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여 짝 지음은 원초적인 안정”
  • ▲ 흑백사진 속의 환하게 웃는 부부.ⓒ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 흑백사진 속의 환하게 웃는 부부.ⓒ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당신이 나의 짝인가?’ 

    ​부부에겐 앳된 시절의 뽀얀 복숭아 따위가 가히 범접할 수 없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부부는 서로를 보며 특권을 누린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봤니? 주름 깊게 패게 늙어봤니?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허, 거미줄 친 초옥이라도 살 같은 자식과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았으니 장땡 아녀? 익살스럽게 묻고, 묵묵부답이다. 

    ​이마의 주름에는 인생의 질곡을 한 짐 바리바리 지고 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거울에 비춘 얼굴에는 황량한 바람에 부대낀 늙음의 무게와 그늘이 무겁고 깊게 검버섯이 되어 잔뜩 하다. 늙음으로 가는 여정인데 주름이 곱네 마네 검버섯이 두꺼우네 마네 지랄 맞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말수가 적었던 당신의 곧은 성품만이 늘그막에 입가의 잔주름으로 남아 결이 곱다. 

    ​입이 있되 내뱉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든 가슴속에 독설을 품고 산다. “평생 마지못해 부부로 살았다?” 섬뜩한 독설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므로 늘 완전과 안정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음으로써 서로 간에 가장 큰 안정감을 얻는다. 이것이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가장 원초적인 안정이라고 하겠다. 

    ​부부는 무촌이다. 부모와 자식 간이 ‘1촌’이고, 형제자매 간이 ‘2촌’이고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부다. 너무나 가까워서 촌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무촌’이라 했겠다. 또한, 혈연으로는 남남이라는데 무촌의 의미가 숨어 있다. 촌수를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먼 것이다. 따라서 부부란 아주 가깝고도 먼 사이라 할 수 있다. 남남이 짝을 지어 누구보다도 가깝게 사는 게 부부인 것이다.

    ​부부는 천생연분이라 했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대목이지만, 이 물음에 성의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리고 살다가 문제가 생기는 사람 중에는 이 물음에 성의 있는 대답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다.

    ​짝은 ‘어수지친(魚水之親)’을 볼모로 삼아 서로를 부른다. 여자는 남자를 가리켜 남편, 서방, 오빠, 애 아빠, 부군이라 부르고 남자는 여자를 가리켜 부인, 누나, 애 엄마, 사모, 여사, 마누라, 아내라 부른다. 시부모는 어린 며느리를 아가라 불렀다.

    ​한때 자주 들락거리던 아지트가 생각난다.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 고개를 넘어 복대동 공단오거리를 가다 보면 오른쪽 대로변 2층에 ‘짱 박혀’ 있던 ‘팬더하우스’ 간판이 보인다. 흠칫 놀라지 않는다면 거짓 눈물이다. 종편 TV조선 ‘조선의 사랑꾼’ 예고편이 화면에 가득하다. 태진아(조방헌)가 5년 전 치매 판정을 받은 아내 이옥형에게 “내가 누구예요?”라고 묻자 “몰라요”라고 대답한다. 자신을 몰라보자 “나를 천천히 잊어줬으면 좋겠어”라며 눈물을 훔친다. 아내를 위해 부른다는 노래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음색이 어설프고 낯설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방문을 열고 짝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질 않아 순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르는 남자가 불러서 대박을 터트린 노래 한 곡 ‘가버린 사랑’을 찾았다. KBS ‘노래가 좋아’에 출연한 이웃집 할아버지 윤덕휘는 마이크를 잡고, 손녀 윤서연은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담백한 드라마를 연출했다. 어떤 조미료도 가미하지 않은 순백의 목소리가 긁히므로 다가온다. 멋스럽고 맛깔스럽다. 진정한 짝이다.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부부의 사진첩은 보물창고다. 젊을 때 찍은 부부 사진을 보면, 시루떡처럼 짝 달라붙어 있다가 세월이 녹슬어 머리칼이 하얗게 세고 나면 가운데 자식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다. 여보 이리 가까이 오구려, 아이고 당신이 냅다 이리 오구려. 멀어서 그런가?

    ​이런 꿈을 꾼다. 꿈에 부인이 속옷 차림으로 있으면 남편의 신분이나 지위가 높아지고, 돈과 재물도 얻게 된다. 부인이 바람을 피우면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치거나 하는 일이나 사업이 번창한다. 부인이 죽으면 큰 이득을 보게 되거나, 명예스러운 일이 생긴다. 어쩌면 내 아내도 이런 꿈을 꾼다. 꿈에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남편을 죽였으면 좋겠는데 죽이진 못하겠고 그냥 알아서 죽었으면 좋겠다. 한술 더 떠나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에서 깬 아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편을 꼬나본다. 가슴이 뜨끔했다. 개꿈이다. 

    ​꿈은 꿈이고 부부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이가탄처럼 살아야 쫄깃하다. 

    ​한 생명이 떠날 채비를 한다. 바로 보고(正觀) 깊이 보면(觀照) 보인다. 시한부 인생의 마지막 소망은 시간을 붙잡는 것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 일부로 돌아간다. 마스크(假面)를 쓴 채 아닌 척 그런 척 살았다.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다. 

    ​가을날 낙엽이 뒹군다. 이리저리 쓸리다 한곳으로 모였다가 불현듯 휑하니 날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절대 바람을 볼 수가 없다. 낙엽의 움직임을 통해 바람을 본다. 부부는 이를 잊고 살았다. 그렇게 세월은 바람에 맞서 부부의 연을 돈독하게 응집시켰지만, 낙엽으로 돌아간다. 세월은 기다리지 않고 겨울을 재촉한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무지막지하게 폭설이 쏟아져도 사박사박 솜사탕 뜯는 멜로디만 감미로울 뿐 곤하게 잠든 부부를 깨우지 않는다. 간간이 마당에 풀어놓은 복실이가 눈을 헤집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리면 잠에서 깬 동네 강아지가 제일 신난다. 부부는 조용하다. 그렇게 자연 일부가 된다. 

    ​부부의 웃음은 크기가 상당히 크고 향기가 엄청나게 진했다. 부부는 항상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지만 가린 입가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와 짐짓 함박웃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함박눈처럼 슬그머니 왔다가 함박웃음 지으며 자연 속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당신이 나의 짝이 되었을까? 꽃을 피우기 위해 당신을 짝으로 찍었다. 작약꽃이 만개하면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박꽃은 부부를 살뜰히 묶어 주었다. 

    ​2024년 2월 7일. 짝에 세찬 바람이 불거들랑 등을 지어 막아 주고, 짝 어깨에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이거들랑 그 어깨에 기대어 함박웃음을 쏜다. 이재룡 당신이 나의 짝이 된 이유를 느지막한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