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든 패자든, 구두닦이에 구두 닦아본 적 있는가?객석에 혼자 남아 조명 꺼진 무대 응시하는 ‘나 광대?’
  •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 이재룡 칼럼니스트.ⓒ이재룡 칼럼니스트
    ‘4‧10선거’가 끝났다. 구두닦이는 걸레를 빨지 않는다. 

    ​손톱 밑에 까만 때가 끼었다. 걸레를 손에 짠짠 하게 감고 구두에 물을 묻히거나 침을 뱉는다.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히도록 문지르고 나면 반들반들 광이 난다. 속칭 물광을 낸다. 

    갈라진 손등에 검은 때가 끼었다. 구두약을 바른 후 불로 한번 쓱 지져주고 난 뒤 잘 마른걸레로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히도록 문지르고 나면 반들반들 광이 난다. 속칭 불광을 낸다. 

    ​구두에 적당한 구두약을 발라 마른걸레로 반복적으로 문질러 주면 광은 저절로 난다? 그렇지 않다. 구두약을 구두에 입히는 단순한 작업에도 숙달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온갖 정성을 쏟아붓고 세월을 함께 한 물건에서는 반들반들 광이 난다. 손때 묻었다고 한다. 할머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무쇠솥과 장롱, 어머니가 가슴에 품었던 찬장 속 그릇과 세간살이, 아버지가 늘 앉아 계시던 책상 그리고 눈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던 돋보기를 보자면 눈물이 와락 솟는다. 목이 멘다. 목구멍에서 꺼억꺼억 마른 소리가 들린다. 무쇠솥·장롱·찬장 속 그릇과 세간살이·책상, 돋보기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 광택이 난다. 

    ​구두닦이가 걸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구두에 광을 낸다. 오랜 세월 구두를 닦았다. 걸레는 날긋날긋하게 해지고 덕지덕지 까만 때가 끼었다. 걸레를 빨지 않고 가만히 그늘에 말린다. 다 마르고 나면 툭툭 털어 다시 구두를 문지른다.

    ​구두닦이는 죽음보다 큰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낙선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낙선자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 심장을 도려내는 칼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긴 것입니다. 최고의 축제를 불꽃처럼 불사르셨습니다. 그런데 캠프 식구들은 다 어디 가고 ‘쯔쯔….’ 끝까지 주군을 지켜야지.” 뒷맛이 사뭇 다르다. 

    ​승자는 승자대로 들러리 섰던 ‘골패들’끼리 눈에 독기를 품은 채 자리를 차지하려 ‘대가리 피 터지게’ 짱구(머리)를 굴릴 것이고, 패자는 패자대로 내가 잘했느니 네가 못 했느니 위아래도 없이 손가락 삿대질로 종칠 것이다. 늘 그래왔다. 

    ​또 다른 글이 서슬 퍼런 칼날을 잠재워 준다. “차가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잘 피어있는 꽃에 차가운 눈이 잠시 덮쳤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면 눈이 녹아 우리의 꽃은 다시 피어납니다. 그 꽃을 응원하는 우리가 있으니 우리의 꽃도 힘내시고 진심으로 도와준 모든 분 고생하셨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객석에 혼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바라보며 텅 빈 무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나는 광대였던가? 그 무대 위에서 목이 쉬도록 진정을 토해냈던 시간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고 홀로 양탄자를 걷어내고 있는 내가 을씨년스럽다. 

    ​찝찝하고 자질구레하고 거창한 것은 질색이다. 단언하건대 구두닦이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 

    1929년 월스트리트 전설의 투자자 조 케네디가 구두를 닦기 위해 구두닦이 소년 앞에 앉았다. 그때 구두닦이 소년이 조 케네디에게 말을 던진다. “손님, ××종목이 오른다고 하는데 사세요.” 그다음 날, 조 케네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모두 처분한다. 왜 그랬을까? 당시 주식시장은 최고의 호황이었다. 하지만 조 케네디는 구두닦이 소년마저 주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하락의 신호라고 판단했다. 조 케네디의 예상은 적중했다. 1929년 10월 미국 대공황이 시작된다. 구두닦이 소년 덕분에 시장의 버블을 파악할 수 있었고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닦아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구두닦이 앞에 앉아야 한다. 구두닦이가 진정한 백성이다. 

    길 건너 신작로 사거리에서 낙선 인사를 한다. “부족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구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불로 한번 쓱 지져주고 난 뒤 잘 마른걸레로 닦아주고 싶다. 구두닦이에게 진심을 다해 손을 내민 낙선자의 뒷모습이 수려하다.  

    ​2024년 4월 12일. 인심을 잃지 않아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이재룡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구멍 난 글을 모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