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듯 부담 없는 산행[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음성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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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普賢山, 해발 477m)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와 동음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경치가 숨겨져 있지도 않고, 음성군청 누리집에서조차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그저 매일 만나는 친근한 이웃처럼 평범한 산이다. 그런데 이 산이 ‘가고 싶은 山 충북 50選’에 선정된 것은 아마도 한남금북정맥에 놓여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산객들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달려오는 산이기도 하다.이번 산행의 들머리는 보현산 임도의 초천리 시점으로 한다. 승용차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충북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51’로 설정한다. 이곳은 초천길 지방도에서 임도로 연결되는 세거리로 승용차 3~4대 정도는 너끈하게 주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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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 임도 초천리 시점의 좌측에는 ‘보현산 약수터’가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우측에는 임도 방향으로 ‘보현산 정상(2.1㎞)·백야휴양림(5.0㎞)’, 도로 건너 방향으로 ‘큰산 정상(7.4㎞)’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어제 내린 비 덕분에 미세먼지에서 해방된 쾌청한 날씨에 눈도 마음도 깨끗해진다.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을 맞는 산행으로 적격인 셈이다. 평탄한 임도 초반부를 걷다가 ‘쉬는 터’를 지나면서 보현산 능선을 조망한다.출발 기점 0.5㎞ 지점에 이르러 임도와 등산로의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등산 리본이 걸려있는 산길로 접어든다. 곧바로 장승처럼 서 있는 이정표가 거리 표시가 없이 좌측으로 ‘제1정상’을, 우측으로 ‘약수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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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정상’ 방향으로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면서 묘지를 지나고, 다시 코가 닿을 듯 허리를 곧추세운 돌길을 오르면 임도에 닿는다. 임도를 곧바로 가로질러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경사진 산길을 헤집고 오른다.등산로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산길에서 선행자들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보물찾기하듯 산을 오른다. 그러나 거리가 짧아 크게 헤매는 일은 없다. 이어 통나무 계단 구간을 오르면서 임도에서 0.1㎞ 정도 오르자 능선과 만난다.어느 쪽이 ‘제1정상’ 방향인지 표시가 없다. 그래서 능선에서 우측으로 발길을 돌려 완만한 내리막 능선길을 0.2㎞ 정도 명상하듯 걷는다. 얼마 되지 않아 이정표가 세워진 임도와 다시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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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큰산 정상’이 8.5㎞이고 임도를 가로질러 산을 오르면 ‘보현산 정상’이 1.0㎞ 앞에 있다. 긴 의자 옆 소나무에는 산객을 위한 나무지팡이가 여러 개가 묶여 있다. 보현산을 사랑하는 이곳 주민들의 배려가 돋보인다.소나무 옆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우측에 흙으로 쌓아 만든 제단에 ‘보현산신제단(普賢山祭壇)’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시 몇 걸음을 옮기면 소속리산과 보현산 약수터, 그리고 금강원천 약수터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만난다.이곳에서 소속리산 방향으로 갈색 낙엽을 양탄자 삼아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오른다. 작은 바위 군락을 지나기도 하고, 맑고 깨끗한 공기를 단전에 이르도록 깊게 실컷 마시며 차근차근 걸음을 옮긴다. 꼿꼿하게 선 봉우리가 힘들어지자 물이 흐르듯이 넘지 않고 산허리를 돌아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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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에 닿으니 벌거벗은 상수리나무 아래로 낙엽이 푹신푹신하게 깔린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구부러지고, 작은 구릉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걷다 보면 평범한 산이지만 지루한 겨를이 없다.산길 좌우로 숲이 우거져서 조망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숲속에 안겨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걷기에 좋다. 나뭇가지 사이로 짙푸른 하늘이 봄이 오는 소식을 전하는 듯하다. 길 우측으로 희미하게 가섭산과 음성읍내가 조망된다.