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과 숨소리에 온새미로 집중하는 시간[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경북 김천시 편
  • ▲ 설산의 황악산.ⓒ진경수 山 애호가
    ▲ 설산의 황악산.ⓒ진경수 山 애호가
    황악산(黃岳山, 해발 1111m)은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상촌면 궁촌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악산(岳山)이라 하면 험준하고 높은 봉우리이고 으레 석산(石山)이겠거니 지레짐작하지만, 막상 산에 들어서면 토산(土山)이다.

    그래서 산명(山名)에 흙이라는 뜻을 담은 황(黃) 자가 들어있고, 예로부터 학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해 학(鶴)자를 붙여 황학산이라고도 불린다. 이 산은 백두대간 산줄기 중간에 있는 산으로 북쪽으로 추풍령, 남서쪽으로 민주지산으로 이어진다.

    황악산 아래에는 천년의 역사와 세월을 간직한 직지사, 고도를 높여가며 명적암·중암·백련암·운수암을 품고 있다. 신라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직지사부터 산행을 시작할 수 있지만, 운수암까지 임도로 이어져 대개는 운수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잡는다.
  • ▲ 운수암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전경.ⓒ진경수 山 애호가
    ▲ 운수암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전경.ⓒ진경수 山 애호가
    ‘직지(直指)’라는 말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 되었다. 자기의 본마음을 곧바로 파악한다는 것이 직지인심이요, 참나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다는 것이 견성성불이 아니던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풍기는 것들에 이끌러 내면의 자신보다 남을 더 잘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니 참으로 어리석음에 묻혀 살아간다. 허나 이 순간만큼일지라도 어지러운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참나를 돌아보는 여여(如如)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이번 산행은 운수암 주차장(경북 김천시 직지사길 95)에서 출발해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을 다녀오는 왕복 약 7㎞이다. 경칩(驚蟄)을 지나 춘분(春分)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니 산바람이 푸근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이다.
  • ▲ 운수암에서 운수봉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진경수 山 애호가
    ▲ 운수암에서 운수봉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진경수 山 애호가
    고즈넉한 운수암 극락보전에 들어 산행에 앞서 마음을 다잡는다. 법당 앞에 서니 황악산 형제봉에서 뻗어내린 산자락과 망월봉과 남산을 잇는 능선이 포근하게 감싼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를 인간(人間)이라 일컫는다는 것이 뇌리를 훅 스친다.

    운수암에서 내려와 벌거벗은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찬 완만한 산길을 오른다. 작은 계곡을 건너자 산은 허리를 세우기 시작한다. 가파른 계단이 길을 안내하는데 참으로 드세다. 남향의 산길에 들어온 햇살이 산객의 겉옷을 벗게 하고, 길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놓았다.

    발걸음에 집중하다 숨이 가빠질 때면 잠시 쉬어간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비집고 들어온 형제봉이 등을 밀어주고, 앞으로 올라갈 봉우리가 힘내라고 손을 내민다. 나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에너지다. 
  • ▲ 운수봉에서 백운봉에 이르는 눈길.ⓒ진경수 山 애호가
    ▲ 운수봉에서 백운봉에 이르는 눈길.ⓒ진경수 山 애호가
    마치 나를 감싸고 있는 허상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참나를 곧바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혼쭐나게 계단길을 오르고 나니 어느새 해발 약 600m 황악산과 괘방령 능선 갈림길인 운수봉에 닿는다.

    이곳부터 황악산을 향하는 능선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아이젠을 착용하고 눈길을 오른다. 청아한 새소리와 청량한 백설이 따스한 봄 햇살에 싹을 틔우는 것처럼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잠든 정신을 일깨운다. 포근하고 푹신한 발의 촉감을 언제 또다시 느껴보려나. 잠시 머물다가 떠날 것이기에 이 순간을 실컷 사랑하리라.

    좀처럼 보기 드문 소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하얀 눈의 빛 반사 때문인지 솔잎이 한층 푸릇푸릇하고 생동감이 넘치니 소진되어가던 힘이 절로 솟아난다. 살아있는 동안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았다던 선사들처럼, 역동적인 삶은 어쩜 타인에겐 긍정적 희망이 되지 않을까 싶다.
  • ▲ 선유봉에서 바라본 황악산의 수묵화.ⓒ진경수 山 애호가
    ▲ 선유봉에서 바라본 황악산의 수묵화.ⓒ진경수 山 애호가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다 보니 두 발이 해발 770m 백운봉에 도착한다. 이제 오늘 산행의 목적지인 황악산 정상까지 절반이 남은 셈이다. 눈길을 밟을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선유봉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오르막 눈길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힘들기보다는 외려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서낭당처럼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지나자 산길 왼쪽으로 근육질의 산자락이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려 조금은 아쉽지만, 감동만큼은 그지없다.

