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산사와 고요한 자연의 맛[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제천시 편
-
감악산(紺岳山, 해발 945m)은 충청북도 제천시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와의 경계에 우뚝 솟아 있는 ‘가고 싶은 산 충북 50선’에 속해 있다. 이 산을 오르기 위해 승용차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백련사(제천시 봉양읍 명암로5길 414)로 설정하고 출발한다.제천시 명암로5길의 2차선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원주시 제원로14길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명암로5길 1차선으로 들어선다. 삼거리 입구에는 ‘감악산 등산로 안내도’가 빛은 바랬어도 웃음으로 반갑게 맞는다.이후 승용차로 약 2.5㎞를 이동해 해조음문화원(海潮音文化院)에 닿으니 통행차단기가 앞을 막아선다. 차단기 앞 넓은 공간에 승용차를 주차한다. 산행 기점을 백련사 주차장에서 이곳으로 변경하고 산행을 시작한다.계획이 틀어져서 약간은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잠시 일어난다. 이런 옹졸한 마음은 조잘대며 흐르는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니 수그러든다. 그러다가 백설과 얼음으로 뒤덮인 구불구불하고 경사진 도로를 오르자 유연히 감사한 마음으로 바뀐다.
-
희비에 꺼들리는 마음을 다잡아도 또 흔들리니 어쩔 수 없는 범부(凡夫)다. 고도를 높이자 몸에 열기가 나기 시작한다. 차갑게 느껴지던 산속의 공기는 어느새 시원하고 맑은 공기의 느낌으로 살갗을 스친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몸속의 찌든 욕심을 입으로 잔뜩 토해낸다.백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길을 밝히니, 그 모습이 마치 지혜의 상징인 문수동자가 길을 안내하는 듯하다. 모든 생명이 숨죽이며 조용히 기다리는 계절, 산바람마저 잠들어 고요를 더한다.어디선가 적막을 깨는 딱따구리 소리가 스님의 목탁 소리처럼 산중에 울려 퍼진다. 이 울림같이 “나답게 사는 행복”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하얀 눈길을 차근히 밟으며 구불구불하고 경사진 길을 오른다.길옆 ‘감악산 샘물’도 갈색 낙엽을 이불 삼아 기나긴 동면 중이다. 주차장에서 2.1㎞를 이동하니 좌측으로 감악고개, 우측으로 백련사 입구인 세거리에 닿는다. 우측으로 이동하여 감악산 능선과 조화를 이룬 백련사(白蓮寺)를 만난다.
-
사찰의 지붕 위로 짙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감악산 능선이 하나의 획을 긋는다. 그 선상에 배꼽처럼 튀어나온 일출봉 및 월출봉과 눈을 마주치니 첫 맞선을 보듯 두려움과 설렘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백련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이 백련암으로 창건했으며, 절 앞 연못에서 흰 연꽃이 솟아 피어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일주문, 삼성각, 사천왕문을 지나 극락전에 들어 아미타불께 삼배하며 요동치는 가슴을 가지런히 한다.무명을 벗어나지 못함을 참배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답게 사는 행복”을 누리고, 우리의 안전산행을 기도한다. 경내를 나와 꽁꽁 얼어붙은 감로수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 옆으로 등산 리본이 달린 경사진 산길을 따라 감악산 정상으로 향한다.선행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하얀 눈길을 오른다. 산비탈에는 세워진 돌탑을 바라보면서 불쑥불쑥 솟아났던 욕심을 하나, 둘 내려놓는다. 필자의 성근 머리털이 반짝이는 두피를 드러내는 것처럼, 앙상한 활엽수 나무줄기 사이로 하얀 속살이 눈부시다.
