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핵심키워드·답은 성심당’에…‘사람·사회 먼저 생각’1순위는 내부고객 ‘직원 만족’…정양SG 맹세‘제4의 경영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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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권 ㈜정안SG 대표이사(70, 충남 공주시 송산농공단지로 39)는 “저는 늘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은 ‘운(運)’을 잘 타고 나야 한다는 한다. 운을 잘 타고 난 사람은 다 주어진 운명대로 산다”며 사람의 운명론부터 꺼냈다.그는 “다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보면 날고뛴다고 해도 그 손바닥에서 움직인다. 그냥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역량이 다 다르므로 나 자신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고 거기에 맞춰서 내가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살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젊어서부터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자’가 핵심 키워드”라고 말했다.그러면서 “나로 인해서 상처받거나 손해를 보는 삶을 살지 말자는데 그게 쉽지 않다.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정말 어렵다. 만만치 않아. 알게 모르게 이렇게 말 한마디 던진 게 그 사람한테 상처를 준 경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라는 점을 강조했다.안 대표는 고려대 건축학 재학 중 시기를 놓쳐서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그는 ‘사병’으로 가기 싫어 동기와 고민 끝에 해군과 공군 중 10원짜리 동전 한 주먹을 던져 가장 많이 나온 면이 공군이어서 공군을 선택했고 다행히 합격해서 훈련을 받고 공병 장교로 입대했다. 임기 5년인 교육사령부(대전)에 공군 장교로 임관한다.“그러나 기대했던 대전 연고지 배치는커녕 ‘백’이 없는 충청도 출신은 교육사령부 산하인 사천 비행장으로 쫓겨갔다. 시설 장교로 사천 비행장 시설단 소위로 배치됐다. 행정계장이자 대대장의 비서로 1년 동안 내가 모시는 동안에 내 인생의 어떤 기본 틀이 딱 잡힌 거야. 좋은 분을 만난 것이지.”“김윤제 대대장은 나를 호되게 다뤄 마음의 상처를 많았지만, 힘든 과정을 거치는데 진심으로 그분이 나를 아껴서 그랬던 거야. 김 대대장은 하나하나의 과정을 질문하듯이 ‘너 그거 알아. 너 대학교 나온 거 맞아.’ 이런 식이었다. ‘너 머리가 그렇게 좋아’. 메모(적자생존)를 하란 뜻이었다. 딱 1년을 모셨는데 그분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서울고와 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합격을 했다. 문제는 조종사를 하기에는 ‘눈’이 문제가 돼 결국, 공사 간부들은 김 대대장이 너무 똑똑하고 아까운 인재니까 후방 장비 분야에 근무하도록 조처했다. 이런 분이 처음 대대장을 나오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싶고,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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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에서 힘들지만 정말 많은 걸 배웠고 그중에서 두 가지 핵심 키워드를 배웠다. 상급부대에서 감사가 나오면 바짝 긴장하기 마련인데, 우리 부대에 감사원 감사가 처음 으로 나왔는데 그 때 상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김 대대장이 감사관과 차담을 하면서 많은 것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우리가 허위로 한 것이 없으니 잘 모르는 부분이 있에 대해 지적해 주면 우리가 배우는 거 아니냐. 처음엔 감추려고 하지만, 대대장이 감사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또 하나는 브리핑과 PT다. 1976년 공군은 ‘우의’의 질이 좋았는데, 사병들이 우의를 보급받은 뒤에 휴가 가서 집에다 두고 그냥 오는 거야. 그러다 보니 우의가 부족했어. 피복 검사에서 걸려서 이걸 소위부터 단장까지 문책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단장이 부족한 우의를 언제까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대대별로 조사를 해서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행정계장인 내가 브리핑 차트를 만들고 대대장이 보고하면 끝난다. 그런데, 대대장이 갑자기 차에 타라는 거야. 차를 타고 비행단 지휘본부에 가니까 대령‧중령들이 앉아 있고 단장(준장)이 딱 버티고 앉아 대대별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나는 ‘잔뜩 쫄은 상태’로 벽에 딱 붙어서 있는데, 브리핑하는 간부는 10~ 20분간 땀이 줄줄 흘렸다. 