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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근주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달 1일부터 30일까지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한다.30일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1860년 2월 충남 홍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근주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분개하며 홍주 목사 이승우, 김복한 등 지역의 유생들과 연합해 의병을 규합했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다음날 이승우가 배반해 주요인물들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근주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워 화를 면했지만 홀로 무사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수를 결심했으나 노모와 형이 자수는 다른 날 다시 도모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만류에 뜻을 꺾었다.
그는 1896년 청양 일대에서 전 수군절도사 조의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조의현이 관군에 붙잡힘으로써 의거는 다시 좌절됐다.
이근주는 의병을 일으키려는 뜻이 좌절됐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제국주의 침략과정과 나라 잃음의 설움을 많은 글 속에 담아냈다.
1895년 홍주의병의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乙未錄)’, 나라가 매군매국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節義歌)’, 장부인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탄만 하고 있음을 적은 ‘신년탄사(新年嘆辭)’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과 이설에 대한 애도시 등을 남겼다.
의병을 일으키려는 뜻이 연이어 좌절되고 1910년 8월 강제병탄이 되자 이근주는 자결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이근주는 1910년 ‘태일자문답약초(泰一子問答略抄)’에서 ‘슬프고 분하며,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전했다. 자결 당시 그는 부친의 묘소 앞 나무에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의 유언을 새기고 1910년 9월 자결했다.
정부는 이근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