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한 계곡미가 산행의 맛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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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산(主屹山, 해발 1106m)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남북으로 뻗은 산으로 문경의 진산이다. 주인 주(主)와 산 우뚝 솟을 흘(屹) 자를 쓴 이름처럼 주변의 산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산이다.주흘산의 서쪽에서 발원하는 물은 마주한 조령산(해발 1017m) 사이의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다가 조령천으로 스며든다. 산의 동쪽은 수직 절벽을 이룬 날카로운 암벽이어서 서쪽의 계곡을 따라 산행코스를 잡는다.이번 산행은 공영 제1주차장을 출발하여, ‘조령 제1관문(주흘관)~여궁폭포~혜국사~주봉~영봉~꽃밭 서들~조령 제 2관문(조곡관)~교귀정~조령 제1관문’을 거쳐 제1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총 거리 15.9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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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초입부터 관모봉(해발 1030m)의 산머리가 안개로 자욱하게 뒤덮여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조령’을 향해 문경새재 길을 걷는다. 밝은 햇살과 맑은 공기,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한 걸음은 금세 조령 제1관문(주흘관)에 닿는다.석교를 건너 주흘관을 통과하면 이정표가 주흘산을 가려거든 우측으로 4.5㎞를 걸으라 한다. 숲속의 상큼하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니 그간 무거웠던 심신이 한층 가뿐해진 느낌이다. 계곡의 물소리에 귀가 호강하고 길섶의 야생화가 눈을 즐겁게 한다.해발 320m에 자리한 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허리를 세우는 가파른 돌길이 시작된다. 몸속의 열기가 산속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 안경 성에를 만드는 걸 보니 여름을 배웅하지도 못하고 가을을 마중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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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오르지 않아 만나는 높이 20여 미터의 여궁폭포가 발걸음에 쉼을 준다. 덩달아 가지런해지는 숨소리는 옛날 일곱 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목욕했던 장면을 훔쳐보니 외려 심장 박동이 두근거리는 듯하다.폭포의 형상이 마치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여궁폭포는 일명 여심폭포로도 불리고 있다. 폭포 위로는 웅장한 바위가 양쪽으로 솟아 폭포를 지키듯 감싸고 있다. 다음 산객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길을 떠난다.거대한 바위를 돌아가는 길목에 밑동이 텅 빈 고목(古木)이 울부짖는다. 텅 빈 밑동에 잔뜩 채워 넣은 돌멩이, 그건 아마도 산객들이 소원을 빌며 넣을 듯싶다. 하지만 그건 소원성취가 아니라 나무의 고통이 되고 자신의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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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을 걸어 해발 350m에 오르자 갈림길을 만난다. 머뭇거릴 새가 없이 주흘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돌길은 데크 계단으로, 바윗길로, 다시 돌길로 이어진다. 아침 햇살을 안고 걷는 산길에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와 동행한다.물소리를 따라 거슬러 오르내리는 산길에서 거대한 암벽이 지구를 망치는 인간에게 위협을 주는 듯하고, 계곡의 검푸른 이끼는 인간에게 태고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에 연이어지는 청신한 계곡이 티끌을 씻게 준다.계곡물도 숨이 가쁜지 흐름을 완만하게 바꾸자 혜국사(惠國寺)가 계곡 건너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시대 보조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당시에는 법흥사(法興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란의 위기를 구제할 방책을 세워 나라에 조력했다고 하여 사찰 이름이 혜국사가 됐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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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들어 복잡한 마음을 다잡아 보고, 목교를 건네는데 그 옆으로 속이 텅 빈 나무가 덩그러니 서 있다. 마치 자신의 몸뚱이처럼 마음을 비우고 떠나라고 하는 듯하다. 이곳에서 주흘산 정상까지는 2.5㎞를 더 올라야 한다.암반과 자잘한 돌길, 계단이 반복되는 오르막길, 그럭저럭 오를만한 하다. 곧게 뻗은 소나무 군락지에서 상큼한 피톤치드 향이 쏟아져 나온다. 길가 늘어선 아름드리 소나무를 안아보니 따뜻한 온기가 내 몸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흐른다.보랏빛 꽃향유가 즐비한 산길은 천상의 화원으로 이끄는 듯하지만, 그렇게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자 야생화가 나지막한 키로 길을 노랗게 물들인다. 촉촉한 돌길을 오르니 주흘산 약수터를 만난다. 시원한 약수 한 대접을 들이키며 ‘주흘산 백번을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라’를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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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서서히 가을 색으로 물들어가는 빽빽한 신갈나무 사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른다. 