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존재하고 어디로 가는지 반성이 아나키즘 정신 발전 과제”“아나키즘 시작은 프랑스 혁명…자유‧평등‧박애 3대 모토”세종 부강 ‘홍판서댁’서 강연… 아나키스트‧세종문화해설사 등 참석
  • ▲ 지난달 31일 세종시 부강면 홍판서대 고가에서 이문창 한국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이 아나키스즘 등에 관한 강연회가 열렸다.ⓒ김정원 기자
    ▲ 지난달 31일 세종시 부강면 홍판서대 고가에서 이문창 한국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이 아나키스즘 등에 관한 강연회가 열렸다.ⓒ김정원 기자
    2019년 8월의 마지막 날인 지난 31일 세종시 부강면 전통한옥 ‘홍판서댁(국가민속문화재 제138호)’에서 일제 강점기 부강에서 7년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보기 드문 이색적인 강연이 이뤄졌다.

    부강은 일제 강점기 박열 의사(1902~1974)의 연인이자 박열의사를 도와 일왕을 폭살을 기도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부강8리 용포부락 359에서 살았던 곳이다.

    이날 강연은 이규상 전 부강면장(60‧전 청주시 공무원)과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60)가 주최했으며 가네코가 부강에서 생활했던 당시 부강초등학교(부강심상소학교)를 다녔던 그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 전 면장은 “가네코의 부강생활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반일(反日) 조선인 취조 및 고문으로 인한 고통소리와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만세 등을 불렀던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것”이라며 “당시 억압받고 고통 받으며 학대당했던 식민지 조선인의 실상을 통해 일제의 비인간성을 경험한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이런 경험이 가네코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기반을 뒀다”고 설명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아나키스트 박열의사를 도와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이들은 ‘대역죄(大逆罪)’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가네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꽃다운 나이인 23세(1926년 7월 23일)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가네코는 박열의사가념관에 그의 묘가 있으며 지난해 7월 23일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추도식 및 기념식에서 일본 후손들은 정부의 훈장을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최근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가네코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이 전 면장과 백 대표 등을 중심으로 부강에서도 그의 기념관 건립 등의 추진되고 있고 세종시 놀이문화협회가 오는 10월 ‘가네코 후미코 음악극’을 준비하는 등 가네코의 정신세계를 이어가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건국장을 추서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산실인 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인 이문창 옹(93)이 이날 홍판서댁 고가에서 한국의 아나키스즘 등과 관련한 1시간 넘게 열정적인 강연이 이어져 주목을 받았다.

    최근 일본이 한국에 대해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 경제보복으로 한·일 간의 갈등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아나키스트 이 회장의 강연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한국 아나키스트 2세대이자 근현대사의 산증인, 한국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장인 이문창 선생, 엄동일 국민문화연구소 전 회장, 고은수‧김동운 부회장, 김창덕 총무이사, 임재환 세종시 문화관광해설사 회장과 세종시 문화해설사, 송두범 충남연구원 정책사업지원단장, 김영아 세종시문화재돌봄사업단 모니터링 팀장, 백원기 문화유산한옥대표, 이규상 전 부강면장, 등이 참석했다. 

    이 회장은 “국민문화연구소는 창설된 것은 해방되던 2년 뒤 1947년에 발족이 됐고 해방 후 이런 역사를 가진 단체가 있겠느냐고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생명력을 이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다. 아나키스트 이야기가 나오고 박열의사와 가네코 후미코를 통해 아나키스트와 국민문화연구소와는 어떤 관계냐가 자연스럽게 의문으로 연결될 것이다”고 서두를 꺼냈다.

    그는 국민문화연구소가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점과 끈질기게 70년이 넘도록 생존해온 것, 그리고 아나키즘 사상과 모토 등에 대해 강의를 했다.
  • ▲ 이문창 한국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이 지난달 31일 세종시 부강면 홍판서댁 고가에서 93세의 나이기 믿기지 않을 정도로 1시간 넘도록 강연을 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 이문창 한국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이 지난달 31일 세종시 부강면 홍판서댁 고가에서 93세의 나이기 믿기지 않을 정도로 1시간 넘도록 강연을 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다음은 이문창 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이 아나키즘 사상 등에 관해 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국민문화연구소는 해방 전후 역사를 소개한다면 아나키스트운동을 소개할 수밖에 없다.” 

    “‘아나키즘 사상’은 단적으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사상’이다. 어느 사상보다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이며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거기서부터 끝을 보자고 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국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근대화, 산업화시대이고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시대이지만 인간이 하나의 노예, 종속적인 존재로, 기술‧과학‧산업‧문명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으로 이렇게 착각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모든 것의 그 중심은 사람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사람이 잘 살기 위해, 건전하게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종속 요소로서 이렇게 행세해야 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문제를 제기한 질문(의문)이고 것이고 이것이 아나키즘사상의 근본이다.” 

    “인간의 문제는 현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사회, 산업화 사회, 사회주의 사회 등은 인간의 위치는 어디에 있느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고 있느냐. 도대체 잡히지가 않는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부터 어디로 돌아가는지 도대체 잡히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 반성부터 우리가 하자는 것이 국민문화연구소가 출발했던 이야기고 그 이전에 아나키즘의 사상의 발전 과제다.”

