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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일 충북 보은군 북암마을에서 123년전 학살된후 매장된 동학군에 대한 위령제에서 조정미씨가 눈물로 제문을 읽고 있다.ⓒ김종혁 기자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7명의 동학군을 마을사람들이 묻어준 곳이 새롭게 발견돼 학계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북암마을 ‘유병골(이병골)’로 불리는 산자락에서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와 ‘보은취회 124년’ 행사 관계자들, 마을주민들이 3일 제례상을 준비해 위령제를 올리며 100여년전의 넋을 위로했다.
박맹수 교수에 따르면 동학혁명 당시 충남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들이 보은 북실마을로 피난을 왔다가 2600여명이 학살됐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보은에 10여일을 머물며 북실마을을 비롯한 곳곳에서 학살이 일어났으나 그동안 학계와 보은군 등에서는 구체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북실마을 등 주민들에게는 구전으로 이야기가 전해 내려 왔으며 학살 내용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너무도 잔혹해 입 밖에 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북암마을 위령제는 올해로 20년째 ‘보은취회’ 기념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에 의해 기획됐다.
박 교수를 비롯한 추진단은 지난해 북실마을 학살지 순례에 이어 올해 북실마을에서 수철령을 넘어 북암마을로 이어지는 코스를 답사하다가 북암마을에서 학살된 7명의 동학군을 마을 사람들이 묻어준 증언을 토대로 순례와 위령제를 마련했다.
박 교수는 “갑오년이후 123년만에 최초로 동학군들이 갔던 길을 따라 걷는다”고 50여명의 순례단에게 의미를 설명했다.
순례길은 조정미씨의 안내로 북실마을에서 시작됐다. 보은읍에서 괴산방향으로 가는 난 길의 끝에 북실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수철령을 넘어 북암마을로 들어가는 약 7km 길이다.
수철령 고갯길은 보은읍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말티재처럼 깎아지른 절벽의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야만 넘을 수 있다. 아주 옛날부터 소를 몰고, 지게를 지고 보은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고갯길이다.
고갯길 입구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 수풀이 우거지기도 했지만 고목이 우거진 산속으로 들어가자 수백 년간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30cm가 채 안 되는 산길에는 수년간 쌓인 나뭇잎들이 수북이 쌓여 ‘이곳이 길’이라고 안내를 했다.
1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인 순례단은 아주 천천히 산속을 걸으며 100여년전 이 길에서 목숨을 걸고 퇴각하던 동학군들을 생각했다.
잠시 쉬어가는 산 중턱에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수많은 나비 떼가 낯선 방문자들을 반겨줬다. 극심한 가뭄 속에 나비들로 들판에서 숲으로 삶터를 옮겨온 듯 했다.
수철령 정상은 한남금북정맥의 경계지다. 이곳에서 내리는 비가 북실마을로 내려가면 금강이 되고 북암마을로 내려가면 한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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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맹수 원광대 교수가 3일 충북 보은 수철령 고갯마루에서 동학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종혁 기자
박 교수는 정상에서 “당시 동학인들은 3정의 문란으로 망해가는 조선을 변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숱한 전투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동학인들이 무참히 죽어갔지만 동학혁명은 결코 실패한 혁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동학혁명의 정신은 이후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해방 후에는 4·19혁명과 6월 항쟁으로, 오늘날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며 근대에서 현대로 전화되는 시기에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주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동학혁명의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후인의 몫이며 미래 세대를 위해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수철령을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낮은 골짜기마다 고추와 감자 등이 심어진 밭들이 가뭄에 겨워 말라들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북암마을에 도착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산자락의 큰 나무아래에 위령제를 위한 과일과 떡, 막걸리 등 제례상이 마련됐다.
이어 시작된 위령제에서는 당시 수철령을 넘어 퇴각하던 동학인들이 북암마을에서 무참히 학살됐으며 마을사람들이 이 근처에 묻어줬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박 교수와 마을 어르신들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이어 위령제 제문을 준비한 조정미씨가 큰 절을 한번 올리고는 이내 엎드린 채 통곡을 쏟아냈다. 그의 울음은 순례단 모두를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한 맺힌 설음은 숲으로 하늘로 땅으로 울려퍼졌다.
조정미씨는 “123년전 이 땅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하고 오늘 우리들로 현신하신 임들이여”로 시작하는 제문을 가까스로 읽어내며 그 분들의 넋을 위로했다.
북암마을 한 어르신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얘긴데,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서 입으로 꺼내기가 무서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했는지를 왜 아직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는지 한심하다”며 “그동안 보은군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하나 나서서 제대로 된 조사한번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우리 늙은이들 다 죽고 나면 그나마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라도 꼭 제대로 밝혀질 수 있도록 교수님과 여러분들이 힘서 달라”고 당부했다.
마을 어르신들의 한결같이 “무섭고 끔찍해서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고 증언한다. 그만큼 일본군들의 만행과 학살이 끔찍하고 두려워 100년이 지나서도 치를 떨고 있었다.
박 교수는 “이번 순례길과 위령제를 제대로 정리해서 학계에 알리겠다”며 “북암마을 뿐 아니라 보은 곳곳의 마을마다 숨져간 동학인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이라며 철저한 조사와 연구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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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령제 후 박맹수 교수가 참가자들에게 학살된 동학군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종혁 기자
한편 이번 순례길은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6일까지 보은동학혁명공원 일대에서 열리는 ‘124보은취회’의 한 프로그램이다.
동학혁명의 전초기지였던 보은 장내리에서 해월 최시형이 전국의 동학군 수만명(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명)을 집결시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외치며 근대사 최고의 성공적인 민회인 ‘보은취회’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20년째 이 행사를 준비해온 박달한씨는 “보은은 곳곳마다 동학의 얼이 서려였다”며 “스스로 모여 스스로 판을 벌리고 또 함께 토론하는 등 124년전의 동학인들을 기리기 위해 전국에서 참여해주는 많은 분들 덕분에 기념행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행사의 주제는 ‘내 마음에 꽃피는 동학’이며 박 교수의 순례길과 위령제 등 동학서당을 비롯해 ‘북실기림굿’, 꼭두광대의 마당극 ‘왼손이’ 공연, ‘풍류마당’, ‘주막거리’, ‘장승마당’, ‘다문화 공연’ 등이 동학공원 일대에서 오는 6일까지 펼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