지쳐갈 무렵 잠시 멈춘 발걸음, 시선은 신갈나무의 가을맞이를 본다. 남실바람에도 팔랑거릴 새가 없이 우수수 떨어져 휘날리는 나뭇잎들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언제쯤 이 계단이 끝날 수 있을까 싶더니 주능선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이어진 완만한 능선, 다시 계단이 길을 안내한다. 해발 천 미터가 가까워지니 신갈나무 잎이 물들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지고 있다. 종아리가 뻐근함을 느낄 때 주흘산 주봉(해발 1076m)에 닿는다.발아래로 마치 갈비뼈처럼 주흘산에서 뻗어내린 능선과 지느러미처럼 날을 세운 관봉(해발 1038m), 그리고 그 자락의 끄트머리에 삶의 터전을 일궈온 문경이 조망된다. 이제 올랐던 주흘산을 다시 약 50m 내려와 갈림길에서 영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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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가을 마중에 바쁜 신갈나무 숲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는다. 간간이 암벽을 이룬 주흘산의 옆모습을 살짝 들여다보기도 하고, 조령산과 신선암봉의 능선, 그리고 지나온 주봉과 그 뒤로 관봉도 조망하며 오른다.주흘산 주봉과 영봉 중간쯤 왔을까, 올라야 할 영봉과 그 옆으로 포암산과 만수봉, 그 뒤로 월악산이 조망된다. 어쩌다 만난 한 폭의 풍경과 맑게 갠 하늘이 힘든 걸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발아래 산들이 고만고만해 보이니 이 산으로 참으로 높구나 싶다.이래서 얼떨결에 높은 자리에 앉은 이는 자칫 만인이 자잘하게 보여 자만과 거만으로 가득 차게 되는 모양이다. 한편 그 자리 옆은 천 길 낭떠러지이니 산은 참 많은 걸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숲으로 뒤덮인 영봉으로 향하는 길은 돌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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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경사를 오르자 주흘산 영봉(해발 1106m)이 30m 앞에 있다고 이정표가 알린다. 드디어 도착한 정상엔 신갈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없다. 다시 이정표로 내려가서 3.6㎞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제2관문으로 하산을 시작한다.가파른 하산 초입을 내려오면 수령이 꽤 오래된 아름드리 신갈나무와 생명을 다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고사목의 향연을 만난다.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년도 피겠지만 우리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거늘 어찌 그리 욕심내며 사는지.생사를 초월하면 적멸(寂滅)이라 했던가? 어쩜 오늘, 이 산은 생사에 대한 집착의 초월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런 산길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지난 여정의 흔적들이 가슴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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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고 거친 돌길이 하산하는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그 참에 가을 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주흘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8부 능선쯤 내려왔을까, 조릿대 숲길이 시작된다. 다채로운 숲과 길의 생김새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멀리서 잔잔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긴장하며 내려온 가파른 산비탈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나 쉽사리 길을 내어주지 않는 주흘산의 까칠한 하산길이다. 마침내 매끈한 암반 위로 옥구슬 굴러가듯 흐르는 깊은 계곡의 물줄기를 만난다.주흘산 영봉에서 1.1㎞를 내려왔는데 험한 길 탓인지 무척 길게 느껴졌는데, 이곳에서 제2관문(조곡관)까지는 2.4㎞, 계곡 길은 또 어떤 모습, 어떤 색으로 다가올까. 이 계곡은 주흘산 주봉에서 시작되어 제1관문(주흘관)을 거쳐 조령천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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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돌이 깔린 길이라 편치 않지만,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울울창창한 숲과 깊은 계곡에서 풍기는 별천지에 녹아드니 마치 신선이 된 듯하다. 무상무념의 발걸음은 어느덧 ‘꽃밭 서덜’에 닿는다.이곳은 진달래꽃과 문경새재의 토착 수종인 물박달나무 군락지로 주변에는 오가는 등산객이 쌓은 돌탑이 장관을 이룬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곳에서 돌탑을 쌓아 기원하면 득남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계곡을 수차례 넘나들고, 너덜 길에 발바닥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험한 계곡 길, 그래도 종종 만나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계곡을 만나 잠시 쉬어간다. 그렇게 거친 길도 널찍하고 평탄한 길로 얼굴을 바꾸면서 조령 제 2관문과 상봉한다.이후 문경새재 길을 걸어 교귀정과 조령 제 1관문을 지나 계곡과 함께 출발한 오늘의 긴 여정은 다시 계곡과 함께 갈무리한다. 내일은 더 건강하고 밝은 세상, 갈등과 차별을 넘어선 모두가 행복한 날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