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이 점점 다가오는 느낌[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괴산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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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산(君子山, 948m)은 괴산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갈은구곡과 쌍곡구곡 사이에 우뚝 솟은 듬직한 산세로 속리산 국립공원의 북쪽 담당하고 있다.쌍곡계곡 제2곡인 소금강에서 쌍곡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약 300m 계곡 안으로 더 이동하면 좌측으로 군자산 탐방로입구의 비포장 주차장(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 도착한다.군자산탐방로 출입구를 지나자마자 완만한 계단이 시작된다. 잔잔하게 내려앉은 안개와 함께 가지가지 색깔로 물들기 시작한 풀잎과 나뭇잎들이 환상적인 가을 풍경화를 그린다.계단이 끝나고 거친 돌길이 이어지면서 산행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산의 고도가 높아지고 해도 함께 중천으로 높아지면서 뿜어내는 강한 빛줄기가 안개 속을 투과하여 비치니 꿈속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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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초반부터 가파른 산길은 심장을 널뛰게 한다. 첫 번째 조망바위를 만나 호흡을 가다듬고, 운무에 숨어버린 쌍곡계곡을 따라 형성된 쌍곡로와 그 너머로 괴산 명산들을 찾아본다.마음이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온갖 잡념을 여의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신선이 돼 본다. 이런 평화로운 마음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는 이유다. 더욱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산행은 그 속에서 나를 찾는 시간이어서 좋다.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길이 잠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가파르고 거친 돌길로 모습을 바꾼다. 산행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점점 고도를 높인다.산행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소금강 하단부를 바라보니 선계(仙界)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다. 산속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대자연의 신비를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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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산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하자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제 가을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온다. 한참을 오른 것 같은데 이정표는 주차장에서 겨우 1.1㎞ 이동했다고 알린다.이곳에서 군자산 고스락까지는 1.4㎞ 더 올라야 한다. 거칠고 험한 돌부리에 차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걷고, 가파른 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한발 한발 산길을 딛는다.군자산을 오르면서 소금강 풍경과 함께하니 산행이 지루할 틈이 없다. 산을 오르다가 소금강의 중단부를 바라보니, 하얀 바위를 덮고 있는 청록의 도화지 위로 울긋불긋한 물감을 흩어지게 뿌린 모습이다.멋진 풍광은 힘들고 고된 산행에서 엔도르핀이 온몸으로 퍼지게 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 경치는 피로에 지친 산객에겐 감로수와 같고, 삶이 버거운 산객들에겐 대리 짐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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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흐르던 산길에 느닷없이 분주한 발걸음 소리와 가뿐 숨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산악회 선발 산객이 빠른 걸음으로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다.고되고 힘든 참에 잘 되었다 싶어 얼른 길을 피해 주며 그 덕에 쉬어간다. 가던 길을 재촉해 오르니 꿈길같이 환상적인 숲속에 서 있는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군자산(1.1㎞)과 소금강(1.4㎞) 갈림길 능선에 도착해 군자산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제부터 산행 중간중간에 짙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만나는 빈도가 잦아든다.군자산 고스락을 앞두고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자락에 이르러 저 멀리 보배산과 칠보산이 나지막하게 보인다. 그만큼 이곳까지 제법 높은 고도를 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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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소금강 산줄기를 바라보니, 비단에 자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도가 더 높은 군자산 꼭대기의 단풍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군자산 고스락은 고분고분하게 자신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듯 가파른 경사로 산행을 더디게 한다. 그럴수록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는 발길은 고스락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가파른 길을 숨 가쁘게 오르다 위를 쳐다보니 하얀 도화지에 색상 물감에 담근 붓을 그은 듯 노랗고 불그스레한 단풍이 어서 오란 듯이 너풀댄다. 