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나눔 실천한 ‘음성군의 영원한 어른’… ‘음성 사랑’은 현재도 진행형석재 무역업으로 평곡산업 기반 조성… 50년 동안 어려운 이웃 돕기 지속 ‘가난한 시대’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 제공위해 필요한 인원보다 많이 채용지역인재 양성 위해 설립한 장학회… 200억 적립금 ‘음성장학회’로 성장
  • ▲ 차주원 전 도의회 의장은
    ▲ 차주원 전 도의회 의장은 "옛날부터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 무엇이라도 먹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했다"고 밝혔다.ⓒ양승갑 기자
    후배 충북도의회 의장이었던 유주열 전 의장에게 ‘차주원 전 충북도의장은 음성에서 어떤 분인가’를 물었다. 그는 “차 전 의장님은 평생 나눔을 실천하시는 ‘음성군의 영원한 어른’으로 군민들에게 기억될 분”이라고 말했다.

    충청북도의회 제4대 의원과 제5대 의장, 대한적십자 충북지사 회장을 역임한 차주원(96) 전 의장의 ‘음성 사랑’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지난해에도 3000만원 상당 소나무 두 그루를 음성읍 행정복지센터에 기증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쌀(10㎏) 100포를 기탁했다.  

    인터뷰를 고사하는 차 전 의장을 어렵게 만나 ‘음성에서 평생 어려운 이웃이나 주위를 보살피며 살아오신 이유’를 물었다. “그건 내 태생(胎生)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못 먹어도 못 먹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옛날부터 내가 어렵게 생활할 때도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 무엇이라도 먹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을 뿐 자랑할 만한 것도 못된다.”

    그는 1929년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안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음성으로 왔다. 그는 농산물 수집상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당시는 자전거를 이용해 농촌 마을을 다니며 농산물을 수집해 판매한 이익금으로 생활했다. 

    4남매를 둔 그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공무원 시험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집에서 함께 셋방살이를 하던 경찰서 형사부장이 ‘차 선생을 무엇을 하기에 낮에 힘들게 일하고, 밤에도 잠도 안 자고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자식들을 잘 키우려면 농산물 수집상으로는 살 수 없기에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고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형사부장이 ’시험 공부 접고 돈 버는 일에 주력할 것을 권유했다. 나보다는 세상 물정에 밝은 분 이었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전국을 돌며 농산물 유통 사업을 했다. 규모가 점점 더 커져 수익도 많아졌다. 

    그 무렵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서 일본의 석재 무역상들이 우리나라로 돌을 구매하러 들어왔다. 이 사업이 전망이 있다고 판단해 석산을 매입해 평곡산업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일본 석재 무역을 시작했다. 일본을 오가며 수출 규모가 커졌다. 

    “무역을 위해 일본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항구에 잔뜩 쌓여있는 돌들 대부분이 한국산이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한 번에 많이 실어 보내야만 운임이 절약되기에 업자들이 물량을 많이 보내 값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일본 회사 직원이 100의 물량을 주문하면 80만 보냈다. 나중에는 그가 사정해야만 물건을 보내주고, 값을 높게 받았다. 처음에 8달러였던 제품을 36달러에 팔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우리의 돌을 싸게 사서 가공 작업을 거쳐 비싸게 팔고 있었다. 그래서 평곡산업도 본격적으로 공장에서 가공품을 수출하면서 새로운 수출 시장을 개척했다. 매출도 크게 신장됐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이 제일 좋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고맙다고 하고, 집 앞을 지나는 분들이 ‘차 회장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면 ‘내가 옛날에 도움을 받아 살았기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두가 내 사업을 도와 일을 열심히 해줬기 때문에 내가 성공할 수 있었으니 내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인사를 한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차 전회장은 평곡산업에 필요한 인원보다 늘 더 많이 채용해 '가난한 시대'를 이웃과 함께 했다.ⓒ양승갑 기자
    ▲ 차 전회장은 평곡산업에 필요한 인원보다 늘 더 많이 채용해 '가난한 시대'를 이웃과 함께 했다.ⓒ양승갑 기자
    사업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가는 1970 년대부터 시작된 그의 ‘음성 사랑’은 50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1975년경 농촌의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보고자 사비를 털어 암송아지 55두를 농가에 보급했다. 1980년대 초에는 평곡석재에서 정구 실업팀을 창단해 충청북도 체육 발전에 공헌했다. 산업화 초기에 일할 곳이 없는 어려운 이웃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위해 회사에 필요한 인원은 200명 정도였으나 300명을 채용했다.