    ‘119산악구급함’을 지나자 ‘황악산 1070m, 쉬었다 가세요’라고 한다. 고도를 높이자 키 작은 나무들이 길을 이끌고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가파른 돌계단과 오르막 눈길을 오르니 김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쉼터다. 이곳에서 몇 걸음 옮기자 선유봉(해발 1045m)이다.
  • ▲ 선유봉에서 황악산 정상으로 가는 길.ⓒ진경수 山 애호가
    ▲ 선유봉에서 황악산 정상으로 가는 길.ⓒ진경수 山 애호가
    선유봉에서 검푸른 숲 사이에 내려앉은 백설이 산자락을 선명하게 만들고 있는 황악산의 수묵화를 감상한다. 다시 세 개의 봉우리를 넘는 산행을 시작한다.

    하늘을 향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눈길은 점점 두툼해진다. 이처럼 나이를 한 살 더 먹거든, 직위가 한 단계 높아지거든 그것에 걸맞게 지혜도 행실도 깊어지면 어떨까 싶다.

    황악산 정상을 0.4㎞을 앞두고 이어지는 능선에는 나무들이 하얀 깃발을 펄럭이고 있다. 그 모습이 신기해 달려가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고대의 잔흔이다.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것이 삶의 인연이니 슬퍼하지 말라 한다.

    그래도 내년이면 다시 그 모습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은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으니 참으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느끼게 된다. 허튼일에 집착하지 말고,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알찬 삶을 누리다 가야겠다.
  • ▲ 상고대의 잔흔.ⓒ진경수 山 애호가
    ▲ 상고대의 잔흔.ⓒ진경수 山 애호가
    그렇게 구릉을 넘어서니 황악산 정상이 지척이다. 눈 앞에 펼쳐진 설원, 기대하지 않았던 풍광인지라 환희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눈밭에서 뒹굴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설원과 함께한다.

    잠시 백설의 양탄자에 누워 금방이라도 파란 물감을 떨어뜨릴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이 청백(淸白)의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 이 작품은 아무리 뛰어난 AI라도 창조할 수 없는 귀한 존재다.

    봄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미세먼지는 이 위대한 자연의 감상을 방해한다. 아마도 그건 우리 스스로 훼방꾼 노릇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아름다운 순백의 설원은 오로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연이어 올라오는 다른 등산객들의 것이기도 하다. 동시대의 사람들끼리 공유해야 하고, 미래 세대로 온새미로 남겨주어야 할 귀중한 자연이다.
  • ▲ 정상을 앞두고 펼쳐진 설원.ⓒ진경수 山 애호가
    ▲ 정상을 앞두고 펼쳐진 설원.ⓒ진경수 山 애호가
    그렇기에 나의 보물처럼 보호해야 할 귀하고 귀한 자원이다. 산을 찾아와서 남겨야 할 것은 발자국이요, 가져갈 것은 추억일 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간간이 만나는 쓰레기를 보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도 잠시 추억과 쓰레기를 함께 챙겨 하산한다.

    한달음으로 정상을 향해 뛰어오르고 싶지만, 등산로 좌측의 발자국을 따라 가보니 황악산 ‘전망바위’다. 그곳에 올라보니 저 멀리 김천시와 함께 황악산 자락들이 속속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덮인 산자락은 울퉁불퉁 근육을 자랑한다.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백운봉·신선봉·운수봉이 솟아 있고, 그 가운데 직지사가 자리하고 있는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화려한 오색으로 덧칠한 것이 외려 ‘옥의 티’일 뿐이라고 자랑하는 것 같다.
  • ▲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황악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황악산 능선.ⓒ진경수 山 애호가
    어쩜 살다 보면 화려하게 치장한 것보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소유한 것보다, 이 황악산의 수묵화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내고 필요한 것만큼만 지닌 순수한 것이 더 친근하고 행복할 때가 많지 않나 싶다.

    설원 지대를 지나 정상 코앞의 헬기장에 도착한다. 곳곳에서 제각기 모습으로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자연을 즐기는 산객들이 행복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공통적인 듯싶다. 단지 그 감정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담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사회도 내 것만 챙기지 말고, 내 주장만 옳다고 하지 말고, 남에게 나누는 여유와 내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는 마음 자세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할 듯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 자연스레 나눔과 진리를 향해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 ▲ 정상에서 바라본 민주지산 방향의 백두대간.ⓒ진경수 山 애호가
    ▲ 정상에서 바라본 민주지산 방향의 백두대간.ⓒ진경수 山 애호가
    헬기장에서 몇 걸음 오르면 해발 1111m인 황악산 정상 비로봉에 도착한다. 평평한 공터에 정상임을 표시하는 작은 정상 표지석 하나와 백두대간 종주단이 지나간 곳임을 알리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기대보다 소박한 정상의 풍경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펼쳐진 장엄한 백두대간의 산마루를 감상할 수 있다. 넘실대며 흐르는 산줄기는 삼도동·석기봉·민주지산으로 이어지니, 그곳에 발자국을 남긴 추억을 회상하며 산행의 즐거움을 북돋는다.

    춘삼월에 만나 설원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내일의 소중한 삶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얻는다. 내일 또 다른 산에 나의 발자국을 남겨보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지만, 그래도 천천히 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