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이에 그린 오징어 게임장.ⓒ자료 제공 이재룡
    ▲ 종이에 그린 오징어 게임장.ⓒ자료 제공 이재룡
    인생을 살아보니 ‘덤’은 공짜가 아닌 ‘미션’이었다. 

    ​오른쪽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의 모습이 꽤 멋 있다. 형을 졸랐다. 반상 위에선 이미 둘만의 ‘오징어 게임(○△□)’이 시작된다. 형의 묵인 아래 바둑판에 표시된 아홉 개의 검은 점(點)에 검은 돌 아홉 개를 올렸다. 형에게 악을 쓰고 덤벼도 판판이 졌다. 흑 돌은 백 돌에 처참하게 도륙당한다. 형에게 얻은 아홉 개의 덤을 가지고는 굳힘도 걸침도 무용지물이다. 덤이라고 생각한 것이 태생부터 잘못이었다. 

    ​마당에 큰 천막이 펴지고 멍석이 깔리고 이내 잔칫상이 차려진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늴리리야 늴리리 늴리리 맘보”를 신명 나게 부르며 어깨춤을 들썩였고,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바치어 무엇하나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연신 태평가를 불러댄다. 때론 퉁소, 나팔, 피리 소리가 더 큰 흥을 북돋운다. 쇠고기, 무, 생선 전, 우간 전, 황백지단, 버섯, 홍고추, 완자, 깐 호두, 은행, 약과, 켜켜이 쌓아 올린 한과 등등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그중에 백미는 부침개가 따봉이었다. 지짐이 지글대는 소리에 놀라 눈앞이 아찔했고, 고소한 냄새에 입맛을 다시며 코를 움찔댔다. 

    ​‘십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십이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하나씩 세어 나가다 보면 10과 12의 최소공배수인 60이 되어 다시 자기가 태어난 해가 된다. 그리고 한자로 세는 해는 항상 60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환갑(還甲)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바라는 기대 수명은 남녀 통틀어 61세였다. 그러니 60세가 넘으신 어르신의 장수를 축하하고, 또 앞으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이벤트를 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늴리리 맘보, 태평가는 환갑 잔칫상 OST가 분명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한 동네에 이런 이벤트 행사를 여는 집이 고작 서너 집밖에 안 되었으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애잔하고 슬픈 잔상이 오래도록 가슴을 누른다. 

    ​환갑 잔칫상을 받은 어르신은 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사뭇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뒷짐을 집고 좀 더 널찍한 팔자걸음 일색이었고, 이따금 어르신 앞에 누구라도 지나가면 괜스레 “에헴” 하며 헛기침도 했다. 가끔은 멋스러운 지팡이를 가지고 길을 나선다. 이쯤 되면 평소 엄지와 검지에 끼워 피우던 담배도 호마이카 빨부리에 넣고 폼나게 연기를 뿜는다. 이제부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멋스러움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달려 2024년 달력을 넘긴다. 일반적으로 60세 이상이 되면 정년이라 하고 인생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시점이다. 이 시기를 정점으로 일부 눈치 빠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은퇴이민 비자를 발급해 주겠다고 하자 냅다 은퇴이민을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되려 철 지난 60세는 그 어디에 명함도 못 내민다. 환갑 잔칫상은 언감생심이고 여전히 야생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잘 들리고, 잘 보이고, 잘 먹고, 잘 싸고, 사지 멀쩡한데 웬 어른 타령이냐며 핀잔만 듣기 일쑤다. 덤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 ▲ 회갑잔치에 모인 가족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 회갑잔치에 모인 가족들.ⓒ자료 이재룡 칼럼니스트
    ​‘사갑제(死甲祭)’, 어여 섧다. 살아서 받지 못한 ‘상(床)’을 죽어서야 받으니 잔칫상이 아니고 제사상이다. 2년 전 투병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족의 품을 떠난 여느 어르신이 환갑을 맞이했다. 장성한 자식들이 모여 이른 아침 미역국을 끓여 상에 올리고 정성스레 장만한 제물을 제단에 놓고 나면 축문을 읽는다. “아버님 어머님, 세월은 무심히 흘러 생신의 경사스러운 날이 다가왔으니, 돌아가셨다고 한들 감히 잊을 수 없어서 추모하는 마음 이길 수가 없사옵니다. 삼가 맑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 의식의 전을 올리오니 흠 향하시옵소서.”

    ​마당에 펴져 있던 커다란 천막과 멍석은 사라진 지 오래고 온 동네 사람들도 오 간에 없으니 덜렁 남겨진 장성한 자식들만 축문을 펴 놓고 자리를 지킨다. 

    ​운동장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 모양의 오징어 게임 경기장을 그린다. 공격팀은 쉼통에 서서 같은 방식과 순서대로 깨금발로 이동해야 하며, 수비팀은 공격팀이 이동하는 동안 방해를 하여 금을 밟게 하거나 양발로 딛게 하여 죽여야 한다. 공격팀이 쉼통에서 반대편 쉼통으로 이동할 때는 바깥마당에서도 덤으로 두 발을 디딜 수 있다. 공격팀이 문을 향해 간 다음 다시 만세 통까지 수비팀의 방해를 피해 한 바퀴를 돌아 통과하면 게임은 끝난다. 쉼통은 덤이고 환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릴 때까지 깨금발로 뛰었다. 

    ‘​덤은 공짜가 아니다’. 환갑을 완성하기 위한 바름, 봉사, 나눔, 측은지심을 실천하라는 미션이다. 

    ​2024년 2월 2일.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이재룡 소주와 맥주를 일대일로 섞어 다금바리(멸치) 안주를 곁들여 단숨에 들이켠다. “카∼” 나는 내 인생에 술을 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