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룡의 솔깃한 이야기]
예비고사 보기 수일 전, 작은 불꽃이 바람 타고 날아와 쫄보 가슴에 달라붙었다. 불꽃은 이내 뜨거운 불이 되었다. 주성중학교 벤치 위에 파란색 손수건을 펴주던, 공단 오거리 가는 버스에 올라타던, ‘청원제과’에서 단팥빵과 소보로빵을 마주하던, 추운 겨울날 충북은행 앞에
[이재룡의 솔깃한 이야기] <4>
목에 힘을 주고 복학을 했다. 걸음걸이도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걸었다. 청평, 가평, 양수리, 영등포 일대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술독 꽤 부숴버렸던 친구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젠장 모처럼 ‘도꼬다이’로 화신백화점 벽에 붙은 골목 끝 극장식 카바레 ‘초원의 집’을
“얘야, 우체부가 와서 군대니 뭐니 하더니 이걸 놓고 갔다.” 병무청에서 보낸 입영통지서였다. 다음 날 아침나절이 되자 탁탁 대문 밖에서 수곡동사무소 방위가 먼지가 잔뜩 달라붙은 군화 터는 소리가 들린다. “계세요? 계십니까?” 목청을 높이더니 달랑 32절지
40년이 지났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꿀단지 거래처 두 곳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대성중학교 담장 끝에 자리 잡은 제일식품 ‘오뎅공장(어묵공장)’ 그리고 청주교도소 입구 수곡성결교회에 석유 기름을 배달한다. 그즈음 전화번호가 바뀌어 거래처 단골들
주인집 전화번호는 3국 1084다. 청주시 수곡동 83-21번지는 어린 시절 쫄보(겁쟁이)가 동네를 휘젓던 곳이자 집주인이던 청주중학교 수학 선생님의 집 주소다. 쫄보의 사글세 집이기도 하다. 육십이 훌쩍 지난 쫄보가 아직도 자신 있게 외우고 있는 숫자가 일곱 개 있다
바둑판 위에 돌을 깔 때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형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형의 엄지손가락은 화력을 앞세워 먼 곳에 있는 적을 섬멸하기에 최적화된 비장의 무기였고, 검지손가락은 가까이 다가온 적을 정조준하여 가차 없이 도륙하는 첨단 무기였다. 어찌
순간 항문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꽉 조인다.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멎을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똥침 하면 떠오르는 이쪽 세계의 전설이 있다. 양손을 맞잡고 검지를 곧게 뻗은 다음 손가락 끝에 기를 모아 45도 각도로 세워 단 한 번에 상대방의 똥꼬(항문)에
산을 움직이려면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 병간호를 몇 년씩이라도 해보았는가? 아니 수십 년 동안 해보았는가? 간병하는 사람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곁에 아픈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았는가? 만일 내
풀뱀을 선별하기 위해 가든시티 골프 클럽 로비에 들어서자 커다란 초상화가 땅꾼들의 눈에 가장 잘 보이도록 벽면 중앙에 걸려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던가, 13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1951년 캄보디아 전국미인대회 심사위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