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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가 나일강의 선물이라면 ‘상당산성’은 청주시민을 위한 선물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에 위치한 상당산성은 그 명칭이 백제시대 상당현에서 유래한다.
상당산성은 상당산과 산성이 합쳐진 말이어서 원래 상당산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청주시민들 대부분이 상당산보다 상당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변에는 서쪽으로 우암산, 남쪽으로 낙가산, 북쪽으로 백화산이 봉긋 봉긋 솟아있다.
이로 인해 상당산성에 오르는 길은 서쪽 충북도청에서 출발해 우암산~생태통로~상당산성으로 향하는 우암산 코스와 남쪽 용암동 성당~낙가산~상당산성으로 향하는 낙가산 코스, 북쪽 충북지방경찰청~백화산~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백화산 코스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우암산 코스로 정하고 겨울 게으름을 날리기로 했다.
우암산 코스는 도청에서 출발해 청주향교를 출발지로 하거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지역 인사의 동상이 있는 ‘3·1공원’, 청주대 등 다양한 접근 지점이 있다.
이들 가운데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은 청주향교를 통해 우암산을 거치는 코스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등 휴일에는 충북도청이나 인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한 뒤 버스를 타고 내려와 귀가하는 방법이 선호되고 있다.
이 산행길은 충북도청에서 출발해 처음 만나는 청주향교가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벌써 부풀게 한다.
과거 면학에 힘쓰길 권장했던 선인들의 글귀와 이따금 열리는 고전 강독회나 출판기념회, 경로잔치 등이 산행 후 뭔가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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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벗어나 우암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는 ‘우암산 걷기길’ 푯말을 만나게 된다.
오르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해 준다.
야생화와 함께 각종 초목에 대한 설명을 해 놓은 푯말도 눈에 띈다.
겨울이라 해당 초목에 대한 자세한 생김새를 알 길이 없지만 다음 계절에 만나면 어떤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날지 자못 궁금해진다.
산은 겨울 가뭄 탓으로 메마르고 이따금 먼지가 날리는 곳도 있다. 신발 바닥이 닳았다면 일부 구간에서는 접지력이 약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산행을 많이 다녀 본 사람들도 빨리 오르다보면 경사가 가파라 쉽지 않은 코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서 완만해 그럭저럭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이내 숨이 차오른다.
산행길 근처에 옛날 토성이 있던 자리라고 푯말을 해 놨는데 이해가 간다.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곳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방어진지를 구축했을리 없기 때문이다.
토성 자리라고 해 놓은 곳을 따라 산허리를 감아도는 길게 난 오솔길도 있다. 우암산 정상으로 가지 않고 “아, 이제 숨도 찼으니 몸이나 풀고 가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번 가봄직하다.
아마 아침이나 저녁 산행을 자주하는 사람이라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암산 토성 자리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면 코스를 달리해 올라온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로 치솟은 전나무와 그 가운데 위치한 운동기구를 차지한 사람들이 숨을 몰아 쉬어가며 포근해진 날씨에 약해진 동장군의 기세를 누르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한편에는 천막에 각종 운동기구를 설치해 ‘천연 헬스장’을 조성해 놨다.
도심 속 헬스장보다는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괜찮을 듯 싶었다.
사람들을 뒤로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왔던 경사보다 더 급경사였다. 거북이 걸음이다.
토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계단을 만들어 놨지만 바위와 나무 등 장애물이 있는 곳은 지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지만 또 경치가 붙잡는다.
중간 중간 짧은 평지에 양 옆으로 트인 하늘로는 겨울 햇볕을 쬐며 웅크린 나무들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맞춰 손짓을 한다.
천천히 가라고.
우암산 생태통로에 이르자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앉아 겨울 빛을 만끽하고 있다.
이제부터가 사실상 본격적인 산행이다.
4㎞ 남짓한 코스는 완만하다가 급경사가 반복됐다.
여름에 왔을 때에는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던 나무들이 이제는 겨울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다.
첫 번째 경사로에 이르자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았던 후유증(?)이 벌써 나타났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뻐근해지는 느낌이랄까.
경사로를 몇 번 지났을까. 이번에는 숨이 턱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를 올라서야 비로소 산 중턱에 있는 정자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해 잠깐 누웠는데 사람들이 몰려왔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정상을 향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근육 압박 구간이다.
산을 많이 올라 본 사람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지만 도저히 따라 잡을 여력이 없다.
돌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언덕을 지나자 마침내 샘물에 도착했다. 샘물을 기대하고 생수통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열쇠 꾸러미 하나도 천근처럼 느껴지는 게 산행인데 500ml 두 병이면 허리가 끊어졌을 듯(?) 했을 것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바위 모퉁이를 돌아서니 상당산성 정상이다.
북서쪽 방향 오창의 넓은 뜰이 눈에 들어왔다.
청주 서부와 오창의 랜드마크가 된 건물들은 더욱 확연해졌다.
산성의 소나무에서 부는 바람은 땀에 젖은 등산객에게 오늘도 청량제였다.
산성 남문에 도착하니 넓은 광장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도 놀러 온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지만 이날은 썰렁했다.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한 이들만 벌써 하산하느라 걸음을 재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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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내려와 보는 저수지는 여전히 아담하고 친근하다.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올 겨울은 꽁꽁 언 얼음을 구경할 수 없다.
낚시가 금지된 곳이어서인지 물고기들은 살맛났다. 붕어와 잉어 무리가 물가 얉은 곳까지 나와 몰려다니고 있었다.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는 아직 멀었지만 이곳은 이미 개구리가 봄 기운에 놀라 깬다는 경칩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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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산행객을 대상으로 떡과 도넛, 엿을 파는 할머니는 오늘도 나오셨다.
상당산성을 자꾸만 찾게 하는 것은 등산의 즐거움만은 아니다.
산성마을을 가득 메운 각종 식당은 산행의 피로를 잊게 하는 유혹이다.
등산객들에 인기가 높은 음식 가운데 청국장이 손에 꼽힌다.
아마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음식일 것이다. 여기에 ‘막걸리’와 ‘두부김치’, 해물파전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곳 식당 대부분이 이들 메뉴를 기본으로 마련하고 있다. 메뉴판 상단에 올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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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가며 청국장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느티나무 식당’을 선택했다.
넓은 내부에는 나무 난로 두 대가 열기를 뿜어냈다. 하나는 작고, 하나는 이보다 조금 더 컸다.
나무 타는 냄새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어릴 적 소죽을 쑤거나 잔칫날 가마솥을 걸어놓고 동태찌개를 끓이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식당은 가볍게 어린 배춧잎 몇 개를 넣고 청국장을 내놓는다. 나물 반찬으로는 무생채, 열무김치, 묵은나물, 콩나물이다. 비벼먹기에 딱 좋다. 매운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추장으로 덧칠하면 된다.
막거리는 한 잔으로도 팔고, 주전자로도 판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한 잔 술로 시작하면 금세 한 주전자가 바닥을 보인다.
가벼워진 주전자만큼 한 주 간의 피로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술을 끊은 지 4년이 다 돼가지만 이곳에서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어렵다.
산행 후 내려가는 길은 부상의 위험이 높다. 한 잔 걸치면 하산은 그만둬야 한다.
그래서 상당산성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상당산성 산행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싶은 것이다.
부담이 없다. 다음 주 다시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