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의 精氣 온새미로 느낄 수 있어[진경수의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여행] - 충북 괴산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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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소백산맥의 능선에 속한 이만봉(해발 990m)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위치한다. 이 산은 괴산군의 최고봉인 백화산(해발 1063m)과 희양산(해발 999m)의 중간에 위치한다.분지리마을회관(도막마을)에 주차를 하고 분지길 도로를 건넌다. ‘이만봉 등산 안내판’을 보고 산행코스를 확인한다. 이곳 ‘도막’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 권율이 군막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오늘의 산행은 ‘도막~갈림길~이만봉 고스락~곰틀봉~사다리재~묘~안말~도막’의 코스이다. 이정표를 따라 연풍 별당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연풍 별당으로 가는 도중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에서 길을 벗어나 곧바로 직진하여 등산 리본 달려있는 등산로로 들어선다. 풀들이 무성해 등산로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 계곡에 이르렀으나 그곳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 산등성이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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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를 청초하게 장식한 싱그러운 풀잎이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있다. 우리네 삶도 이처럼 잠시 영롱한 시절을 보냈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그래서 초로(草露)같은 인생이라 일컫는가 보다. 그저 잊고 사는 게 영롱한 삶이 아닌가 싶다.산등성이를 오르면서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고, 단풍나무와 참나무들이 뒤섞여 만들어 놓은 짙푸른 신록의 숲바다를 오른다. 간벌로 흩어진 나무들의 흔적을 넘고 또 넘어서 오르고, 잔잔한 바위가 깔린 구간도 지난다. 그러면서 마음에는 잡념이 사라지고 자연에 동화된다.수령이 꽤 된 것으로 보이는 참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늙어서도 저 노목처럼 곧은 가지에 청정한 잎을 간직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그늘이 됐으면 하는 원(願)을 세운다. 이어 시루봉(1.4㎞), 이만봉(1.8㎞), 분지저수지(2.6㎞)로 갈라지는 첫 번째 세거리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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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모습의 등산로 주변 경치는 산행의 지루함을 달래주려고 일부러 치장해 놓은 것 같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그윽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매력적이다.첫 번째 세거리에서 흙길을 0.4㎞ 정도 이동하면 두 번째 세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이만봉(1.4㎞), 시루봉(1.8㎞), 구왕봉(4.7㎞)으로 갈라선다.두 번째 세거리에서 돌길을 0.6㎞ 정도 진행하면 세 번째 세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이만봉(0.8㎞), 시루봉(1.7㎞), 도막(2.3㎞)으로 갈라지는 곳이다. 세 번째 세거리부터는 거의 암릉에 가까운 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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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봉으로 진행하면서 우측 방향으로 희양산이 조망된다. 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 필자의 머리를 보는 것 같아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했던가. 그렇지만 저 산처럼 위용을 갖췄는지는 모를 일이다.숲속에 가로 누워있는 용처럼 생긴 암반 위를 걷는다. 이것이 혹시 ‘용바위’이가 아닌가 싶다. 이만봉 등산로는 뚜렷한 경관이 없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더 좋은 경관이다. 마음 빼앗길 염려가 없으니 마음 수양을 위한 포행하기 참 좋은 곳이다.잠시 조망이 터지면서 도막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황학산, 조령산, 주흘산의 산등성이가 보인다. 길가에는 하얀 꽃송이를 가지마다 달고 있는 백당나무꽃이 반갑게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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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새로 가로질러 내려가면 첫 번째 밧줄 구간을 만난다. 이 바위를 넘어 진행하다보면 우리 산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조망 바위를 만난다. 이곳에 서면 이만봉 능선에서 뻗어 나와 솟아 오른 곰틀봉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이만봉 고스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진행하는 우측 방향으로 널찍한 바위를 만나는데, 이 바위가 등산로 안내판에 표시된 마당바위가 아닌가 싶다. 이어서 두 번째 밧줄 구간을 힘들이지 않고 내려올 수 있다. 참나무 숲의 녹음(綠陰) 속으로 빠져들어 이만봉 고스락을 향해 간다.용트림하는 나무뿌리를 지나 바위가 층층이 쌓여서 자연 계단을 형성한 암릉을 오르면 이만봉 고스락(李萬峰, 해발 990m)에 도착한다. 고스락 사방은 숲이 우거져서 전망은 없지만, 주변에 앉을만한 바위가 서너 개 정도 있다.‘이만봉’이란 이름은 옛날 만호(萬戶)라는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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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봉 고스락에서 하산은 곰틀봉으로 한다. 하행하면서 펼쳐지는 탁 트인 조망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곰틀봉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하고, 백두대간의 산등성이에 위치한 저 멀리 백화산도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이렇듯 이만봉은 독립된 산이라기보다는 황학산·백화산·시루봉·희양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능선이다. 산을 내려가면서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이부자리를 삼아 살고 있는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싶다. 천지(天地) 사이의 공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지금 이 시간이 참으로 덧없이 흘러만 간다.하행 구간이 끝나고 이제 곰틀봉을 오른다. 상행 코스는 주로 암릉 구간이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공허한 하늘을 등에 지고 곰틀봉을 향해 돌계단을 오를 때, 양지(陽地)만을 지향하기보다 한번쯤은 음지(陰地)를 바라보는 것도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화두(話頭)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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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부드러운 곡선의 이만봉이 보인다. 이어서 사방이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이 마치 필자가 새가 되어 자연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낀다. 산에 오르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감동이 그 자체이다.시루봉·희양산·구왕봉·황학산·백화산·조령산·주흘산 등을 조망한 후, 키가 작은 참나무 숲길을 사뿐사뿐 걸어 들어가니 참나무에 ‘백두대간 곰틀봉’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곰틀봉이란 이름은 옛날에 곰이 있어 곰 잡는 곰틀을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곰틀봉 고스락의 참나무 숲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또 다시 황홀한 전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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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틀봉에서 사다리재로 하산하는 산길은 돌산이고, 급경사라 조심해야 한다. 백두대간의 능선을 바라보며 하행하기 때문에 먼 산을 바라보다가 자칫 칼바위에 다칠 우려가 있다.우리네 삶도 곳곳에 위험한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산행에서 등산로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처럼, 도리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한 삶이 아닐까.이제 사다리재의 세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백화산까지는 4.8㎞, 이만봉은 1.2㎞. 분지안말은 1.9㎞이다. 안부에서 곰틀봉 방향을 바라보니 힘든 여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분지안말로 하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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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재에서 분지안말로 하산하는 길은 매우 거칠고 경사지다. 너덜지대가 길어서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뿐더러 안전사고에 각별히 신경써야하므로 피로가 가중된다.너덜지대 하산의 피곤함을 달래주듯 함박꽃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하얀 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순수한 웃음을 짓는 함박꽃나무의 꽃에서 청정한 기운을 몸과 마음으로 흠뻑 받는다.너덜지대가 끝나면서 흙길이 시작되고, 잠시 후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청량한 물소리와 명랑한 새소리가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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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머리를 빠져나오면 계곡을 따라 분지안말 마을로 들어간다. ‘백화산과 이만봉 등산안내도’를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도막마을까지 약 1.8km을 이동한다.길가에 핀 노란색과 보라색 붓꽃이 무탈한 산행을 축하하며 환송한다. 분지리마을회관(도막)에 도착하여 대략 10㎞의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