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이 없어 잃을 것이 없는 山[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괴산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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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청천면 고성리에 자리 잡고 있는 쌀개봉(해발 659m)을 찾는다. ‘쌀개’는 옛날 디딜방아의 축을 올려놓는 V자 홈이 파인 기둥을 말한다. 이 봉우리의 백미는 ‘코뿔소 바위’이고, 이 바위에서 이어지는 기암괴석이 즐비한 남릉 코스는 험난하지만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상신리 마을회관 앞에 주차를 하고 사담리 공림사 방향으로 37번 지방로(괴산로)를 따라 약 200m를 걷다보면 좌측으로 골목길이 나온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들어선 후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펜션 입구에서 좌측으로 5m 정도를 더 들어가면 우측으로 임도와 만난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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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우리가 변화를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초목들이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파릇파릇 생명의 싹을 돋고 있다. 완만한 산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마을 끝자락 주택을 막 지나면서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좌측의 조봉산과 쌀개봉 사이의 안부로 오른다. 이 갈림길의 우측 길로 하행하게 된다.메마른 계곡을 건너고, 평평한 돌이 깔려있는 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오른다. 소나무 숲속 사이로 진달래꽃이 간간이 얼굴을 내민다. 발걸음을 한 발짝 옮기는데 소스라치게 놀라 엉겁결에 발을 크게 옆으로 디딘다. 하마터면 길 한복판에 돋아나는 고사리를 밟아서 그것이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다. 이처럼 무심코 내뱉은 내 말 한마디에 상처 받은 사람은 누구이며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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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왼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며칠 전에 다녀간 조봉산이 얼핏 보인다. 산길 양 옆으로 드문드문 눈에 띄는 만물상의 바위들과 인사를 나눈다. 산재된 바위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면 참으로 희귀한 모양으로 보인다. 그 모양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동기 되어 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가 보다.소나무 숲을 지나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조봉산과 쌀개봉을 잇는 안부를 향해 참나무 군락지의 가파른 경사를 오른다. 안부에서 참나무 숲 사이로 진달래꽃이 안내하는 낙영산 방향으로 오른다. 경사가 급해 호흡이 거칠어질 쯤에 우측으로 조망바위를 만나 금단산과 조봉산을 조망하며 잠시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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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하면서 늘 버릇처럼 그러했듯이 두리번거리며 자연이 주는 선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등산로 옆으로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앉아 있는 바윗덩어리 모습에서 세상 풍파에 시달린 인간의 얼굴을 닮은 ‘얼굴 바위’를 본다. 비록 세월을 이기지 못해 쭈글쭈글해진 얼굴이지만 그 속에서 인자하면서도 평온한 모습을 느낀다. 세상을 다 품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파른 바위를 토대로 늠름하게 살아가는 소나무를 진달래꽃들이 호위하고 있다. 삼지송(三枝松)과 함께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기암들에 빠져든다. 쌀개봉의 또 하나의 명물은 쌀을 닮은 이 ‘쌀 바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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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개봉 고스락을 눈앞에 두고 쌀개봉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조망바위를 발견하고 가던 발길을 멈춘다. 조봉산과 그 뒤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능선들의 춤사위와 저 멀리 속리산 능선도 희미하게 보인다.이곳에서 코뿔소 바위도 조망하고 하산하게 될 남릉도 조망한다. 깊은 골에서 우뚝 자란 소나무 숲을 지나 쌀개봉 고스락에 이른다. 고스락에는 이렇다 할 고스락 돌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산행의 유의미함을 던져준다.왜냐하면 이름을 지으면 그 이름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니 발길 닿는 곳이 다 고스락이라 생각하면 늘 고스락과 고스락 사이를 거니는 기분이 아닐까? 그래서 얻은 것이 없으면 잃을 것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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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개봉 고스락에서 코뿔소 바위로 향한다. 드디어 코뿔소 바위(해발 652m)와 대면하지만 우중이라 오래 머물러 조망을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쉽다. 바위 꼭지에 매달려있는 가냘픈 로프를 잡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한 암릉을 조심해서 내려간다.코뿔소 바위를 내려와서 뒤를 돌아보니 산꼭대기 소나무 아래에서 우비를 지붕삼아 점심 식사를 하는 산객들이 보인다. 그런 산객들의 모습이 푸른 소나무와 바위, 회색빛 하늘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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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바위를 타고 넘자 소나무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는다. 하행하는 산객에겐 잠시 머물게 하고, 상행하는 산객에겐 위험한 구간이니 잠시 쉬어 숨 고르기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즐비한 기암괴석들에 의지해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소나무들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광은 내리는 비조차 무색하게 한다.바위를 타고 올라 암릉 구간을 가야 하지만 비가 와서 우회하는 길을 선택한다. 주능선과 다시 만나는데 빗방울은 더욱 굵어지고 바람은 차고 거칠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이 한 폭의 수묵화 속 전설의 주인공인 신선(神仙)이 되어 산중을 노니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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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하산하고 난 후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니 코뿔소 바위와 쌀개봉을 이루는 암봉 뒤로 조봉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하산하면서 시원한 조망을 기대했으나 우중이라 조금은 아쉽지만, 한편으로 비를 머금은 바위들이 더욱 암갈색으로 짙어지고, 소나무 잎들은 짙은 초록색으로 생기가 넘쳐난다. 이로부터 하나를 잃은 것이 있으면 하나를 얻은 것이 있음을 일깨운다.다시 또 가는 로프에 의지해 바위 절벽을 내려온다. 빗방울이 하산을 재촉하지만 쌀개봉 암릉 구간의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쉽사리 발길을 옮길 수가 없다. 오히려 지나온 암릉 구간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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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새가 삶의 터전인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이 나로 하여금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남릉의 안부에 이르러 우측의 계곡 방향으로 하산한다.참나무 군락지를 지나면서 발목까지 차오르는 낙엽을 밟으며 봄의 기운을 담아간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자연을 비추니 새로운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며 깨어나는 것 같다. 여기저기 재잘대는 새소리가 봄의 왈츠처럼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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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를 때 지나간 갈림길을 다시 만난다. 이곳에서 마을을 관통해 나오면 괴산로와 만난다. 도로를 따라 피어난 벚꽃의 환영을 받으며 상신리 마을회관으로 복귀한다. 꽃은 피어났건만 벌이나 나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니, 이 땅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으니,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잃었다고 슬퍼할 것도 없음을 깨닫게 해준 쌀개봉 산행을 무사히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