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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일가의 애국정신은 ‘대한민국’ …서울·대전 현충원 ‘안장’

4대 걸처 국난 때마다 자주독립·국가 수호 목숨 바쳐

입력 2022-08-15 11:52 | 수정 2022-08-15 15:47

▲ ⓒ수당 기념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가 안정된 서울·대전 현충원에는 1855년부터 1951년. 약 백 년의 시간 동안 4대에 걸쳐 국난의 시대마다 자주독립과 국가 수호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온 가문인 한산 이씨 4대가 나란히 안장된 가문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제77주년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로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15일 수당기념관에 따르면 국경일에 국기를 매다는 일조차 찾아보기 힘든 요즘 시대에 나라에 온몸과 마음을 바쳐 충정을 다한 수당 이남규 일가의 애국정신은 바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애국정신이 아닐까 싶다.

1대 수당 이남규 선생(1855. 11.3∼1907. 9. 26) 고려 말 충신이자 이색 선생의 후손이며, 단재 신체호 선생의 스승으로, 고동 19년 문과급제 후 궁내부특진관(현재 청와대 비서실장급)에 해당하는 대한제국 고위관리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다. 

이남규 선생은 1893년 일본의 조선내정 간섭,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등 일본의 부도덕함과 무도함을 규탄하는 상소문 등을 통해 고종에서 일제와 결정을 주장했으며, 특히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낙향했다. 

하지만 1907년 9월 26일 충남 아산에서 일제에 의해 자기 아들 2대 이충구((1874.8.4.∼1907. 9. 26.), 하인 김응길과 함께 새끼손가락 하나 못 찾을 정도로 처참하게 참변을 당해 순국했다. 

당시 기록에는 왜족들이 현재의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595∼136 평촌 냇가에 이르러 왜 기병이 공을 위협해서 귀순하기를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라는 선생의 노하여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왜의 칼날이 어지러이 공의 몸을 내리쳤을 때,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려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과 가수복(발이 빠르고 이해력이 뛰어나 수당 선생의 문서 수발을 도맡아 했음)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즈러히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셋이었다고 서술했다.

수당 선생의 아들인 2대 이충구((1874.8.4∼1907. 9. 26.)는 1906년(33세, 병오년) 5월 11일부터 11월 17일까지 계속됐던 홍주의병으로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번지 본가에서 홍주의 병장 민종식을 숨겨줘 아버지 수당 선생과 함께 공주 감형에 갇혀 모진 악형을 당했고 이를 발설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고 한다. 

1907년 9월 26일 예산 본가 근처에 잠복해 있던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 본국 순사와 병정에게 포위되고,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로 유인돼 회유책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거절하면서 아버지 수당 선생, 가마꾼인 시자 김응길, 가수복과 함께 참변을 당해 순국했다.

▲ ⓒ수당기념관

수당 선생의 손자인 3대 이승복 선생(1895.7.10∼1978. 10. 31)은 13세에 조부와 부친의 장렬한 순국을 당해 어린 가슴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남달리 일찍 국가·민족에 헌신할 뜻을 굳히게 됐고 4차례에 망명을 통해 해외에서 임시정부에 관련해 연통제의 비밀조직에 참여했다. 

3차 망명은 1922년에서 1923년까지로 그해 1월에 환국해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에 도움을 줬다. 당시 종로경찰서의 경부였던 사이가 경부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탄을 투탄한 김상옥 사건에서 작성한 의견서에 의해 그의 진실이 알려졌다. 

사이가 경부는 당시 민속신문이었던 ‘동아일보’ 폐간을 주도하는 등 악명이 높은 일제 경찰로서 이승복을 끊임없이 경계했고 괴롭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또 신간회를 창립을 알리는 가시를 통해 밝히는 신간회 핵심인사로 기록하고 있다. 

1927년에서 1933년까지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수당 선생의 증손자로, 4대 이장원 중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같은 해 9월 소위로 임관했으며, 후방 교란과 해안봉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해병 독립 42중대의 편재돼 중대를 이끌고 황토도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황토도는 북한의 상당한 관심과 전력이 집중된 최전선으로 북한 내무성 직속 대대인 25여 단 150여 명과 대치됐던 곳이다.

이장원 중위는 이러한 중요한 작전 중 무전기마저 적탄에 파괴돼 본대와 교신이 단절,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된 악조건하에서도 대원들을 독려하며 적을 격멸했지만 진지 내에 떨어진 적탄에 의해 부하 3명과 함께 전사해 전쟁 영웅으로 남게 됐다.

이장원을 비롯한 대원들이 목숨 바쳐 성공한 이 작전은 인천 상륙작전과 원산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큰 역할을 기여했으며, 죽게 될지도 모를 전장으로, 기꺼이 자원한 이장원은 중위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한편 수당 기념관은 수당 4대 ‘이남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장원 1953년 충무무공훈장’ 로 이어진 애국애족 활동을 소개하고, 수당 가에 전해오는 선대유물 및 고문서 등을 살펴봄으로써 수당 선생의 정신사적 의미로 계승시켜 후세대에 애국 애민정신과 독립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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