한남금북정맥 표지목을 지나면서 푸르던 하늘에 서서히 희멀건 구름이 뒤덮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접하는 맑은 하늘을 맛만 보게 하고 사라지니, 환경 오염시킨 인간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듯하다. 빛을 잃은 숲속은 을씨년스럽게 모습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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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보현산 정상은 나무와 바싹 마른 잡풀에 가로막혀 조망이 없다. 그 흔한 정상석도 없고 우뚝 솟은 산불감시초소 옆으로 ‘한남금북정맥 마을이야기’와 ‘선녀가 쓰는 부채! 미선나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유독 돋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는 보현산 정상에서 큰곰집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라고 알린다. 쉴 곳도 마땅치 않고 해님도 숨어버리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서늘함마저 느껴서 곧바로 원점회귀를 시작한다.정상에서 0.2㎞를 되돌아오니 ‘한남금북정맥 보현산 정상’이라는 코팅 푯말과 여러 개의 등산 리본이 나뭇가지에 달려있다. 어디가 정상이고, 어디가 제1 정상이든 간에 상관없다. 산이 있어 산을 찾고, 그 속에서 하나로 됨을 느끼며 걷는 과정이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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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할 때마다 따라오고 싶어 안달하여 동행한 애완견 ‘달봉’이는 무척 신났다. 앙증맞은 엉덩이를 삐쭉거리며 잘도 걷고 뛰어다닌다. 호젓하게 걷는 산길에 나도 달봉도 온새미로 자유를 누린다.사람이나 짐승이나 움막에 갇혀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춤추는 산줄기와 겹겹이 층을 이루는 산줄기가 멀리까지 아득히 멀어지는 광대한 자연을 접하면 저절로 마음의 통이 커지는 듯하다.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돌아갈 몸과 마음이 자연과 어울리는 이 순간이 삶의 즐거움이요, ‘나답게 사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돌아오는 능선 끝자락에서 이르러 봉우리에서 임도를 향해 가파른 길을 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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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를 내려오면서 바리캉으로 머리를 듬성듬성 밀어놓은 것 같은 골프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에 탈고한 ‘나답게 사는 행복’(좋은땅 출판사)에 쓴 구절이 떠오른다.“나의 여유로움은 자칫 남의 고통이 될 수 있고, 나의 풍요로움은 자칫 남의 빈곤이 될 수 있으며, 나의 한가로움은 자칫 남의 격무(激務)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네 삶이 이기(利己)에서 이타(利他)의 배로 옮겨탈 수 있어야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어느새 임도로 닿아 약수터 방향으로 평탄한 임도를 걸어간다. 임도 세거리에서 약 0.5㎞을 이동하면 ‘보현산 약수터’에 닿는다. 바위틈새에서 고요하게 일렁이면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두꺼비 입에서 끊임없이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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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 약수터 옆에는 ‘보현한금정(普賢漢錦亭)’이란 현판이 붙은 움막이 평상을 품고 있다.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산책 장소로는 최적일 듯싶다. 약수터에서 다시 임도로 올라와 하행을 계속한다.약수터에서 0.3㎞쯤 이동하면 긴 의자 4개가 설치된 전망 좋은 곳에 이른다. 이곳은 상행할 때 임도를 가로질러 산길을 오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방송중계탑이 보이는 가섭산과 그 좌측으로 봉학산의 수리봉과 두호봉을 조망한다.조망을 시샘하는 듯 하늘은 점점 두꺼운 구름으로 덮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가섭산 우측으로 음성읍내의 아파트 건물이 보이고, 저 멀리 뾰족하게 튀어나온 월악산 정상과 박달산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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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엔가 도명산, 군자산, 대야산도 있을 것도 같은데, 아는 게 그뿐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산에서 늘 느끼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이것저것 구별함이 평등을 깨트릴 수도 있음이니 그러려니 한다.구불구불 임도를 내려가다가 다정한 얼굴로 산책하는 노부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건강을 위해 오래 살아온 세월을 뒤로하고 둘이서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이 풋풋한 사랑보다 더 아름답다.‘쉬는 터’를 지나 보현산 임도의 초천리 시점에 도착한다. 이번 산행은 약 4.5㎞의 입춘 맞이 산행이었다. 산행이라기보다 산책하듯, 명상하며 걷기 좋은 코스다.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길 없는 온전히 ‘나’라는 아바타를 벗어던지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