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쌀떡‧메밀묵 팔던 ‘그 시절 그립다’
  • ▲ 지금은 사라진 주판상회 간판이 이채롭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 지금은 사라진 주판상회 간판이 이채롭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워진다.’ 시베리아 코쟁이 푸시킨의 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장대비가 에누리 없이 퍼부었다. 용산역에서 홍성 가는 완행열차에 올랐다. 덜커덕덜커덕 구로역을 지날 즈음 옷소매에 땟국이 반질거리는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인사를 꾸벅하고는 “차내 계시는 아저씨, 아주머니, 삼촌, 형님 그리고 누님 여러분 저는 조실부모하고 혈혈단신으로 이 풍진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서 가련한 이 한 몸을 이끌고 열차에 올랐습니다.” 

    주섬주섬 무얼 꺼낸다. 승객들의 손에 기브 미 추잉껌 한 통이 쥐어진다. 그다음은 멀쑥하게 차려입은 아저씨 한 분이 통로를 막아선다.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치켜들고 연설을 한다. “본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영등포에 자리 잡은 국내 유수 기업 제품으로 한 번 장만하면 대를 이어 쓸 수 있는 만능 칼입니다.” 007 가방 속에는 양담배, 아줌마들이 뿅 간다는 칙칙이, 초콜릿, 일제 연양갱, 윈드밀 카드까지 없는 게 없었다. 

    곧이어 등장하는 무리가 있다. 다리 하나에 목발을 짚은 사람을 선두로 명찰도 계급장도 없는 군복에 찌그러진 모자를 콧등까지 눌러쓴 상이군인 두세 명이 한 조를 이뤄 나타난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백마고지 전투에서 팔다리를 잃고 불구의 몸으로 배고파 우는 자식새끼와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나왔습니다.” 졸고 있던 내 무릎 위에 연필 한 자루를 놓고 간다. 팔에는 쇠 갈고리가 번쩍인다. 살까 말까 고민이 시작된다. 긴 소란이 끝나갈 즈음 왼팔에 완장을 두른 홍익회 판매원들이 거든다. 

    “심심풀이 땅콩, 캐러멜 있어요. 울릉도 쓰르메 있어요.” 이내 작은 손수레를 밀고 온 판매원이 “삶은 계란이 왔어요. 김밥도 있어요. 선데이서울 있어요.” 완행열차는 작은 구멍가게다. 열차가 천안역에 접어들자 대뜸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아줌마가 등을 돌리고 숨는다. 보따리에 숨겨둔 호두과자를 팔다 덜미를 잡힌 것이다. 마음이 섧다.  
  • ▲ 현대인들에게는 근하제복사라는 간판이 생경하다. 지금은 이런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 현대인들에게는 근하제복사라는 간판이 생경하다. 지금은 이런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청량리 성바오로병원 바로 옆 골목에 길게 줄이 선다. 피를 팔기 위해 늘어선 줄이다. 한 번 매혈비로 받는 금액이 끼니 몇 번을 때우고도 남았다. 유용한 급전이나, 용돈, 학비 마련 수단이 되어왔다. 한 번 뽑는 양은 320cc였다. 대학 등록금을 22만5000원 내던 시절에 320cc 매혈비는 1만 원이었으니 한 달에 열 번을 팔면 웬만큼 자리 잡은 직장인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먼저 피를 뽑기 위해 치고박기가 일수였다. 순서에서 밀린 매혈자들은 휘경동 위생병원으로 냅다 뛰어갔다. 눈물이 난다. 

    ​망태기와 집게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온 동네를 휘짚고 다닌다. 상계동 가는 1번 버스를 탔다. 돌연 청량리 미주아파트 앞에서 내려 걸었다. 회기역을 지나 시조사 삼거리를 지나 서울우유 공장을 지나 중화동 한독약품 앞에서 멈췄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환영은 또렷하다. 일그러진 넝마 꾼들의 일상을 보고 싶었다. 못 쓰는 천이나 헝겊, 헌 종이, 박스, 폐지, 공병이 눈에 보이면 닥치는 대로 집어 망태기에 담았다. 간혹 구리나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을 만나기라도 하면 넝마 꾼들끼리 피 터지게 싸웠다.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꽃다리 근처 무심천 뚝방에서 커다란 못을 주웠다. 족히 한 뼘 정도 되는 대못이다. 코흘리개 친구 서너 명을 데리고 운천동 철교까지 걸어갔다. 철로 위에 침을 뱉고 그 위에 대못을 올려놓았다. 철로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다. 열차가 사창동 청주간호전문대를 지나는지 덜커덕 소리가 가물거리게 들린다. 한참이 지나 열차가 ‘뽁〜 뽀오옥〜’ 경적을 울린다. 열차는 철로 위에 놓인 대못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짓누르고 지나간다. 납작해진 대못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대못을 넓고 평편한 자갈에 올려 앞뒤로 갈았다. 코끝이 찡하다. 