    또한 지역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해 장학회를 설립한 것이 오늘날 전국 군 단위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적립액 200억원대의 음성군장학회로 성장했다.
    2004년에는 70세 이상 어르신들이 좀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팡이 7천여 개를 쾌척했으며, 복지사각지대 소외계층을 위해 20년 넘게 매년 150포 가량의 백미를 기탁해 왔다.

    이 밖에도 마을회관과 경로당 부지 기부, 경로당 연탄 지원, 어린이 놀이터 마련, 도로 포장 등 수많은 공로로 음성읍 평곡리와 소이면 충도리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당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 등에 대해 여쭈었다.

    -1970년대에 농가에 소 55마리를 무료로 입식해준 일이 화제가 됐는데요.

    “그때는 송아지 한 마리가 농가의 큰 재산이었다. 농촌에 유휴 노동력은 농촌에 많았지만 이 노동력을 흡수할 만한 공장도 없고, 농촌에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소라도 한 가정에  배분해주면 농가에서 그걸 키우면 유휴 노동력을 활용하게 되고, 가정 경제가 커지면 국가 경제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내 뜻대로 잘 안 됐다.
    암송아지 55 마리를 군에 기탁했고, 1마리씩을 무료 분양해 성축이 돼 송아지를 낳으면 성축은 사육 농가가 갖고 송아지는 다시 무료 분양하는 식으로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계획대로 됐으면 많은 농가에 소 한 마리씩이 무료로 입식됐을 것이다. 그러나 군에서 관리도 소홀했고, 농민들도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팔아서 땅을 사는 분들이 속출했다. 그래서 사업을 중단했다.”

    -지역 인재 양성에도 관심이 많아 장학회를 만드셨는데.

    “현재 ‘음성군장학회’는 매년 300여 명의 중‧고‧대학생에게 많은 장학금이 지급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당시에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할 돈이 없는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처음에 평곡 장학회를 만들어 운영했다. 그때는 내가  음성‧증평‧괴산에 있는 학교들을 직접 찾아가 장학금을 쾌척했다.
    그러다 지역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해 1991년 출향 인사들이 힘을 모아 (재)음성장학회를 설립했다. 당시 기금 3억4900만원이 종잣돈이 돼 2022년 말 장학기금 적립액이 212억원을 돌파했다. 이 같은 규모는 군 단위에서 유례로 찾아볼 수 없는 액수로 지역 동량 육성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 장학금으로 공부해 인재가 된다면 그건 국가의 인재로,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기에 보람된 일이다.”
  • ▲ 차 전 회장은 부인 견종순(93)여사와 음성읍 문화동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양승갑 기자
    ▲ 차 전 회장은 부인 견종순(93)여사와 음성읍 문화동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양승갑 기자
    -일하는 직원을 필요한 인원보다 많이 고용한 특별한 이유는.

    “어느 날 우리집 대문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평곡산업 사장님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우리 아들이 다른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 볼 수가 없는데 같이 살 수 있도록 평곡산업에 취직을 시켜주면 안되느냐고 해서 청을 들어준 적이 있다. 그때는 인원을 필요한 인원보다 많게는 50% 이상 더 고용했다. 음성에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더 만들어주고, 임금을 줄 정도는 됐기 때문에 ‘힘든 시대에 함께 나누며 살자’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했어도 내 소득이나  회사 운영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충북도의회 의장으로 활동하시던 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지.

    “요즈음 도의회는 발전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 도 의장은 의장대로, 의원들은 의원대로 따로 행동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서로가 협조해가면서 도민의 권익을 위해 협력하는 것 같다. 의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소임을 성실히 이행해 내서 도의 행정이나 모든 면에서 발전시켜서 도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도민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그 당시는 의원들이 성실한 의정활동보다 어깨에 힘을 주려고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도의회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차 전 회장은 부인 견종순(93)여사와 음성읍 문화동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70년을 함께한 부부는 요즘은 온천도 가고, 서울, 부산 등 전국을 함께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사진을 부탁드리자 두 분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손을 꼭 잡고 포즈를 취했다. 차 전 의장은 “몇 달에 한 번 정도는 ‘그것도 못하느냐’고 말할 때도 있지만 아내는 나의 평생 동반자로서 나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소중하고, 귀여운 사람”이라며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