그런데 단장은 다른 데 쳐다보고 있어, 보고 내용에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우리 대대장의 차례가 됐는데, 기초적인 현황 등 5장을 건너뛰고 시설대대는 몇 개 우의를 수령해서 몇 개 가지고 있고 몇 개 과부족이다. 언제까지 어떻게 해서 해결하겠다고 보고하는 거야. 단장으로서는 이것이 핵심이잖아. 단장이 ‘오케이’하는데 1분도 안 걸렸어. 대대장과 차를 함께 타고 대대본부로 가는 도중 대대장은 ‘브리핑 뭔지 알아’라며 선문답을 했다. 대대장은 나에게 핵심 즉 대상자들을 상대로 해서 PT(발표) 만들고, 브리핑을 하고, 설득하는데, 그 사람들이 뭐가 궁금한지,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군에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안 대표는 공군 장교로 5년간 장기 근무를 마치고 1980년 대림산업에 취업했다. 면접관이 ‘해외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고 하는 것과는 핀트가 완전히 틀렸지만, 내가 되려 물었어. 회사에서 필요하면 아프리카는 못 갑니까? 그랬더니 ‘오케이’하며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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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0년 11월 선발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갔다. 대학 2학년 때인 1973년에 ‘오일쇼크’가 발생했으니 아주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OPEC 결성을 주도하고 세계 석유시장을 좌지우지 했던 사우디 아메드 자키 야마니(1962년) 석유상이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현장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다란 ‘UPM(석유광물대학,1986년 파드 왕 석유 광물대학으로 교명변경)’이었다. 내가 1천여 명이 투입된 현장의 공무 팀장을 맡게 됐고, 다란 공항 인근 페르시아만 옆 사막으로 가게 됐다. 중동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된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서 1963년 UPM 대학을 설립하는데 거기에 야마니 석유상이 서둘러 오퍼레이팅을 키우기 위해 막 밀어붙였다”고 했다.그가 열사의 나라 사막에서 근무할 당시 대한민국은 부족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오일머니’를 확보에 혈안이 됐다. 안 대표는 대림산업 사막 공사현장에는 공군에서 배운 노하우가 투영돼 현장 재시공 리스크를 확 줄이는 등 현장작업 시스템을 확 바꿨다. 이어 대림산업이 흑자를 내면서 오일머니를 확보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그는 사막에서 근무 당시 ‘대림산업 이준용 양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특진에 특진을 거듭 과장을 맡았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년을 근무하면 국내 근무 옵션이 지켜지지 않고 또다시 사우디아리비아로 발령을 내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대전으로 돌아온 것이 ‘인생의 나침판’이 다른 부분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안 대표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젊은 혈기만 믿고 대전으로 내려와 건축과 건축 분야 컨설팅을 하려고 했던 생각이 스티로폼 공장에 베팅했다.“‘제조업은 생물’이다. 한눈파는 순간에 ‘훅’ 갈 수 있다. 39년을 이 일을 못 놓고 지금까지 이렇게 하고 있다.그는 제품 제조 과정만 제대로 프로세스만 짜면 가능한데 중간에 필요로 한 것은 전문가들을 제대로 선택해서 집어넣으면 되는 등 그 부분을 읽게(알게) 됐다.”나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근 ‘성심당에 답이 있다’는 책(빵 더하기 빵 더학 빵빵빵)을 읽었는데, 성심당의 기본정신인 핵심키워드는 ‘나눔’이다. 매일 남는 빵이 없다. 그날 구은 빵을 어려운 이웃에 보낸다. 책에서 ‘빵은 먹거리이자,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게 하는 매개체도 될 수 있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나눔은 성심당 같은 정신으로 해야 한다. 우선 제1순위는 내부고객 직원들의 만족”이라며 ‘행복한 젖소가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논리와 맥이 닿아 있다.“우리의 목표는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 노력하는 것”이라는 안 대표는 “1986년도 이 사업을 책임지면서 만든 것이 ‘정양SG 맹세’다. 지금은 AI 시대이지만, 아날로그 시대에 만든 정양SG 맹세는 내용을 바꿀 게 없을 만큼 여기에 다 함축돼 있다. 이것이 정양SG의 ‘제4의 경영자원’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