    ​이맘때쯤 늦은 밤 흙벽돌 단층 건물 나무 창문에 걸린 걸개를 푼다. 달빛 어스름한 골목에서 어깨에 큰 상자를 메고 귀마개를 쓴 찹쌀떡 장사꾼이 감칠맛 나고 구성지게 “찹쌀 떠억! 메밀 무욱” 밤이 되면 멀리서 기적이 울리는 것처럼 아련하게 찾아오던 아저씨다. 출출하던 밤에 나무 꼬챙이에 끼워져 있는 찹쌀떡이 그립다. 왜 하필 찹쌀떡과 메밀묵을 같이 팔까? 달착지근한 찹쌀떡, 담백하고 똑 부러지는 맛 메밀묵을 먹으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색다른 소리가 들린다. “두부 사려” 소리가 크고 쩌렁쩌렁하게 들린다. 아침에 오는 두부 장수 아저씨의 목소리는 얄궂다. 한 번쯤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 ▲ 아직도 청주 남주동 시장에는 철물점이 장사를 하고 있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 아직도 청주 남주동 시장에는 철물점이 장사를 하고 있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청주시 남문로1가 본정통 수다방 골목(민한당 신경식 국회의원 사무실) 끝에서 금붕어 장사를 시작했다. 양어장에 가서 요령껏 투망을 던진다. 한 번 던지는 데 1만 원이다. 대략 200마리 정도가 투망에 걸린다. 금붕어를 고무대야에 쏟아붓고 선별 작업을 한다. 비닐봉지 하나에 3마리씩 넣고 손으로 빙빙 돌려 공기를 조금 넣은 후 꼭 묶는다. 3마리에 500원이었다. 리어카에 큰 물통을 싣고 뜰채는 손에 쥔다. 호주머니에 십 원, 오십 원, 백 원 동전을 잔뜩 넣고 육거리시장 동명약국에서 출발해 북문로 쟝글제과를 한 바퀴 돌아온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우중충해서 금붕어가 안 팔리는 날에는 밑지고 팔아야 했다. 그래도 열 봉지는 쉽게 팔았다. 마진은 300%다.  

    ​땟국물도 벗지 못한 조무래기들의 아지트는 단연 궁전다방이다. 수다방에서 중앙공원 방향으로 300보 정도 걸어가면 청주문화방송국 1층 흥업무진(훗날 흥업백화점) 옆 복도 끝에서 영업했다. 모닝커피라도 주문하면 계란 반숙을 덤으로 준다. 다리를 꼬고 앉아 가장 멋있는 자세로 양은재떨이에 담뱃재를 턴다.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레지 누나가 석간신문과 엽차를 내놓았다. 조무래기들은 누나라고 불렀다. 누나 몸에서는 분 냄새가 진동한다. 설사 누나를 곁에 두고 쌍화차라도 마신 날은 선데이서울 잡지를 보면서 밤새워 뒤척인다. 

    궁전다방에는 전속 구두닦이가 있었다. 팔이 하나 없어서 외팔이 또는 ‘찍새’라고 불렀다.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구두를 찍어왔다. 신기했다. 성한 팔로는 핸들을 잡고 팔이 없는 어깨엔 찍은 구두를 걸고 페달을 힘껏 밟으며 본정통을 누비고 다녔다. 외팔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았다. 조무래기들은 외상으로 구두를 닦고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지만 외팔이는 단 한 번도 외상값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외팔이에게 구두를 맡기면 서비스로 물광을 내줘서 반짝반짝했다. 그랬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까맣게 잊었다. 해 저물어 어둑한 초저녁에 어깨를 움츠리고 영화음악사와 청주 땅콩 사잇길을 지나다 외팔이를 보았다. 너무도 놀랐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주름이 깊게 파인 외팔이는 여전히 자전거에 몸을 싣고 구두를 수거하고 다녔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었다.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기립 자세를 했다. 미처 몰랐다. 존경한다.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이제는 번듯하게 ‘중앙구두수선’ 간판을 달고 살아있다. 짠하다. 

    ​완행열차 안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옷소매에 땟국이 반질거리는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 007 가방을 들고 멀쑥하게 차려입은 아저씨, 다리 하나에 목발을 짚고 명찰도 계급장도 없는 군복에 찌그러진 모자를 콧등까지 눌러쓴 상이군인, 왼팔에 완장을 두른 홍익회 판매원, 호두과자를 팔다 덜미를 잡힌 아줌마가 서럽다. 간혹 구리나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을 보기라도 하면 피 터지게 싸우던 넝마 꾼들, 급전이 필요해 피를 팔려고 긴 줄에 매달린 사람들이 심장을 멎게 한다. 

    ​달빛 어스름한 골목에서 어깨에 큰 상자를 메고 귀마개를 쓴 찹쌀떡 장사꾼, 아침이면 찾아오는 두부 장수 아저씨, 코흘리개 친구 서너 명과 철로 위를 걷던 초딩, 리어카에 큰 물통을 싣고 뜰채는 손에 쥐고 있던 이십대, 자전거에 구두닦이통 단 하나를 메고 모진 생을 이겨낸 외팔이를 생각하면 소름 돋는다. 

    ​터벅터벅 때론 깔딱 숨 헐떡이며 쏜살같이 달리던 그 길을 걷는다. 걷다 보니 밤이 되었다. 그 길에 서서 그 길에게 묻는다. 그리움은 어떤 색일까? 어떤 내음일까? 어떤 추억일까? 어떤 상처일까? 어떤 몸짓일까?

    ​2024년 1월 21일 행여 가끔은 아주 가끔은 뒤를 돌아보게 된다. 뒤를 돌아보면 저만치에서 보랏빛 무지개, 구수하고 담백한 청국장 냄새, 켜켜이 쌓인 이야깃거리, 가슴을 후벼 파놓은 아픈 흔적,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만큼 바보스러운 몸짓이 그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