    “아나키즘은 1879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파리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탈출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프랑스 혁명의 모토는 ‘자유‧평등‧박애(상호부조)’다. 이런 사회로 가야한다. 역사가 인간을 종속하게 살게 했던 것이 그동안의 역사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히 힘 있는 사람이 앞서야 되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고 노예가 되는 것이 당연시된 것으로 역사가 정리되고 기록됐다. 이것을 뜯어 고치고 일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중심으로 뜯어고치자고 발전했다. 그런데 그렇게 가지를 않고 여전히 프랑스 혁명이후 산업혁명의 과정을 보면서 왕의 종속에서 탈출한 것 같은데 이제부터는 권력이 왕이 아니라 ‘돈이 왕’이라는 시대로 발전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돈으로부터 평등하게 되겠다고 한 얘기가 자유‧평등에 대한 반성이 요구됐다. 반성을 통해 서로를 돕고 사랑하고 서로 상호부조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이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문화의 3대 모토다. 이를 가장 충실하고 성실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켜야 되겠다고 한 것이 아나키즘 사상이다. 내가 주인으로서 생각하고, 주인으로서 이웃과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자유‧평등‧박애 사상이고 이것이 근대 아나키즘의 모토다. 이것을 쟁취하자는 것이 자유‧평등‧상호부조의 사상이다.” 
  • ▲ 박열의사를 도와 일왕 폭살을 기도했던 가네코 후미코 부강에서의 생활을 탐구해온 이규상 전 세종시 부강면장이 일제 강점기 부강에서 7년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부강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 박열의사를 도와 일왕 폭살을 기도했던 가네코 후미코 부강에서의 생활을 탐구해온 이규상 전 세종시 부강면장이 일제 강점기 부강에서 7년간 살았던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부강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김정원 기자
    “가네코 후미코, 박열 등 독립 운동가들을 존경하고 3‧1운동을 한지 100년이 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이 무엇이냐고 목표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인간의 목표가 바로 이 세 가지다. 이 모토와 방향성을 가지고 간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국민문화연구소가 생기기 이전 아나키즘이 3‧1운동 이후에 일어난 것은 자유를 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하나로 노예위치로 전락했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야겠다는 것이다. 이 탈출은 일본이, 우리 귀족이 탈출시켜준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내 자각에 의해 자유를 쟁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바로 3‧1운동이다. 일제 강점기 굴욕적인 생활을 하다가 참지 못해 모두 들고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3‧1운동이다. 3‧1운동의 자유라는 정신과 아나키즘과 공통적이다.”

    “그러나 3‧1운동이 한번 만세운동 벌인다고 자유가 찾아졌느냐. 일본 놈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까닭에 독립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 힘으로 자유를 쟁취해야겠다고 일어난 것이 아나키스트의 독립 운동가들이다. 일제 강점기 굴욕의 시대를 사는 동안 그것으로부터 우리 힘으로 자유를 되찾자고 앞장을 선 것이 아나키스트고 아나키스트 선혈들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냉정하게 독립의 반은 우리 선혈들이 피의 대가의 힘으로 찾았으나 완전하게 독립을 찾은 것은 못 됐다. 그것에 비극이 있었다. 만약에 일제 36년 간 일본과 대결해서 우리의 땅을 되찾고 자유를 쟁취했다면 오늘날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면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8‧15해방을 맞자마자 3‧8선이 그어졌다. 이는 우리 힘으로, 자주적인 능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런 지난날의 역사에 살고 있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 자유‧평등‧박애가 얘기돼야 한다. 정부와 법률가가 아니라 백성들이 공부하면서 자기를 찾으면서, 반성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국민문화연구소의 아나키스트 운동이다. 지금부터 뜻이 있는 동지를 찾아 밑바닥부터 재조정해야 하는 것이 아나키스트 공동체운동이다. 사회가 다시 만들어져야 하고 국가 간의 장벽을 쌓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부터는 계몽운동을 하고 서로 연대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동지들이 자유공동체들로 단합하고 자치에 대한 훈련을 쌓아야 한다. 파괴된 밑바닥 소사회를 출발해서 원인을 찾아보자는 것이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러한 사회건설을 하자는 것이 80년 이후 고고하게 연구소를 지키려는, 아나키스트 선혈인 가네코 후미코, 박열을 이야기가 나오고 되찾아 내고 깨우쳐나가자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하나는 독립운동을 한 아나키스트 후손들을 찾아나가자는 것 중 하나의 기념사업이고 그 바닥이 세계 펼쳐있는 한민족의 힘이다. 지금 일제 강점기 그 이전부터 만주벌판으로 고향을 떠난 수많은 동지들, 일본 징용으로 그 고생을 했던 재일동포들의 문제가 깔려 있다. 이들이 하나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조국이다. 재일동포와의 연대를 위해 우리 동포들이 ‘자치(自治)’를 하면서 똘똘 뭉쳐 살고 있고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른다. 동포들을 제 형제들을 다 잃었거나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동포들을 감싸 앉는 세력이 없다. 국민문화연구소가 연변 등의 지역에 ‘책 보내기 운동’을 벌여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1927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이문창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한문을 공부했다. 그는 10대 후반에 아나키즘운동에 투신해 평생 아나키스트로서 자주학습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에 헌신해왔다. 이 선생은 국제통신사 외신기자와 박열의사기념사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