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 “韓 정부, 건국훈장 왜 줬는지 모르겠다”… 7월 박열의사기념관에 훈장 반납이규상 전 부강면장 “유족들, 훈장 받은 사실, 日에 알려질까 두러워해”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 “부강에 기념관 건립 가네코 자유·독립정신 이어야…건립부지 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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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인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한다. 그때 그저 눈에 비쳤을 뿐인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반항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조선에서 사는 동안 보고 들은 것들 때문에 저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조선인들의 모든 반항 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됐다.”‘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일제강점기 천대받던 식민지의 남성인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1902~1974)를 도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폭살시키려했으나 사전에 발각, 1923년 구속돼 일본 재판부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다.그러나 일제의 멸망과 일왕 부자 폭살의 필연성을 주장한 일본 여성으로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유족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반납한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그의 조국에 이어 유족들까지도 끝내 그를 내치고 외면한 것으로 확인됐다.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은 최근 가네코 일본 유족들이 지난 7월 23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고 뉴데일리에 확인해줬다.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가네코 유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기념관 측은 “가네코의 일본 유족이 훈장을 반납한 것은 ‘박열의사기념관에서 훈장을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그러나 지난 3월 일본을 방문했던 이규상 전 부강면장(60‧전 청주시 공무원)은 “지난 3월 일본 방문 당시 유가족들이 가네코의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부담스러워했고 우리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면서 “일본에서 훈장 받은 사실이 알려지는 것 조차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이 씨는 “가네코 유족이 ‘이 훈장을 왜 우리에게 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면서 “유족이 훈장을 부담스러워 한 것은 가네코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폭살하려했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일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고 이런 과거의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일본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훈장 반납배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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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코 유족, 건국훈장 반납가네코는 박열을 도와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대역죄(大逆罪)’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은 데 이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는 꽃다운 나인(23세)에 옥중에서 순국한 날(1926년 7월 23일)인 지난 7월 23일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추도식 및 기념식에서 박열의사기념관에 훈장을 반납했다.가네코 유일한 후손인 가네코 다카시씨가 반납했다. 훈장은 후손을 대신해 가네코 후미코연구회 야마나시 회장이 지난 7월 23일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추도식 당시 후손을 대신해 전달했다. 반납이유는 ‘박열의사기념관에서 훈장을 전시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보관도 용이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했다. 앞서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순국선열의 날에 일본 한국대사관 요코하마 영사관을 통해 가네코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박열의사기념관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독립유공자들이 적국을 상대를 반일 투쟁을 벌였다면 가네코는 자신의 모국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고 재판 당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회유하고 증언을 번복하면 목숨만을 살려주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는 끝까지 폭탄으로 일본 왕세자를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했으며 사형 판결 당시 “만세”를 외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가네코 묘는2002년 박열의사기념관에 조성됐고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원들은 기일 등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오 학예연구사는 “가네코에 대해 많이 연구된 것은 폭탄을 구입해서 실제 계획으로 옮기려 했다는 것은 빠져 있다. 그 부분은 ‘허무주의’ 쪽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해서 실제 계획을 하려는 의도 보다는 일본에 의해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집중 부각됐다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앞으로는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 진짜 의열단과의 연결을 통해 히로히토를 폭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더 밝혀지고 이 부분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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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코 유족, “건국훈장 받은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그러나 박열의사기념관의 주장과는 달리 가네코 일본 유족들이 강력히 훈장 반납을 추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카네코의 모국에 대한 저항정신을 이어받고 부강에서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열고 일본 고향을 방문했던 이규상 전 부강면장은 “우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왜 건국훈장을 줬느냐’고 불만스러워 했다. 박열의사기념관은 가네코 유족이 훈장 반납 이유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전했다.그는 “한국 정부가 가네코 유족에게 훈장은 줘 놓고 아무런 대책을 세워놓지 못해 일본 유족들이 자랑할 수 없었다. 지난 3월 일본을 방문, 유족을 만났지만, 우리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올해로 가네코(1926년 7월 23일 작고)가 생존했다면 93세가 되는 해다. 가네코는 관동대진때 박열 의사와 함께 경찰에 잡혀갔고 결국 옥중에서 돌아가셨다”고 설명했다.이 전 면장은 “일본 가네코 연구회 회원들로부터 우리가 청주에서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날 가네코의 뜻을 기리는 모임을 가진 뒤 현수막에 참석자들의 사인을 받은 것을 일본에 가지고 갔더니, 연구회 회원들도 회합을 한 자리에서 반갑게 사인을 했다”고 덧붙였다.