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품은 푸대접 안타까운 산 [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남 부여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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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萬壽山, 해발 499m)은 충남 부여군 외사면과 보령시 미산면의 경계를 이루며 차령산맥의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만수산 주변으로 장군봉(해발 530m), 조루봉(해발 575m), 전망대(해발 545m), 비로봉(해발 563m)이 전개돼 있다.만수산의 울창한 숲속에는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천년고찰 무량사(無量寺)를 비롯해 무진암, 태조암, 도솔암 등의 암자와 무량마을을 품고 있다.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더러운 무리와 어울리는 것이 싫어 설악산 등 이곳저곳 오랫동안 방황하다 말년에 물 맑고 숲이 울창한 만수산 기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이번 산행은 ‘무량사 주차장~무량사~등산로 입구~만수산 갈림길~만수산~장군봉~만수산 갈림길~조루봉~전망대~비로봉~태조암~무량사~무량사 주차장’ 원점회귀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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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주차장에 도착해 상가 거리와 ‘만수산 무량사’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넓은 무량사 옛터가 보인다.극락교를 지나면 등산로 입구와 무량사 이정표를 만난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때마침 사시기도 중인 부여10경 중 8경에 속하는 만수산 무량사를 둘러본다.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는 무량사의 천왕문을 통과하여 사찰 경내로 들어서니 고즈넉한 분위가 물씬 풍긴다.청록으로 울창한 느티나무 뒤로 석등과 5층석탑, 극락전이 일렬로 선 모습과 스님의 독경 소리가 속세의 번잡한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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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경내를 나와 매월당 김시습 부도가 있는 등산로 입구로 향한다. 그곳에는 나무판에 앙증맞게 그려놓은 작은 ‘만수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어차피 할 바에 큼지막하게 설치해 가독성을 높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등산로 초입은 잔돌이 깔린 전형적인 산길로 경사가 완만하다. 참나무와 단풍나무 등과 같은 활엽수의 청록이 하늘을 대신한다. 세월을 흐를수록 오색찬란한 빛깔보다 푸른색의 단풍잎이 더 친근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갑자기 성난 듯 가파른 산길을 만나지만 이내 온순해진다. 산비탈을 오르는 내내 잔잔한 푸른 물속을 걷는 듯하지만 간간이 만나는 우뚝 솟은 소나무는 힘찬 파도처럼 눈길을 끈다.한차례 쉬어가며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어느덧 만수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나무 아래에 마련된 평상과 긴 의자가 산객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키고 숨을 고른 후 만수산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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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단풍나무 숲속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잠시 칼날 바위 구간을 내려가면서 산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간신히 방송중계탑이 있는 옥마산(해발 599m) 산등성을 조망한다.내려온 듯한 산길에 이어 완만하게 오르내리다가 만수산 고스락에 도착한다. 그 흔한 고스락 돌은 없고 평상과 만수산 등산안내도, 그리고 이정표가 대신한다. 이곳에서 장군봉까지는 1㎞ 남짓한데 다녀올까 말까 망설인다.산행 계획은 이곳까지였는데, 혹시 더 멋진 풍광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장군봉을 다녀오기로 한다. 우리네 삶도 계획대로 이뤄지는 것보다 우연히 이뤄지는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만수산에서 하늘 높게 자란 참나무 숲속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하행한다.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령호의 물줄기를 몰래 훔쳐보듯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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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설익은 도토리를 매단 채 떨어져 나뒹구는 나뭇가지를 보는 순간, 얼마 전 어른들의 안이함 때문에 수많은 청춘의 생명이 사라진 사건이 되살아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큰 사건 이후에 겪는 트라우마라는 것인가?평탄하게 이어지는 안부 길에는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빛을 투과한 단풍잎이 더욱 진한 청록색을 띠고 성급한 나뭇가지는 여린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상처 난 마음이 힐링을 받는다. 그 아래 마련된 긴 의자가 가을 기다리고 있다.서서히 산허리를 세우기 시작하다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길게 늘어선 바위를 지나면서 자유분방한 바윗돌이 놓인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심장은 요동치고 종아리는 당겨온다. 장군봉이라는 이름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한다.좌측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펼쳐지는 조망이 강아지 간식 주듯 힘차게 오르라고 유혹한다. 이어 솟아오른 바위 군락에 올라 무량사와 무량마을을 포근하게 감싸는 만수산 산등성을 조망한다. 