-
‘성벽 바위’에 매달린 고드름이 호된 추위의 수행과정을 거쳐 득도한 노인의 백발수염처럼 고상하고 풍성하게 익었다. 백련사에서 0.8㎞를 오르니 백련사 갈림길에 닿는다. 이곳에서 감악산 정상까지는 0.2㎞, 석기암까지는 3.6㎞이다.이정표에서 동쪽으로 조망 포인트에 서니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묵묵히 걸어온 길이 주는 선물이다. 그것을 감상하느라 아직 정상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 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이마에 그어진 삶의 흔적처럼 주름이 가득한 바위들을 만난다.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온갖 풍파를 견디며 서 있는 저 바위들은 변화무쌍한 인간 세상을 가엾다고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산객이 남겼을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마냥 지켜만 보고 있다.길을 오르면서 일출봉 바닥 틈새를 올려다보니, 마치 부처님 발바닥처럼 생겼다. ‘감악산 정상’ 이정표에 도착해 석기암 방향으로 몇 걸음을 이동한다. 그곳엔 갤러리에 걸린 다양한 동양화처럼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
이정표로 돌아와 정상석이 있는 ‘일출봉(선녀바위)’을 오른다. 눈과 얼음으로 뒤범벅이 된 암벽을 밧줄에 의지해 오른다. 어렵지 않게 첫 단계를 통과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가 난관이다.좌측으로 징검다리 바위 3개를 건너뛰어야 정상석에 닿을 수 있지만 동행한 아내가 포기한다. 우측으로 접시 바위를 기어올라야 일출봉 꼭대기에 오를 수 있지만, 백설이 그대로 남아있어 위태롭다.아내가 위험할 것 같아 그냥 내려가자고 했으나, 당신이 먼저 우측으로 접시 바위를 기어올라 꼭대기에 닿는다. 그녀는 필자가 산 정상에서 사진 촬영을 즐기는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 마음을 헤아려 말없이 큰 용기를 낸 것 같다.
-
꼭대기에 오르니 널찍하고 평평한 암반과 천하를 지키는 장수처럼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자리한다. 사방으로 탁 트인 능선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 안에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꿈결처럼 아스라하다.넋을 놓고 바라보다 눈과 마음에 전경을 담기 시작한다. 동쪽으로 석기암, 감암봉, 용두산 방향을 조망한다. 북서쪽으로 월출봉(동자바위), 감악 3, 2, 1봉, 그 뒤로 시명봉, 응봉산, 치악산을 바라본다.늘 산 정상에 서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러니 뭘 조금 안다고 잘난 체하고 뽐내며 우쭐댈 여지가 없다. 장엄하게 펼쳐진 자연 앞에서 한 티끌에 불과하니 저절로 겸손해진다.하늘과 통하는 감악산 정상에서 천기(天氣)를 받고, 발아래 펼쳐진 안정한 땅에서 솟아오른 지기(地氣)를 가슴에 담아 또 내일을 향해 “나답게 사는 행복”을 꾸려간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감악산 정상석으로 일출봉의 주름을 발판 삼아 조심해서 바위를 내려간다.
-
정상석과 접선을 하고 일출봉 꼭대기 암반 위에 서 있는 소나무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번엔 필자가 아내보다 먼저 말없이 3개의 징검다리 바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아내에게 할 수 있고 괜찮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도약 거리가 짧아 간신히 세 번째 징검다리 바위에 닿은 아내의 손을 붙잡아 이끈다. 이렇게 오늘도 둘이서 무사히 한고비를 넘는다. 삶이 다 이런 것이 아닌가? 이 모습이 늙어가는 부부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아닌가 싶다.옛날 엄마와 아버지처럼 비록 주고받는 말이 투박해 보일지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끈끈한 정이 통하는 그런 모습을 필자도 어느새 그대로 닮아 가고 있다.일출봉을 내려와 이정표 앞에 놓인 돌덩이에 앉아 따뜻한 컵라면으로 요기를 한다. 그러면서 충북도청과 제천시청에서 이정표 관리와 일출봉 안전설비 설치에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이제 월출봉(감악바위 또는 동자바위)을 향해 우뚝 솟은 일출봉 옆으로 밧줄을 잡고 돌아간다. 이어 하늘의 기운이 드나드는 통천문(通天門)에서 천지의 기운을 받는다. 천삼산-황둔리 갈림길에서 황둔리 방향으로 이동한다.이동 중에 나무줄기 위아래로 두 군데에 끈이 꽁꽁 묶인 두 그루의 나무를 발견한다. 두 나무 사이에 플랜카드를 걸었던 모양이다. 네 군데 끈을 다 풀어주니 그동안 묶인 자국이 선명하다. 푼 끈을 배낭에 넣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인간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미안함이 든다. 용서해 달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무심하게 길을 재촉한다. 산 비탈길을 지나자 감악 3봉으로 가는 능선 방향과 감암산성(紺巖山城)으로 이어지는 계곡 방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만난다.
