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삶이 계획된 삶보다 더 윤택함을 느껴[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괴산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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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봉(해발 868m)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경계에 솟은 산으로, 백두대간 장성봉(해발 915m)과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산행코스는 제수리재에서 출발하여 3.6㎞ 거리에 위치한 막장봉을 다녀오는 원점회귀이다.산행을 시작하자 나뭇가지에 돋아난 새순이 햇빛을 받아 빼어나게 선명한 연녹색으로 싱그러움을 자아내고, 땅에서 솟아나는 녹색의 생명들이 완연한 봄이 왔음을 아니 벌써 초여름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하다.산길 좌우로 간간이 드러나는 괴석들이 나를 봐달라고 유혹한다.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것 같은 ‘이빨 바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나는 늘 옳은 말만 한다고 했지만 남들은 이빨 빠진 저 바위처럼 뭔가 짜임새가 어긋난 독설가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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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만나는 참나무의 연녹색 새순이 상쾌함을 준다. 싱그러움이 찬란한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막장봉으로 가는 중간 지점(1.8㎞)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출발해서 이곳까지는 흙과 마사토로 이뤄진 산길이지만, 이제부터는 거의 암릉 구간을 오르내리게 되어 산행 속도가 많이 더디게 된다.암릉 구간을 조심스럽게 걷고, 커다란 바위를 피해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가로막힌 절벽 바위를 로프에 몸을 의지해서 오르면 일명 ‘투구봉’에 이른다. 봉우리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 모양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칠보산, 대야산, 희양산, 마분봉, 군자산, 남군자산, 조항산, 속리산까지 장쾌한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투구봉 정상에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노라면, 꽉 막혔던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동기 되어 활짝 열린다. 그 시간 동안은 내 스스로 발을 옮길 수 있는 의지조차 상실하게 된다. 그저 나는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내 마음도, 내 몸도 그저 티끌만큼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투구봉에서 대략 20m의 벼랑을 밧줄을 잡고 내려와 다시 봉우리를 오르는 중턱에서 투구봉을 되돌아본다. 투구봉 고스락에 우뚝 솟아있는 늘름한 소나무 두 그루와 투구봉 앞에 있는 ‘뱀 바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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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봉을 바라보는 산중턱에는 바위들이 마치 시루떡 앞에 촛불을 피어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소원 바위’라 이름 붙이기로 한다.그리고 일명 ‘고인돌 바위’를 지난다. 이 바위는 두꺼비가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과 같아 고인돌 바위로 부르기 보다는 복을 가져다주는 ‘떡두꺼비 바위’라고 부르기로 한다.제수리재 기점 2.1㎞ 지점에서 이정표를 만나고, 기암과 괴목이 즐비한 암릉 구간을 지나서 일명 ‘삼형제 바위’에 이른다. 우측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앞뒤로 두 개의 바위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삼형제 바위’라 불리게 된 듯하다. 이 바위는 무심코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이어서 하늘의 연못이 떠있는 듯한 바위를 보고 ‘천지(天池) 바위’라 명명한다. 다른 이들은 용상바위, 백두산 천지바위 등으로 부르지만 말이다. 어떻게 부르던 상관없다.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그 자체가 어쩌면 부질없는 욕심이다. 자연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고, 어디에 구속되지도 않으며 오로지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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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바위를 지나서 주변의 바위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신기함을 자아내고 있어 눈길과 발길을 붙들어 산행 시간이 지체된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하며, 자연 공간에 전시된 최고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얹혀있는 바위가 신비하고 위태롭기까지 느껴진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외계인 바위’처럼 보이는 등 다양한 모양을 연출하기도 한다.이런 모습이 바로 자연의 조화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삶이 계획된 삶보다 더 윤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유두 바위’를 지나면 밧줄이 매달린 소나무를 만난다. 이제부터 밧줄에 의지해 암릉을 오르내리는 구간을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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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장봉까지는 1㎞ 남짓하다. 