만수산이 마치 거인의 손바닥 위에 놓은 연약한 소인을 애지중지 아끼듯 하니 극락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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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오르막을 올랐으나 맞이하는 것은 완만한 봉우리다. 이곳이 장군봉은 아닐 듯한데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비탈길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하곤 그 길을 따라 하행한다.이어 깎아지른 암봉에 곧추선 나무계단이 아슬하게 걸쳐있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믿고 오르니 감각적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듯 사방으로 막힘없이 이어지는 능선이 너울대며 춤을 춘다. 눈 앞에 펼쳐진 전경에 가슴이 벅차오른다.서쪽으로 만수산에서 뻗어 나간 산줄기와 옥마산 능선, 북쪽으로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만수산 산줄기와 성주산(해발 677m) 능선이 겹겹이 층을 이뤄 이어진다. 동쪽으로 산자락 끝에 펼쳐진 외사면 장하리와 복덕리 들녘이, 남쪽으로 아미산(해발 638m)을 휘감아 도는 보령호가 황홀한 풍광을 연출한다.산악회에서 세운 장군봉 고스락 돌 앞에 평상이 놓여 있고, 이정표는 날개를 잃고 외롭게 몸뚱이만 지탱하고 있다. 천년고찰을 품은 산치고는 관리가 소홀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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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봉에서 천하를 품어보고 다시 만수산 갈림길로 돌아가는데, 산행 내내 괴롭히는 것은 지겹게 흘러내리는 땀도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는 거미줄이다. 거미의 생명줄을 끊기가 미안해 피해 보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아 수차례 거미의 먹이가 된다.만수산 갈림길에 도착해 1,7㎞ 떨어진 조루봉으로 향한다. 수차례 완만한 오솔길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며 오르지만 빈틈없이 들어찬 무성한 숲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대신에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자란 울창한 활엽수 숲길을 이룬 안부 구간을 호젓하게 걸으면서 명상을 즐기는 호사를 누린다. 그런가 하면 오르막길은 어김없이 가파른 돌길이어서 걸음 속도를 더디게 한다.조루봉에 도착했으나, 고스락 돌은 없고 전망대와 화장골 갈림길의 낡은 이정표와 삼각점이 전부다. 왠지 씁쓸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필자가 세월을 많이 보낸 탓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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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루봉에서 약 0.4㎞ 떨어진 전망대로 향한다. 잔돌이 깔린 하행 길은 부드럽게 이어지는 흙길의 오르막으로 얼굴을 바꾼다. 오랜만에 흙길을 밟는 발바닥의 촉감이 머리까지 이를 무렵 낡고 훼손된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전망대에 도착한다.너른 공간 한가운데 산뜻하게 단장하고 산객을 맞는 ‘성주산 전망대’ 정자가 정겹고, 전망데크 앞에는 웃자란 나무들로 조망은 거의 없다. 이곳에는 성주산자연휴양림 등산로안내도와 심원동, 무량사, 화장골의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있다.무량사 방향으로 약간 습윤을 머금은 가파른 흙길을 조심해서 하행한다. 가느다란 밧줄이나마 나무 사이에 매어져 있어 안전 산행을 돕는다. 안부에 닿으니 심원동 갈림길의 이정표를 만나고 이후에 잔돌이 깔린 오르막을 걷는다.돌길을 이루는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이어지는 흙길을 이루는 단풍나무 군락지를 통과하자 태조암 갈림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거리 표시가 들쭉날쭉하여 참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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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저무는데 남은 길은 아직 멀어 산행을 채근한다. 잡초가 무성한 너른 빈터에 세워진 낡은 이정표가 산길이 직각으로 휘어짐을 알린다.이어서 돌멩이가 잔뜩 널려있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 봉우리가 비로봉이라는 기대감이 들자 기진맥진했던 몸에 활력이 생긴다.곧이어 만나는 태조암 갈림길의 낡은 이정표, 그러나 태조암 방향지시판은 땅에 떨어진 채 누군가에 의해 돌에 괘여 있다. 무심하다 무심하다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서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더욱 힘찬 발걸음으로 비로봉에 닿는다. 너른 공간에 고스락 돌은 없고 만수산 성태산 등산안내도와 전망대-휴양림 이정표, 의자 하나가 전부다. 조망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지역의 역사 인물인 매월당 김시습의 작품을 소개하는 안내 글도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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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에서 태조암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가파르고 흔적조차 희미한 산길을 하행한다. 그나마 통나무 계단이 있어 길을 잃지 않고 하행한다. 계단에 이어 자잘한 돌멩이가 깔려 있어서 좀처럼 하산 속도가 붙지 않는다.비로봉에서 0.7㎞를 하행하니 평상과 등산로 안내도, 이정표를 만난다. 무량사까지 2.4㎞라고 하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곳부터 얼마 동안 데크 계단 구간이 이어지는데, 햇살은 점점 황적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작은 계류를 지나 완만하지만 거친 길을 걷다 보면 좌측으로 조잘대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이제 하행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태조암을 지나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무량마을 식수원인 맑고 무량한 물이 흐르는 대보교를 건넌다.이후 도솔암 갈림길을 지나 등산로 통제문을 통과한다. 만수천을 따라 형성된 야자매트 길을 걸으면서 해가 저문 장군봉의 모습을 조망한다. 이어 일주문을 거쳐 무량사 주차장에 도착해 약 12㎞의 수더분한 만수산의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