 업계가 더 알아준다.”

    ◇혼다‧효도‧가도야 납품…유럽 40%·일본 시장 ‘80% 점유율’
     
    “무역협회가 아니었다면 오늘은 없었다. 수출이라는 말로 잘 몰랐고, 외국어는 더더욱 할 줄 몰랐다. 하청 일만 했기 때문에 바이어를 만난다는 것은 꿈꿔본 적도 없었다. 일본에 가죽의류를 수출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그런데 외국어 배우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전 일본어 학원 새벽반에 등록한 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8년 일본 바이어가 우리 회사에 와서 일본말로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다는 거야. 무역협회의 통역 지원으로 어렵사리 1차 거래가 성사됐다. 이번엔 일본에서 한번 들어오라고 했다. 겁이 덜컹 났다. 혼다 측은 샘플을 하나 내놓고서 견적을 당장 뽑으라고 했다. 하도급만 했으니 견적을 뽑아본 적도 없고, 자재를 구매해봤어야지, 난감했다. 일본 혼다 직원들이 ‘여기 왜 왔어’하는 표정으로 마치 원숭이처럼 쳐다봤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혼다 부장 간다는 ‘아 이 사람은 때가 안 묻었다’며 좀 다르게 본 것이다. 내가 난감해하자 혼다가 거래했던 업체의 샘플을 하나 던져 주고 가죽은 몇 평 등 거꾸로 자기들이 원자재를 모아서 주는 거야. 마침내 무려 2300세트를 주문받아 가죽 의류를 공급했는데 엄청나게 이익이 남았다. 간다 부장에게 어마어마하게 돈이 남는다고 했더니, 앞으로 클레임 등 어려운 일이 많으니 그 돈 함부로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박 회장은 “가죽 의류 몇백 장 만들던 조그마한 회사가 성실하게 혼다(Honda), 효도(Hyod), 가도야(Kadoya)와 거래를 하자 여기저기 업체를 소개해주니 수출 100만달러, 300만달러가 곧바로 달성됐다. 유럽 40%, 일본에 가죽 의류가 80% 점유했을 정도로 그야말로 급성장했다. 대전에 조그만 회사가 어떤 회사인가 싶어서 KBS 등 언론사가 인터뷰할 정도로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00만달러 수출탑을 받자 이제는 유럽에서 바이어들이 일본에 수출하는 기업이 어딘가 하고 대전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바이어를 찾아서 영업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이어들이 대전으로 찾아왔어. 그렇게 거래를 하다 보니까 유럽까지 진출하지 얼마 안 돼 1천만달러 수출탑을 받는 등 우리 제품이 대단히 호평을 받았다”고 전했다.
  •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 가죽의류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이길표 기자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이 가죽의류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이길표 기자
    ◇중국‧베트남에 공장…현지 생산 가죽의류 ‘전량 수출’

    한일은 과거 대전에 숙련공 위주의 가죽 의류를 만들었으나 한 때 1500명까지 일했던 중국은 지금은 600여 명이 근무하고 있고, 베트남은 800여 명이 제품을 만들고 있다. 

    한일이 가죽의류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결국,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옷을 만든 결과의 산물이다. 

    “가죽 의류를 만드는 일은 꼼꼼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본인이 노하우를 밤낮없이 연구해 터득해서 해야 한다. 우리 기술자의 숙련도가 높았지만, 일본 유명회사들이 기술자가 빠져나가자 최신 기술을 우리 회사에 이전해줘 기술과 숙련도가 세계 최고가 됐다. 일본 업체는 우리 회사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거꾸로 일본 전역에 판매했다. 우리 회사의 패턴사(디자이너), 봉제사들은 아주 베테랑이었는데 여기에 일본 기술을 접목하니 옷이 다른 데보다 품질이 좋고 다르니까 유럽에서도 한일 제품을 굉장히 선호했고 날게 돋친 듯 팔려나갔다.”

    “봉제기술은 손재주가 좋아야 하는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옷을 만들어서 뒤집어 보면 굉장히 지저분했다. 우리는 옷 안감을 여기저기 조정을 하고 가위질해서 라이더가 입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아주 편하게 만들었다. 가죽 한 장의 두께가 3~4㎜인데, 3겹을 덧대면 아주 두껍다. 한일의 ‘스카이빙’은 가죽을 얇게 깎아내는 기술은 일본 업체로부터 배운 것이다. 우리 기술자들은 정말 잘 만들었다. 이음매를 스카이빙으로 얇게 깎아 착용감을 개선하고, 공기 저항을 줄였고, 4겹의 이음매의 두께도 5㎜ 이하로 유지했다. 옷을 입어도 둔탁하지 않게끔 만들어 타 회사제품과 비교했을 때 느낌이 전혀 달랐다.” 

    ◇무릎 부위 강화플라스틱 보호대 넣어 ‘제작’

    박 회장은 “또, 모터바이크 족이 제일 중요한 것은 오토바이를 탈 때 무릎 아래가 코너링과 동시에 지면과 스치니 그 부분을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가죽의류의 특성상 두껍고 질긴 소가죽을 튼튼하게 바느질해 이은 뒤 사지(四肢)의 관절과 등 부위에 강화플라스틱으로 된 보호대를 집어넣어 만들었다. 1980년 이전에는 일본이 이 분야에 선두였지만, 지금은 한일이 세계 최고 기업이다. 일본이 개발하고 우리 회사의 숙련된 기술자가 특별하게 만들어 옷을 보냈더니 호평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타 업체가 만든 가죽 의류는 속을 뒤집어 보면 굉장히 지저분했지만, 한일의 의류는 안쪽을 깔끔하게 정리해 뒤집어 입어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제품을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 우리 제품은 라이더가 입어보면 아주 편하게 만든 것이 주효했다. 이것이 한일만의 기술이자 핵심역량으로 남이 쉽게 베낄 수 없어서 오늘날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회사 성장 배경을 설명했다.