-
나뭇가지에 가려진 반듯한 모양의 월출봉을 옆에 끼고돌아 계곡 방향으로 눈길을 하행한다. 눈을 밟은 소리가 귀를 밝게 하고, 수북이 쌓인 눈의 부드러운 촉감이 무릎을 편하게 한다.포근한 날씨에 상고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백설의 비탈길에 꽂아놓은 앙상한 나뭇가지가 연출하는 흑백의 묘미를 즐긴다. 남길 만큼만 남긴 순수한 자연 속에서 당장 쓸모없는 내 모든 잡념을 버리고, 순수하고 참다운 나를 찾아보는 순간이다.하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녀오지 않은 감악 3봉과 2봉을 돌아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애써보려 하지만 신통치 않다. 가파른 능선은 완만하게 얼굴을 바꾸고 드문드문 수령이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구하게 사는 삶의 방식을 일깨우는 듯하다.
-
모를 심어 놓은 듯 백설의 비탈에 박힌 참나무가 즐비하다. 입춘을 앞둔 포근한 날씨 탓인지 필자의 마음에는 그들이 연초록 새싹을 돋을 준비를 하느냐 분주하게 움직이듯 하다. 우리도 내일의 또 다른 삶을 위해 지금에 충실하며 살기로 한다.힘들게 산의 정상에 올라 짊어진 삶의 무게를 무변광대(無邊廣大)한 공간으로 바람과 함께 실려 보내고 하산한다. 마음은 새털처럼 홀가분하고 발걸음은 사뿐히 편안하게 이어간다. 이 맛에 산행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하얀 눈 속에서 정성이 깃든 작은 돌탑이 홀연히 나타나 하심(下心)하라 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 밑동이 바위와 연인처럼 정겹게 포옹한다. 완만한 눈길은 울퉁불퉁 돌멩이들이 솟은 길로 바뀐다. 이곳이 감암산성(紺巖山城)의 성터인 듯하다.
-
이 산성은 천연암벽과 석축으로 성벽을 이루고 있으며, 백련사를 감싸고 있는 형태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짧게 이어진 산성길 끝자락에 닿자 우측으로 내리막길이 감악고개로 이어진다. 아무런 표식이 없지만, 좌측으로 가면 백련사 입구로 이어질 것 같다.이런 촉감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좌측으로 들어서길 원한다. 세상사가 어찌 내 마음대로 다 되겠는가? 감악고개가 필자와 인연이 아니려니 한다. 계획을 수정해 좌측으로 능선길을 따라 내려간다. 백련사가 눈에 들어오고 월출봉(좌)과 일출봉(우)을 가까이 조망한다.산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두 발로 걸어야 정상에 닿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평등함을 깨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인위적인 곤드라, 케이블카 등의 설치는 자연이 주는 평등을 불평등으로 만든다. 오늘도 “나답게 사는 행복”의 이야기를 한 줄 엮는다.백련사 입구에서 감악산 능선을 바라보고 올랐던 길을 내려간다. 이번 산행은 ‘해조음문화원 앞 주차장~백련사 입구 갈림길~백련사 갈림길~감악산 정상~통천문 바위~월출봉 바위~감악산성 구간~백련사 입구~해조음문화원 앞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약 6.24㎞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