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한국인 자유 빼앗고 억압했던 식민통치 ‘핵심기관’199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잔재 청산·민족정기 회복 위해 철거독립기념관 서쪽 5m 깊이 매장…제국주의 몰락 등 ‘강조’
  •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일제 강점기 한반도 식민통치 최고 기관인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중 첨탑.ⓒ김정원 기자
    ▲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일제 강점기 한반도 식민통치 최고 기관인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중 첨탑.ⓒ김정원 기자
    일제 강점기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가 민족의 정기가 서린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이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좌측에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과 첨탑 아래 석조장식물, 정초석, 정면 중앙부 석조장식물, 원기동 등 수십 개가 전시돼 있다. 둥그런 원 5m 아래에는 조선총독부를 상징했던 회녹색의 첨탑과 철거 부재가 놓여 있다. 5m 아래의 공간에 매장한 것은 일제 식민잔재의 청산과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상징이었던 첨탑은 높이 8m, 무게는 30t이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가장 먼저 해체됐다.

    이곳에 전시된 철거 부재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첨탑 및 모서리 탑 석조장식물, 첨탑, 탑옥 하부의 석조부조물, 석조장식물 및 원기둥, 정면 중앙부 석조장식물, 정초석(定礎石), 모서리 탑 상부 석조장식물(구슬동형), 주좌(柱座), 모서리 탑 상부의 아치형 벽장식, 발코니 난간 동자기둥, 주두(柱頭), 측면 중앙부 석조장식물, 원기둥 등이다.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민속이 일제에 짓눌린 채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한 식민지 통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가 우리 역사의 맥을 끊고 영구히 지배할 목적으로 경복궁의 광화문과 흥례문 등 4000여 칸을 헐고 근정전을 가로막은 채 지어졌다. 총독부 건물은 1914년 기본설계가 완성된 후 1916년 착공해 10년 만인 1926년에 준공됐다. 이 건물은 해방되기 전까지 19년간 조선을 강탈한 직속 기관이자 지휘본부였다.

    ◇조선총독부 건립 후 해방까지 7명 총독 사용

    1906년 12월 21일 초대 조선 총독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어지기까지는 경복궁 내에 건물을 사용했다. 조선총독부 건물 건립 후에는 제3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1927), 마지막 총독인 제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44~1945년 9월 28일)까지 7명의 총독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사용하며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광복 이후 미 군정 청사, 대한민국 정부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됐다. 김영삼 정부 당시인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식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목표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27일까지 철거된 잔해는 역사교육자료를 활용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돼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논의는 광복 이후부터 제기됐지만, 여론화에는 미치지 못했었다. 1991년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논의가 재개됐고, 건물 철거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단행됐다. 

    정부가 중앙돔의 해체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했다. 이어 철거물 활용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철거 부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상징인 첨탑은 1995년 11월 27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복부 철거부재 전시장. 전시장 조성 규모는 4198㎡, 사용된 부재는 17종 2400여 톤에 이른다. ⓒ김정원 기자
    ▲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복부 철거부재 전시장. 전시장 조성 규모는 4198㎡, 사용된 부재는 17종 2400여 톤에 이른다. ⓒ김정원 기자
    ◇첨탑 5m 깊이 반매장…해가 지는 서쪽에 ‘배치’ 일제 몰락 강조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를 활용한 역사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1996년 2월 23일 ‘구 조선총독부 부재 이전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독립기념관 서쪽부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설계는 최만린 서울대 교수가 담당했고, 공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체가 돼 1997년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진행됐다. 조성 규모는 4198㎡, 사용된 부재는 17종 2400여 톤에 이른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전시의 기본 개념은 철거 부재를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첨탑은 지하 5m의 깊이에 반매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의 주 건물인 겨레의집 서쪽, 즉 해가 지는 위치에 조성함으로써 일제의 몰락과 함께 식민잔재의 극복과 청산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998년 4월까지 공사를 마치고 1998년 8월 11일 광복 53주년 기념행사로 성대한 개막식을 거행했다.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를 맡았던 최만린 씨(85, 서울대 명예교수)는 “독립기념관에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는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했다. 조선 총독부의 상징이었던 첨탑은 지하 5m 깊이에 매장했고, 전시공원을 해가 지는 독립기념관의 서쪽에 조성해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식민잔재의 청산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했던 식민통치의 핵심기관으로, 일제 강점기 우리의 역사를 굴절시키고 얼룩지게 했던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전시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각오”라며 “후세들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장을 보고 식민지배라는 수난과 시련을 이겨낸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일본 제국주의 몰락을 확인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 2년이 넘도록 코로나 팬데믹으로 독립기념관을 찾는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가 전시된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매번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관람객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위치도 관람객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관람을 목표로 일부러 찾기 전에는 보기 힘든 위치에 놓여 있어서다.

    15일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장에서 한국인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했던 식민통치의 핵심기관을 관람함으로써 후세들이 대한독립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