    이런 배경에는 한일 기술자들이 오랜 경력과 경험이 많다 보니 스스로 연구개발을 했고, 아이디어를 접목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한일의 기술자들에게 외국 사람들과 다리를 놔줘서 봉제기술을 배우고 발전하도록 조력했다. 1980년대 한일의 초창기 스카이빙 기술로 세계 명성을 날렸던 16명의 고참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퇴사하고 이젠 중국과 베트남 공장으로 그 기술이 전수됐다.

    “또 하나는 우리와 거래하는 유럽회사 직원들이 퇴근하면 자정이다. 나는 그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는 박 회장은 “바이어들이 급한 일로 전국의 경쟁업체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통화할 수 있는 회사가 한일밖에 없었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했다. 일요일에는 바이어 수주, 납품 일정 등을 정리하고 확인하고 맞춰보는 등 당일 처리를 원칙으로 한 것이 우리 회사의 최대 장점이자 강력한 경쟁력이었다”고 했다. 

    그는 바이어가 오면 김포공항까지 가서 대전으로 데려와야 직성이 풀렸다. 박 회장은 “바이어를 공장 생산현장을 투어한 뒤 정성을 다해 가족처럼 열심히 모셨더니 일도 술술 풀렸다. 회사 한 간부가 바이어를 이렇게 융숭하게 접대하면 물건납품비에 접대비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귀띔했지만, 가족 이상으로 정성을 다해 극진히 바이어를 챙겼다. 내가 외국에 가면 역시 그들도 나를 가족 이상으로 반갑게 환대했고 내가 하던 방식 이상으로 되 갚았다. 이런 인연으로 여럿 바이어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끈끈하다”며 바이어 이상의 관계 유지하는 비법을 소개했다. 
  •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우)이 김용석 총무부장과 함께 2천만불 수출탑을 들어보이고 있다.ⓒ이길표 기자
    ▲ 가죽의류 글로벌 강소기업 ㈜한일 박은용 명예회장(우)이 김용석 총무부장과 함께 2천만불 수출탑을 들어보이고 있다.ⓒ이길표 기자
    ◇“50년간 한 우물 파기를 잘했고 다시 사업한다면 ‘이 길’ 갈 것”

    박 회장은 “한일을 창립해 50년간 한 우물을 파기를 잘했고 다시 사업을 한다고 해도 이 길을 가겠다”고 했다. 

    “평생 16가지의 일을 했다”는 그는 “봉제업은 그중에 가장 어렵고 난이도가 있지만, 희로애락으로 보면 이 일밖에 할 게 없더라. 과거 함께 사업을 했던 분들이 공항에서 만나면 ‘아직도 봉제’를 하느냐고 묻는다. 전국적으로 봐도 내가 가장 오래됐고, 남들이 볼 때 우습고 4차산업이지만, 끝까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그는 10년 전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월 1~2차례 사무실에 나와 자문을 한다. 

    “앞으로 봉제업은 사양산업이지만, 지금은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하므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일을 더 할 수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소가 있는 이상 가죽이 있고, 가죽이 있는 이상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모터바이크 족은 가죽이 100% 필요하고 선진국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자꾸 줄지만, 젊은이들이 또 다른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 할 것 아니냐. 그러면 거기에 맞춰서 연구개발을 하면 할 일이 또 생긴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옷이 필수이고, 옷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항상 필요하다. 새로운 천이 생기면 또 발전해서 봉제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없어지면 또 다른 것을 찾고 개발하면 된다. 사양산업이 아니라 연구개발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분야로의 창출이 가능하다.”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본부 홍정완 팀장은 “대전에 있는 작은 피혁업체에서 전 세계 모터사이클 레이서들의 상당수가 애용하는 모터사이클 슈트 전문업체로 발돋움한 한일은 충청지역 대표적인 글로벌 히든챔피언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홍 팀장은 “창업주인 박은용 ㈜한일 명예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열(熱)과 정(情)으로 피혁제품 한 우물만 판 기업인으로  일본의 효도(Hyodo), 카도야(Kadoya), 독일의 폴로(Polo) 등 유수의 글로벌 모터사이클 업체를 주요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사양산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한일의 제품과 기술력이 전 세계에 확대돼 대한민국 브랜드 가치도 한층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봉제업계 ‘작은 거인’ 박은용 회장은 누구?

    50년간 봉제업을 한 박은용 회장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봉제 업체에서 일을 시작해 1965년 애국흑판 입사, 상무이사까지 승진하는 등 9년간 재직하다 퇴사했다. 이어 1974년 한일산업 설립, 1994년 중국 웨이팡한일피혁복장유한공사 설립, ㈜향우자동차운전전문학원 인수, 2004년 ㈜한일 회장 취임했다.

    수상 실적으로는 1990년 수출의날 대통령 표창, 1997년 수출의날 동탑산업훈장, 2007년 이달의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 선정, 2010년 대전시 경제과학대상(수출부문) 받았다. 

    무역협회와 관련해서는 대전충남무역상사협의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비상근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기업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2012년에 세운 대전무역회관 건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는 대전무역회관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박 회장은 대전무역협회의 산증인이자 원로로서 회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 ▲ ㈜한일의 베트남 공장 생산 현장.ⓒ㈜한일
    ▲ ㈜한일의 베트남 공장 생산 현장.ⓒ㈜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