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미군 네이팜탄 폭격으로 단양 영춘·강원 영월 주민 360명 사망”유가족들, 헌재 ‘과거사 소별시효 적용 위헌’… 정부에 ‘피해보상’ 청구
  • ▲ 조병규 단양곡계굴희생자대책위원장이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과 마을주민들이 몸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 생활했던 곡계굴을 가르키고 있다.ⓒ목성균 기자
    ▲ 조병규 단양곡계굴희생자대책위원장이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과 마을주민들이 몸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 생활했던 곡계굴을 가르키고 있다.ⓒ목성균 기자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은 태화산의 물줄기가 굽이쳐 휘돌며 남한강의 절경 북벽을 만들고 아름드리나무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마을을 품어주는 인심 좋고 그림 같은 곳이다.

    나지막한 담 너머로 아직도 어머니의 정겨운 음성이 들릴 것 같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 평화스런 마을의 뒤편 동굴엔 아직도 그치지 않은 피울음소리가 들려온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9주년이 지났지만 단양군 영춘면 상리 ‘통한의 곡계굴’ 희생자 유가족들은 6월이면 한숨과 분통으로 식사는커녕 잠조차 이루지 못한다.

    이 마을에서 6대째 살아온 조병규씨(73·단양곡계굴희생자대책위원장)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다음해인 1월 20일 그는(당시 5세) 마을 뒤편 곡계굴에 몸을 피하고 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할아버지, 고모, 동생 등 모두 4명이 숨지는 것을 목격했다.

    2012년까지 곡계굴희생자대책위원장을 맡아왔던 고 엄한원씨는 한국전쟁 당시 17세 나이에 피란을 가지 못해 식구들과 동네 근처 곡계굴에 숨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 다섯, 친척 등 11명을 잃었다.

    조 위원장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가까워 오지만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부모, 형제, 친지들의 명예회복과 영혼을 달래주지 못해 가슴이 터진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개월째인 1951년 1월 4일.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도 영월군 주민 400여명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간편한 봇짐을 싸들고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민들이 단양을 향하던 중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서 미군이 탱크를 길을 막고 통행을 막자 이들은 되돌아 영춘면으로 되돌아 와 이 마을(상2리) ‘곡계굴’에 잠시 몸을 숨기게 됐다.

    ‘곡계굴’은 천연 석회암 동굴로 동굴 안이 넓고 추위도 피할 수 있어 피란민들이 임시로 생활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조병규씨와 가족들이 이 동굴에서 10여일을 지내던 1월 20일 오전 10시께.

    미군비행기 4대가 굉음을 내며 비행을 하더니 피란민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굴을 향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피란민들은 폭격이 이어지자 미군비행기를 향해 흰옷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흔들며 피란민임을 알렸지만 비행기는 굴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계속했다고 한다.

  • ▲ 곡계굴 합동위령제에서 천태종 구인사 스님들이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 마을 주민들과 유가족들은 매년 음력 12월 12일에 맞춰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열고 있다.ⓒ목성균 기자
    ▲ 곡계굴 합동위령제에서 천태종 구인사 스님들이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 마을 주민들과 유가족들은 매년 음력 12월 12일에 맞춰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열고 있다.ⓒ목성균 기자

    이날 피란민들이 있던 곡계굴을 향한 미군의 폭격은 16시간 동안 계속됐다고 조 위원장은 설명했다.

    조 위원장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굴이 몸을 숨기고 있던 피란민 360여명이 불에 타 죽거나 질식해 숨졌다”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미군은 비행기 폭격으로 숨이 막혀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피란민을 향해 비행기에서 기관총 집중사격을 가했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때 미군이 피란민이 있는 동굴을 향해 무차별 사용한 폭탄은 ‘네이팜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줬다.

    ‘네이팜탄’은 월남전에서 사용한 폭탄으로 휘발유에 나프텐, 팔미데이트를 혼합해 만든 무기로 폭파 후 3000도의 고열을 내는 살상무기다.

    이 폭탄이 떨어지는 반경 30m이내는 불바다가 되고 이 일대 산소를 고갈시켜 사람을 타죽게 하거나 질식해 죽게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3만2000여t의 엄청난 양의 네이팜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군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숨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산악지대인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예천, 강원도 영월지역을 대상으로 이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단양과 예천사이 지역 75%가 초토화됐다.

    이 같은 사실은 2007년 4월, AP통신이 미국의 해제된 문서를 통해 “1951년 1월 20일 미군 전투기가 충북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피란민을 향해 ‘네이팜탄’을 투하해 이 굴에 있던 피란민 300여명이 사망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AP통신이 당시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 현장 6곳의 희생자 수는 충남 아산 둔포(300명)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한국전쟁 중 미군의 네이팜탄 사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생존자들과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굴에서 숨진 시체들이 동굴과 연결된 냇가에 부패된 채 방치되거나 떠내려 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여년이 가까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 민족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 ▲ 곡계굴 바로 맞은편 앞마당에 세워진 '통한의 곡계굴 위령비'.ⓒ목성균 기자
    ▲ 곡계굴 바로 맞은편 앞마당에 세워진 '통한의 곡계굴 위령비'.ⓒ목성균 기자

    그동안 우리정부는 한국전쟁 중 야만적인 학살문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논리로 방치하거나 애써 외면해 왔다.

    이유도 모른 채 희생당한 유가족들은 반공이 국시가 되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피눈물을 삼키며 그날의 아픔에 대해 숨죽이도록 강요받아 왔다.

    참여정부시절인 2005년, 열린우리당 주도로 만들어진 국가차원의 과거사진실규명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단양 곡계굴 희생자 유가족을 찾았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유족들은 “60여 년간 한 맺힌 억울함을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동안 빨갱이로 몰릴까봐 숨을 죽이며 죽은 목숨으로 살아 왔다”면서 진실이 밝혀지고 보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진실위가 조사를 벌인 단양 곡계굴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이 내려졌지만 현재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정부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구인 ‘과거사진실위’는 발족 4년 2개월만인 2009년 6월 조사활동을 마쳤다.

    60년 가까이 사회적 냉대와 연좌제 차별 속에서 숨죽이면서 살아온 단양 곡계굴 유족들은 “그동안 참고 지내온 아픈 상처만 파헤쳐 놨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진실위의 진실규명 결정의 권고사항은 말 그대로 ‘권고사항’에 그치고 만 것이다. 

    단양 곡계굴 피해 유족들은 “차라리 시작이나 하지말지, 그동안 생각조차 하기도 싫은 아픈 상처만 들춰내고 이제 와서 ‘진실규명’만 내리면 달라지는 게 뭐가 있냐”며 울먹였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명예회복과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69년이다.

    단양 영춘면 곡계굴 민간인 학살사건은 피해규모와 참상이 ‘영동 노근리 사건’보다 더욱 처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역사회나 정부의 관심에서 점차 잊혀가고 있다.

    2009년 충북도는 안전행정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을 찾아 곡계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대표사건으로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유가족들에게 명예회복을 받을 수 있도록 ‘곡계굴 사건 특별법 제정’을 건의 했지만 이날까지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조병규 단양곡계굴희생자대책위원장은 “진실규명이 내려지지도 11년이 지났다”며 “‘과거사에 대한 소멸시효 적용은 위헌’이라는 지난해 헌재 결정에 따라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가 무정부 상태도 아닌데 ‘미군의 소행’이라며 정부가 발을 빼는 것은 국민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주장했다.