웅장하게 서있는 바위를 옆에 끼고 내려가면 마치 옛날 선비들이 썼던 모자와 비슷한 모양의 바위를 보게 된다. 그래서 ‘선비모자 바위’라 부르기로 한다.바위 숲을 지나서 밧줄을 잡고 안전하게 내려왔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밧줄을 잡고 암벽을 오른다. 긴 밧줄이 늘어진 암벽을 오르지만, 밧줄이 암벽 중간쯤에 있는 참나무에 매져 있어 흔들림이 적다. 안전 산행을 위해 고생하는 참나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튼튼하게 오래 살아주길 기원한다.이 암벽을 오르자 E.T.(The Extra-Terrestrial)가 나타나 깜짝 놀란다. 바위 모양이 어쩜 그렇게 E.T.를 꼭 닮았는지 신기하다. 흘깃 보고 오르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원래 E.T.가 그렇다. 우주와 마음이 통해야 E.T.가 보이고, 자연과 동기가 되어야 자연이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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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봉에 오르면 기암과 소나무가 어우러져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바위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는 판화의 미술품을 보는 듯하고, 바위 절벽에 위태롭게 의지해 삶을 이어오던 소나무가 고사목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사후세계를 생각하게 된다.봉우리에 있는 바위 군락지를 지나가면 바위 틈새에 뿌리를 깊게 박고 굳건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소나무를 만났다. 많은 등산객들의 무자비한 발길을 피할 수 없어 밑동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닳았다. 측은한 마음을 넘어 미안한 마음이 앞서니 그 옆으로 살짝 비켜 지나갈 수밖에 없다.이 봉우리를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 자칫 탐방로를 잘못 선택하게 되면 등산로를 잃을 수 있다. 앞에 보이는 대슬랩을 기준으로 천천히 하산해야 한다. 하행하면서 ‘독수리 바위’와 ‘매 바위’를 만날 수 있다.이렇게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산행하는 순간마다 환희로 가득 차고, 위대한 자연 앞에 저절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하심(下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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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락내리락하던 발길이 치맛자락처럼 늘어진 대슬랩 앞에 멈춘다. 약 5m 길이의 대슬랩 능선을 걸으면서 우리네 인생도 이처럼 벼랑 끝에 선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낭떠러지 삶을 안전하게 걷는 길은 무사(無事)하고 무위(無爲)하며 무욕(無欲)이 아닐까 싶다.대슬랩을 지나면 바위 군락에 도착한다. 바위 군락의 좌측에 입구가 있는데, 한 사람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폭이다. 이곳이 이른바 ‘통천문(通天門)’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속세를 떠난 진정한 천상(天上)의 세계로 첫걸음을 딛는다.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문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문턱을 넘어야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필자도 이제 막 막장봉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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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문’을 통과하면 일명 ‘코끼리 바위’를 만났다. 이 바위 앞에 있는 바위의 모습은 마치 ‘복 돼지의 코’를 닮았다. 코끼리 바위는 얼핏 보면 마치 장승처럼 보이기도 한다.코끼리 바위에서 막장봉 고스락에 오르는 길은 마사토라서 미끄럼에 주의해야 한다. 막장봉 고스락은 지금까지의 풍광에 비하면 초라하다. 고스락에서의 조망은 거의 없고, 고스락 돌과 돌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곳에서 1.2㎞ 더 진행하면 장성봉에 이른다. 하지만 이번 산행의 최종 목적지는 막장봉이다. 우리네 인생도 막장을 향해 참으로 한(恨) 많은 사연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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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토마토처럼 쭉 이어지는 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서 도착한 막장봉이다. 막상 인생의 후기에 이르러 삶을 되돌아보니, 세상이 무상(無常)함을 깨닫게 된다. 사람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이제 이곳에 삶의 무게를,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곱 봉우리를 넘어 세상 속으로 되돌아간다. 막장봉의 고스락에서 산행의 들머리인 제수리재를 바라보니 굽이굽이 능선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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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 않던가. 만나면 언제 가는 헤어지는 법, 어찌 사람 마음대로 가는 것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그러나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하지 않던가. 헤어진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다. 어느 날 살아서 만나거나, 아니면 죽어서 만나거나 하는 것은 온전히 인연(因緣)에 달려있다.악연(惡緣)을 지을지 순연(順緣)을 맺을지는 모두 다 자신이 하기 나름인 것을 오늘 산행에서 배운다. 그리고 자연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한 7.2㎞의 막장봉의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