그는 “우리는 이들이 가네코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서 회합을 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조선인 박열을 사랑했는가.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왜 살해하려고 했을까. 왜 박열 의사 시(詩)를 왜 좋아했을까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한국 정부가 가네코를 왜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한 것으로 미뤄 연구회원들의 관심은 우리와 차이가 있었다. 또한 훈장을 받은 유족이 아침 일찍 우리를 만나러 왔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려워했고 지금도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는다고 했다”고 전했다.◇가네코의 부강생활‧박열과의 만남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출생한 가네코는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무적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0살이 돼서야 1912년 외할버지의 다섯째 딸로 호적에 올랐다. 가네코는 9살 때인 1912년 사에키 무츠 친할머니를 따라 조선(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건너왔지만 권위주의적인 할머니와 고모의 차가운 학대, 그리고 하녀와 같은 생활을 견디다 못해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가네코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다녔으며 두뇌가 명석해 곧잘 ‘학업‧품행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7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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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강에서 살면서 3‧1만세운동을 목격했고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식민지 조선인의 실상을 통해 일제의 비인간성을 경험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경험이 가네코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기반됐다.가네코는 일본에서 진보적인 청년들이 많은 유라쿠정 스키야바시 이와사키 오뎅집에서 일을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녔다.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진보적인 서적과 잡지를 탐독하며 1922년 ‘조선 청년’ 잡지 교정쇄를 보게 됐는데, 그 책에 박열의 ‘개새끼’란 시를 읽고 감동하게 된다. 박열은 일본에서 들개처럼 생활하는 것을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굴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정열을 쏟아 붓는 청년 박열의 내면을 봤고 이어 박열과 만남과 그의 생활방식을 통해 자기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됐다.가네코는 일본에서 활동한 박열의 시에 매료돼 그를 좋아하게 됐고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박열의 독립운동 정신에 매료돼 모국의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 폭살을 함께 계획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이 실패한 가네코는 옥중에서도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고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끝까지 저항했다.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5일 동경 대심원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수고했군, 재판장. 내 몸이야 너희들 마음대로 하지만 내 정신이야 어떨 수 없겠지”하며 재판장을 조롱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정부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 한 뒤 10일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천황의 칙명(勅命)을 발표했다.가네코 후미코는 대심원의 마지막 공판을 앞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박열과 옥중 결혼식을 가진데 이어 1926년 3월 23일 우시고메 구역소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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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코 후미코 日 ‘천황제 부정’일본 재판기록에는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 폭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은 그는 “산다는 것은 단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저 살아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위가 있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고 긍정”이라며 히로히토를 폭살하려했던 자신의 행동을 옳았다는 것을 정당화했다.가네코는 당시 확고한 천황제를 부정했다.그는 “나는 과거에 대역죄인리라고 불려 마땅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 적도 있다. 아직도 나의 그러한 언동을 반성할 생각이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나 자산에 대해서조차 없다”며 사죄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가네코가 살았던 부강에 기념관 건립 추진이규상 전 부강면장은 “세종시에서 가장 떠받았던 역사적인 인물은 ‘임난수(최영장군 부관)’ 정도에 불과하다. 문경시에는 역사적인 인물로 박열 의사 한 명에 불과하며 세종시에서도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가네코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은 없다”고 말했다.그는 “박열의사기념관 규모로 가네코의 기념관을 건립하려면 20~30억원이 필요하다. 가네코가 살았던 부강 집터는 800여 평으로 현재 평당 150만원 호가한다. 현재 소유자가 집터를 매각한다면 기 곳에 가네코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홍판서 집’ 옆에 600여 평의 부지가 있다”고 했다.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60)는 “최근 일본이 한국에 대해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등 경제침탈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가네코 일제 강점기 자유·독립정신(천황제‧군국주의)’을 이어받기 위해 세종시에 가네코 후미코 기념관을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살았던 터에 기념관을 짓지 못한다면 건립할 터(부지)를 희사하겠다”고 밝혔다.그는 “세종시가 가네코가 부강에서 살면서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면서 “이런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보존하고 후세에 전해야 할 정부와 세종시가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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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세종시는 역사적으로 가네코의 역할과 역사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강조했다.이규상 전 부강면장과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 등 30여명은 민간차원에서 가네코를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10년 부강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생활 학술대회’에 이어 지난 3월 31일 부강 홍판서 집에서 제례를 봉행했다.한편 가네코는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묘역과 기념비를 세웠다가 2003년 박열의사기념관이 조성된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내에 이장해 두 사람이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독립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