산객들도 이에 응답하듯 서둘러 하나둘 서둘러 그들 곁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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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높아지면서 절정을 이룬 단풍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주변 바위들과 잘 어우러진 단풍 빛깔이 그야말로 치유의 원천이다. 덩달아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지는 듯하다.군자산의 단풍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울퉁불퉁한 바윗길과 모나지 않은 조화가 일품이다. 그런가 하면 멀리 너울대는 산줄기를 배경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시선을 끄는 처세의 매력도 있다.가을 단풍의 세계로 여행은 계속된다. 이 풍광이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속에는 순수하거나 추함이 있기에 그러할 것 같다.이처럼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하고 대립하면서 통일되는 관계로 존재한다. 예컨대 젊음이 있으면 늙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청춘도 세월이 흐르면 주름 가득한 쭈글쭈글해진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하니 청춘이다 늙은이다 구별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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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길을 훌쩍 타고 올라 넘고서 단풍 숲길을 빠져나오면, 깎아지른 기암이 앞을 가로막는다. 막는다고 산행은 그치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장애물을 우회해 오른다.산비탈로 들어서자 참나무에 분출되는 노란 색깔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 기암이 이 절경을 보라고 일부러 이곳으로 안내한 것은 아닐까? 감사할 뿐이다.온갖 시름이나 걱정 다 여의고 이 순간의 단풍 절경을 맘껏 흥겹게 즐겨본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무리 청록을 붙들고 싶어도 저절로 붉은색으로 변하는 자연의 순리를 배운다.환희로 가득한 마음으로 막바지 오르막길을 가뿐하게 차고 오르면 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를 지난다. 이 바위가 마치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군자산을 지키는 장승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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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해발 948m의 군자산 고스락에 도착한다. ‘속리산국립공원 군자산’ 고스락 돌 주변은그리 넓지 않고 잔돌들이 널리 깔려 있어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다.산자락이 맞닿아 이룬 쌍곡계곡의 하얀 속살이 실타래처럼 늘어져 있고, 가까이 보배산, 칠보산으로부터 희양산, 악휘봉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맥의 흐름이 고고하다.그리고 남군자산 너머로 대야산, 그 너머로 속리산의 연봉들이 공룡의 등처럼 울퉁불퉁하다. 눈에 들어오는 산마다 일일이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무의미하다.군자산의 위용을 한 몸에 받고,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맘껏 느끼고 도마골로 하행을 시작한다. 고스락 이정표에는 도마골 4.0㎞, 소금강 2.5㎞로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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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노랑과 갈색 옷을 입은 참나무가 이룬 숲속 아래로 가파른 바윗길을 조심해서 내려간다. 그나마 상행 때보다는 덜 가팔라 다행이지만, 내리막길에 흩어진 잔돌이 미끄러워 조심스럽다.군자산 고스락에서 0.6㎞ 내려와서 능선을 걷는데, 해발 800m 정도에 이르니 이젠 참나무 잎이 노랑과 초록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처럼 세월을 느끼는 것도 높이에 따라, 나이에 따라 다르다.입석 바위를 지나고 능선을 따라 한참을 하행하니 벌써 군자산 고스락에서 2.0㎞를 내려와 안부에 닿는다. 이곳에서 도마골까지도 2.0㎞이다.도마골로 하행하는 길은 돌길이어서 걷기가 불편하다. 조망도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군자산 능선뿐이다. 이 코스는 군자의 기품을 갖기 위한 인내를 키우는데 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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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낮아질수록 알록달록했던 나뭇잎은 간데없고 짙은 청록의 숲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움으로 공간을 채운다. 순수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하행한다.돌길과 너덜지대를 걸으니 발바닥 지압 효과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지옥의 가시밭길을 걷는 듯 통증이 더한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이 저절로 사뿐해진다.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 쌍곡로와 닿는 날머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쌍곡로를 따라 2.1㎞를 소금강휴게소 방향으로 이동한다.군자산 탐방로입구 주차장에 도착해 약 10㎞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군자산은 이름처럼 포근한 산이 아니라 이른바 폭군에 가까운 산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